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도 아프간 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힘을 얻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병사 6명이 한꺼번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바로 철군 여론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지난 9월17일 아프간 수도 카불의 미국 대사관에서 1.5㎞ 떨어진 공항로에서 나토 국제안보지원군(ISAF)을 겨냥한 폭탄 테러로 이탈리아 병사 6명과 민간인 1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은 철군 여론에 불을 붙였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우리 모두 (아프간에서) 즉각 철수가 최선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자국 병사의 잇따른 희생에 독일·영국 등 다른 유럽 국가도 아프간 주둔을 염려한 적이 있지만, 이처럼 강하고 분명하게 ‘철수’를 밝힌 것은 유럽에서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처음이다. 현재 아프간에 주둔하는 이탈리아군은 3100명가량이며 전사자를 21명 냈다. 이런 가운데 이탈리아군이 6명이나 사망하자 유럽 내에서 아프간 파병 회의론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다. 파병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겪는 미국 처지에서는 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다른 유럽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1400여 명을 파병한 네덜란드에서도 철군 여론이 거세다. 지난 9월6일과 7일 기자들 앞에서 아프간 전사자 발생 사실을 발표해야 했던 페터 반 윔 네덜란드 합참의장은 “이틀 연속으로 전사자가 발생해 어제 봤던 기자를 오늘 또 봐야 하는 것이 힘들군요”라며 곤혹스러워했다. 네덜란드군이 주둔하는 아프간 우루즈간 주 홀란드 기지 병사들이 탈레반의 로켓 공격을 받아 부상하자 자국 여론이 악화되었다.

내년 말 우루즈간 지역 나토군 작전권을 이양하기로 돼 있는 네덜란드는 병력을 계속 주둔시킬지 여부를 내년 상반기에 결정해야 하는데, 전사자가 속출해 여론이 더 악화하면 철군할 가능성이 크다. 내년 말까지 우루즈간 지역에서 작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할 때도 의회로부터 가까스로 승인을 얻어냈기에 여론이 더 나빠지면 철군은 피할 수 없다. 현지 언론은 상황이 지금과 같거나 더 나빠지면 네덜란드 정부가 2011년부터 최소한의 병력만 유지하는 결정을 할 것이 유력하다고 전했다.

이렇듯 아프간 전쟁에 참전한 나라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아프간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아프간 정부는 부패에 젖어 있으며 한 가닥 희망이었던 아프간 대선은 부정선거로 끝났다. 자국 병사 사망률이 높아져 정권에 심각한 영향도 준다.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세계 경제위기로 천문학적 규모의 아프간 전비를 더 이상 지출하기가 힘들어진 것도 큰 이유이다. 그래서 아프간 정책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 사이에, 또 나토 연합군 내부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 미국이 아프간 증파를 추진하는 데 반해, 자국 사상자 증가와 국내 여론 악화로 고민해온 유럽 정상들은 아프간에서 서둘러 발을 빼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에 따르면 노동당 소속 에릭 조이스 의원은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영국군만 싸우고 독일은 돈을 대고 프랑스는 계산만 하고 이탈리아는 회피하고 있다”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게다가 9월4일 아프간 북부 쿤두즈 주에서 독일군 공습으로 민간인이 40여 명 사망한 사건은 미국과 독일로 하여금 대립각을 세우게 했고, 연합군 내에서도 부담이 일부 국가에만 집중되는 데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특히 탈레반 영향권인 남부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다른 나라가 뒷짐 지고 있는 사이 자국 피해만 늘어간다는 비판이 거세다.

동맹국들의 이런 분위기가 결코 미국에게 이로울 리 없다. 매크리스털 장군의 4만명 추가 증파 요청으로 미국은 더욱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데다 동맹국들이 각자 몇 명이라도 더 채워주었으면 좋겠건만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로 간다. 아프간에서 미군  희생자가 증가하면서 미국 내 여론도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의료보험법 등 국내 보·혁 논쟁이 가속화하면서 오바마 대통령 지지율도 추락했다. 오바마 처지에서는 아프간에 올인하는 상황에서 쉽게 손을 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병력을 증파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 상태이다. 미국인 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하고 있으며 미국 중간선거도 내년으로 다가왔다. 아프간이 오바마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반기문 총장과 유엔의 선택은?

미국이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유럽 정상들은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아프간 대선 여파 등을 논의할 국제회의를 연내에 열 것을 요청했다. 복잡한 아프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기고 싶은 것이 동맹국의 속내이다. 반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는 “아프간 군대와 경찰의 훈련을 강화하고 규모를 늘려 독자적인 자위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작전 지휘권을 아프간 정부에 이양하는 문제 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 아프간에서 동맹국의 철군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동맹국들은 이같은 의제로 올해 안에 국제 회의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9월7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브라운 영국 총리는 독일 베를린에서 회동한 후 이같이 발표했으며 메르켈 총리는 “아프간 정부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회의의 목적이다. 유엔과 나토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각 동맹국이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테러와의 전쟁에서 굴복하는 형태가 아닌, 좀 더 정치적으로 발을 빼는 묘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로 그들이 선택한 것이 유엔이다. 하지만 반 총장과 유엔이 병력을 빼내려는 동맹국과 병력을 더 보내야 하는 미국이 모두 만족할 만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아프간 전쟁 8년은 미국에게 이렇듯 힘든 과제를 안기고 있으며 동맹국에게도 아픔과 고민을 남기고 있다.

기자명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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