야권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이들은 선거 때마다 속이 탄다. 단일화만 하면 승리가 당연한데 왜 매번 협상은 덜컹거리고 몇 번씩 결렬의 고비를 겪으며 지지자의 진을 빼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는 어느 한쪽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빼앗는 게임이기도 하다. 쉽게 조정이 될 수 없는 구조다. 특히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아 정치 협상을 통한 단일화보다도 훨씬 까다롭다. 2002년 대선, 올해 4월 울산 북구, 10월 안산 상록을 세 차례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시도를 비교해 보면, 단일화가 성립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보인다.

2002년 ‘노무현(오른쪽)·정몽준(왼쪽) 단일화’는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방식의 ‘탄생설화’ 격이다.
단일화하면 이기고 안 하면 진다 : 대전제다. 단일화 논의가 가능한 두 후보 외에 강력한 1등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테이블에 앉은 두 후보가 단일화를 이뤄내면 역전이 가능해야 한다. 2002년 대선 단일화 협상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30%대 초반, 노·정 두 후보는 각각 20% 안팎의 지지율을 보였다. 전형적인 2·3위 간 단일화 구도다. 4월 울산에서도 김창현·조승수 두 후보가 독자 출마하면 한나라당 박대동 후보에 진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10월 안산’은 이 대전제를 충족하지 못했다. 단일화 협상이 타결됐던 10월21일에는 이미 선거 판세가 민주당 김영환 후보에게로 기울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 후보로서는 본선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데 전망이 불투명한 ‘예선’을 치르는 게 달가울 리 없다. 민주당 지도부는 “임종인 후보가 방송에서 단일화 협상 타결을 먼저 밝히는 중대한 규정 위반을 했다”라며 합의를 파기했지만, 민주당 내에서조차 “서명까지 한 단일화 협상안을 파기하는 이유로는 설득력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당이 주도해 타결한 단일화 협상안에 현장의 김영환 후보 측이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고, 지도부로서도 ‘합의를 깰 구실’이 필요해 임종인 후보의 방송을 걸고 넘어졌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서로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 두 후보가 ‘인물 경쟁력 대 정당 경쟁력’으로 강점이 갈리는 구도가 전형적이다. 2002년 대선 당시에는 참신함으로 어필하던 정몽준 후보와 민주당의 정통성을 가졌으되 ‘김영삼 대통령 시계 사건’ 등으로 상처를 입었던 노무현 후보가 테이블에 앉았다. 올해 4월 울산 북구 단일화는 정확히 이 구도에 들어맞는다. 민노당의 인지도와 조직력을 등에 업은 김창현 후보와, 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연이어 지내 인물 인지도가 높은 조승수 후보가 협상에 나섰다. 10월 안산에서도 인물 인지도가 높은 임종인 후보와 정당 경쟁력에서 앞선 김영환 후보 사이에 논의가 진행됐다.

여기서부터 서로 ‘인물’과 ‘정당’을 조금이라도 더 강조하는 여론조사 문항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샅바싸움이 벌어진다. 단일화 협상이 늘 ‘데드라인’에 임박해서야 성과를 보는 이유다. 인물 경쟁력이 앞선 쪽은 ‘단일후보 적합도 조사’를, 정당 경쟁력이 앞선 쪽은 ‘본선 경쟁력 조사’를 선호하는 게 보통이다. 전자는 두 경쟁 후보 간의 1대1 선호도를, 후자는 본선 상대 후보(한나라당)와의 가상대결을 묻는다. 전자가 인물 위주로, 후자가 정당 위주로 판단하기 쉬운 질문인 셈이다.

2002년 대선 당시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경쟁할 단일후보로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라는, 적합도와 본선 경쟁력을 뒤섞은 문항을 사용했다. 4월 울산에서는 단순 지지도만을 물었다. 협상이 막바지까지 몰리며 조승수 후보 쪽이 적합도 조사 요구를 접은 결과였다. 파기되긴 했지만 10월 안산에서는 적합도와 경쟁력 조사를 5대5로 반영하기로 합의했다. ‘인물 대 정당’이라는 고전적 구도에서 나름의 절충점을 찾은 협상안이다.

ⓒ조남진안산에 출마한 민주당 김영환 후보(왼쪽)와 무소속 임종인 후보(오른쪽)는 결국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 10월 안산 테이블에서는 적합도 조사에서도 후보 이름 앞에 정당명을 표기해야 한다는 민주당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임종인 후보 사이에 긴장이 지속됐다. 결국 최종 합의안에서는 적합도 조사에서 정당명이 빠졌는데, 이것이 김영환 후보 측의 반발을 불러 협상 파기로 이어졌다.

조사 대상을 적극 투표층으로 한정할 것인지의 문제도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하다. 인물 경쟁력이 앞서는 후보는 지지자의 충성도가 높아 적극 투표층으로 한정할 때 지지가 더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 임종인 후보 캠프 자체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이 적극 투표층인지 전체 응답자인지에 따라 10% 포인트 이상 차이가 났다. 한나라당 지지자가 본선에서 ‘만만한’ 후보를 고르는 이른바 ‘역선택 방지’ 조항도 인물경쟁력에서 앞서는 후보에게 약간이나마 불리하다고 본다. 역선택을 거르는 효과보다 인물 인지도에 딸려 들어온 한나라당 지지자를 거르는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4월 울산에서 쟁점이 됐다.

이런 ‘디테일’까지 협상 과정에서 하나하나 주고받으며, 어느 쪽에서도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설 때야 비로소 단일화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단일화 협상과정은 늘 지지부진하고 결과는 늘 아슬아슬하다. 2002년 대선 때는 4.6% 포인트, 4월 울산에서는 1.4% 포인트 차로 승패가 갈렸고, 10월 안산 역시 시뮬레이션 결과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몇 차례 단일화 전례를 갖고 있음에도 매번 논의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는 것은 ‘서로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드는 선이 선거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모델, 4월 울산 모델, 10월 안산 모델이 모두 다른 것도 그래서다. 10월 안산 협상과정에서는 민주당이 ‘민노당·진보신당 모델(단순 지지도를 조사한 4월 울산)’을, 임종인 후보 쪽이 ‘민주당 모델(지지도와 적합도를 뒤섞은 2002년 대선)’을 주장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외부 압력은 필수다 : 이런 수많은 요소를 현장에서 모두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단일화를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는 외부 압력이 없이는 판이 깨지기 십상이다.

4월 울산에서는 진보 정당의 핵심 지지세력인 현대차노조의 태도가 결정적이었다. 당시 현대차노조는 “단일화가 없으면 선거운동도 없다”라며 두 당의 후보 단일화를 강력히 촉구했다. 독자출마론도 만만치 않았던 김창현 후보 측을 테이블로 끌어낸 가장 큰 변수로 거론된다. 10월 안산은 이른바 ‘반MB 연대’라는 시민사회와 중앙당 차원의 판짜기와 연계돼 있다. 특히 민주당에서는 안산 단일화를 매개로 양산과 수원에서 민노당의 양보를 받아내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10월21일 적합도 조사에서 당명 표기를 포기하며 단일화 협상안에 서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현장에서 반발해 중앙당 차원의 선거구상도 헝클어졌다. 중앙당이 현장에 행사하는 ‘외부 압력’이 단일화를 성사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얘기다. 민주당은 수원에서 승리해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접전을 펼쳤던 양산에서 민노당과 단일화에 실패한 것은 안산의 결렬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단일화 프레임’은 유효한가 : 다음 무대는 내년 6월 지자체 선거다. “‘안산의 상처’가 곧 잊혀질 것”이라는 전망과 “매우 나쁜 전례”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현재로서 전망은 썩 밝지 않다. 민노당 오병윤 사무총장은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라는 방식 자체가 독자적 정강·정책을 가진 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정치 협상을 통한 단일화는 생각해볼 수 있지만, 이번에 보았듯 민주당이 내부 이해관계를 조정할 능력이 없다. 현재로서는 독자 생존이 답이다”라고 말했다.

진보신당의 한 선거전략가는 현실적 문제를 제기했다. “지자체 선거는 한 사람이 네다섯 번 투표하는 선거이고, ‘대장’을 따라 한 줄로 찍는 선거다. 서울시장 후보, 경기지사 후보 같은 대표 브랜드가 전체 선거를 좌우한다. 그런 깃발을 다른 당에 넘겨준다는 건 기초단위 선거까지 모조리 포기한다는 얘기다.” 대선이나 한두 선거구의 국회의원 선거 같은 ‘단순한’ 판이라면 모를까 지자체 선거에서 단일화 협상은 난관이 더욱 크다는 뜻이다.

시민사회와 반한나라당 유권자의 야권 단일화 압력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어느 정도나 구현될지도 짐작하기 힘들다. 오병윤 사무총장은 “이번 안산 단일화 협상을 한 네 명 중 시민사회 대표가 두 명이었다. 자신들이 서명까지 한 협상안이 깨져나가는 데도 시민사회가 조정을 시도조차 하지 않더라”며 불신을 드러냈다.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라는 ‘반한나라당 연대’의 기본 틀이 조금씩 선례를 쌓아가고는 있지만, 공고한 흐름으로 이어질지 한때의 정치실험으로 그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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