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은 진보, 개혁, 민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해온 이른바 ‘386 세대’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존재다. IMF 개혁 이후 ‘신자유주의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다른 진보적 인사들과 달리, 신자유주의로 불리던 앵글로색슨(미국과 영국) 계열 중도좌파들의 개혁 노선에 오히려 천착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소장과 사회디자인연구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해왔으며 최근엔 〈노무현 이후〉라는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김대호 소장은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GM 매각 이전의 대우자동차에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2001년 대우자동차 파업 당시엔 회사와 노동조합, 은행, 관료, 지식인 그룹 등의 문제점을 모두 날카롭게 드러낸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를 출간하기도 했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시사IN이 김소장을 만난 이유는, 김소장의 내면에서 이런 현실 경험과 영미 중도좌파에 대한 지적 천착이 접합되어 어떤 ‘진보적 지평’을 열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나름대로의 치열한 고민 끝에 도달한 분석과 대안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정말 ‘가차 없었다.’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노동조합까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엔 다소 무리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리 그 자체로 만만치 않은 개연성과 설득력을 가져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폭넓은 성찰과 토론을 기대한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은 영국 신노동당의 노선(107호 ‘영국 신노동당 신자유주의 투항인가 진보사상 혁신인가’ 참조)을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 지식정보화, 과학기술혁명으로 집약되는 문명사적 변화에 대한 이념적, 제도적, 정책적 응전이며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이라고 정리한다. 한마디로 지구화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노동당 고유의 진보적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모색이었다는 이야기다.

신노동당 노선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설명을 빌어 영국 신노동당의 개혁 노선을 정리하자면, 우선 ‘지구화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다. 지구화로 인해 자본이 이 나라 저 나라로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면서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 안정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중․선진국에서는 기존의 산업과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 신노동당은 자본의 이동을 차단하기보다 오히려 ‘유연한 노동시장’을 지구적 대세로 받아들이고 “사회민주주의자도 이를 막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로 영국 신노동당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교육(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다. 자본의 이동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런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 있는 개인’을 ‘공교육 강화’로 대량 양성하자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누구나 ‘능력 있는 개인’으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소득층 어린이들도 노력만 하면 부유층 어린이들에 못지않게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고소득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상교육, 학비지원, 아동발달계좌 등의 정책 패키지가 등장했다. 이는 시장의 역동성과 노동의 유연화를 받아들이는, 신노동당 버전의 ‘평등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호 소장 역시 이런 정책들을 “경쟁의 입구에서 그 출발선을 맞추겠다는 정신”이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그동안 한국 지식인들은 북유럽 사민주의를 전범으로 삼고 영국은 신자유주의로 격하해왔는데, 오히려 한국과 영국이야말로 사회적 베이스가 비슷하다.”

그런데 김대호 소장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영국 신노동당 모델의 역사적 배경과 한국의 현실을 재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 신노동당 노선은 한국 상황에서 작동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노동당 노선은 ‘지구화’와 ‘시장의 확대’(과잉시장)로 인한 사회․경제적 폐해에 대응하기 위해 출현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 나타나고 있는 각종 사회․경제적 폐해 중 상당수는 ‘시장의 과잉’(영국의 경우)이 아니라 “시장이 지나치게 작아서”(과소시장)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일단 비정규직이 되면 헤어나기 힘든 사회다. 위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촛불 문화제.

  “진보는 신기득권층이 되어버렸다” 

예컨대, 한국에서 부동산 소유자와 비소유자 간의 격차를 보라. 전자의 자산 소득은 때로 중산층 연봉의 몇 배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이것이 시장 때문인가? 학식과 강의 능력이 비슷해도 전임교수의 소득은 시간강사의 10배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시장 때문인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 직원과 하청 직원 역시 전자의 소득이 후자의 두 배를 상회한다. 공공 부문 노동자의 고용 안정도는 민간 부문 노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다.

김대호 소장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일단 ‘승리’해서 부동산을 가지거나, 공공 부문(공기업, 관청)에 들어가거나, 대기업(=원청기업) 정규직이 되기만 하면 능력과 헌신에 관계없이 높은 임금과 고용 안정성이라는 ‘특혜’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다. 그러나 이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이나 실업자, 아직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 세대 등은 이런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다. 패자들은 승자들과의 격차를 도저히 줄일 수 없고, 그래서 양극화는 심화된다. 그러나 이는 시장이나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좋은 직장’의 노동자들과 외부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위적인 진입장벽의 탓이 더 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혜 구조’이다.

시장 때문에 이런 결과가 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국 신노동당식의 대처, 즉 공교육 체계로 ‘능력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고 김소장은 주장한다. 오히려 한국사회의 이 같은 특혜 구조를 개혁하지 않고 ‘능력의 격차’를 줄이면, 예컨대 공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는 ‘능력 있는 자’들만 늘릴 뿐이라는 것이다.

 

ⓒ사진공동취재단진보세력은 참여정부를 ‘사이비 진보, 신자유주의 정부’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참여정부보다 우월한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쯤에서 김대호 소장은 진보세력에게 비판의 창을 겨눈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전체 노동자 중 10%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10%는 대체로 대기업과 공공 부문에 몰려 있다.

“(그동안 한국의 노동운동은) ‘단결하면 힘 생기고, 투쟁하면 쟁취한다’는 정신으로 (자기 기업 노동자만의)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전투적으로 추구해왔고, 그 결과 임금과 고용 안정성을 대폭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자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다’는 ‘약자 의식’에 물들어 자신들이 공동체 전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자본의 처지와 동학에 대한 이해도도 낮다. 결과적으로 대기업과 공공 부문의 노동시장엔 높은 진입장벽이 세워졌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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