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순서
'2009 시민으로 산다는 것'- 이해찬(전 국무총리)
'2009 정치인으로 산다는 것'- 이정희(민주노동당 의원)
'2009 언론인으로 산다는 것'- 노종면(YTN노조위원장)
'2009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진중권(자유기고가)
⑤'2009 기업인으로 산다는 것'- 안철수(KAIST석좌교수)
⑥'2009 법학자 산다는 것'- 조국(서울대교수)


ⓒ전문수
강연이 끝난 뒤 청중석에서는 질문 기회를 잡으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정권 차원의 탄압을 받는다고) 주위에서 여러분들이 많이 걱정해주시는데, 거기에 비하면 너무 잘 살고 있어서 죄송하다. 제주도에서 막 놀다 돌아와 보니 몇몇 분이 저를 위해 성명을 발표해주셔서 죄책감에 시달리고(웃음). 어쨌든 나는 이런 공격이 저 사람들의 강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진중권 같은 ‘날라리’가 하는 말 몇 마디 못 참아서 저러나 싶은, 자신들의 불안감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인이라고 하면 민중을 대신해서 발언하는 영웅의 상이 우리 관념에 남아 있다. 하지만 지식인이 영웅이 되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아주 급격한 변화다.

대중의 학력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지금 고졸자의 87%가 대학에 간다. 게다가 이들이 어떤 대중이냐 하면 인터넷, 디지털, 첨단 테크놀로지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된 대중이다. 그에 반해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사람의 도구는 아직도 노트와 펜. 기껏 컴퓨터로 뭘 한다는 게 워드프로세서 정도다. 진화도 좀 덜 됐다(웃음).

지식인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근원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경제체제가 달라졌다. 우리 사회가 이제 정보 생산, 콘텐츠 같은 것이 실제 상품이 가진 물질적 측면보다 중요한 시대로 넘어왔다. 서구에서는 그런 전환이 1960년대 말부터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산업사회 때 형성됐던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했다. 과거의 지식인에 기대되던 역할도 따라서 필요 없게 돼버린 상황이다. 대표적인 예가 마르크스주의다.

두 번째로 텍스트 문화의 종언을 들 수 있다. 이미 서구에서는 1950년대부터 정보가 글이 아닌 소리와 그림으로 전달됐다. 텔레비전이 대표주자다. 지식인이 민중과 자신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결국 텍스트를 읽는다는 거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중은 더 이상 정보를 텍스트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운드와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지식인이 밀려날 수밖에 없다.

미디어철학자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라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다. “전통적인 인문학은 중세의 수도원과 비슷해질 것이다.” 중세에 수도승이 라틴어로만 말하지 않나. 자기들만의 신학적 주제를, 민중과 아무 관계없는 언어로. 우리도 인문학 한다는 집단을 보면 수도원과 비슷하다. 현실은 타락하고 그들은 순수한 인문학이고, 자기들끼리만 통하고, 정작 그들이 뭘 하는지 대중은 모르고(웃음).

게다가 지식 자체가 계속 세속화·도구화했다. 전통적인 비판적 이성보다는 도구적 이성을 더 중요시한다. 비판적 이성이 목적 설정 자체에 대한 성찰인 반면, 도구적 이성이란, 목적은 누군가 정해놨고 그걸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느냐 하는 노하우에 관한 거다. 극단적인 예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에 선 나치의 한 과학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유대인의 시체를 소각하는 효율적이고 위생적인 장치를 발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전범재판에서 자기의 ‘공헌’을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해달라고 했다. 목적 설정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 정치인이 하는 거고, 자기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최적의 솔루션을 찾았다는 주장이다. 비판적 이성이 아닌 도구적 이성만 남은, 파시스트 괴물이 돼버린 거다. 지금 우리 사회도 비판적 이성이 사라지고 도구적 이성만 남은 상황이 되다보니 지식인이 할 일이 없어졌다. 오늘날 대학의 대표적 풍경은 산학협동, 즉 기업과 학교가 결합하는 거다. 대학이 기업 맞춤형 인재 납품업체가 됐다.

그 다음, 또 하나의 변화를 들자면 ‘세계 자체’가 달라졌다. 옛날엔 세계가 주어진 것이었는데, 요즘 세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 2005년 황우석 사태 때 내가 놀랐던 건 대중의 태도였다. 황우석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함께 밀어주면 훌륭한 과학자가 된다는 거였다. 그 사람의 객관적 속성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변한다는 건데, 아찔하더라. 이렇다보니까 지식인이 귀찮은 존재가 된다. 지식인은 항상 해석하고 비판만 하니까. 중요한 건 해석이 아니라 세계를 만드는 것이란 얘기다. 그때 너는 뭐했느냐는 거지. 그러다보니 또 한 번 지식인은 할 일이 없어졌다.

나 같은 경우는 좀 다르다. 나는 본래 의미의 지식인보다는 일종의 아이돌로 소비된다. 대중문화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들어왔다. 옛날 지식인처럼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는 사람’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귀염둥이’다(웃음). 자기 대신 게임을 해서 그를 위해 싸우는 ‘캐릭터’가 된 거다. 내가 ‘진화한 먹물’인 셈이다. 독백형·지사형·선지자형의 전통 먹물은 씨도 안 먹히고, 지금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을 보면 철저하게 대화 구조로 풀어낸다. 저도 별명이 '횽아'다. 대중이 "중권 횽아를 괴롭히지 마라" 해버린다(웃음).

세계를 해석하지 말고 세계를 만들어야

ⓒ전문수
강의를 나가던 대학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줄줄이 계약해지를 당했지만 진중권씨의 입담은 여전히 유쾌했다.

인문학도 그렇고 사회학도 그렇고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패러다임이 뭐냐. 해석학 아닌가. 세계는 이런 거야 저런 거야 등등.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인문사회학이 해석학이 아니라 세계의 ‘제작학’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도승이 된다. 지금은 옛날처럼 ‘이미 있는 세계’를 바꾸는 게 아니라 ‘아직 없는 세계’를 상상해서 현실로 만드는 시대다. 세계가 그렇게 달라졌다.

그럼 바람직한 미래형 인간상은 뭐냐. ‘프로젝트’란 얘기를 한다. ‘서브젝트(주체)’가 아니다. 서브젝트는 객체에 매인다는 뜻이 있잖나. 미래형 인간상은 창조하는 사람이다. 인문학이나 사회학도 프로젝트가 돼야 한다. ‘없는 세계’를 꿈꾸고 실현할 수 있는 제작학으로서.

마지막으로 MB 시대에 대해 얘기하자. 도대체 MB라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가 있었나. 중요한 건 프로젝트다. 대중은 그걸 원한다. 주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즉 세계를 어떻게 만들지 상을 던지는 걸 좋아한다. MB가 던진 747, 한반도 대운하 이런 것들, 사실 앞으로 던지는 게 아니라 뒤로 던진 거지만. 왜 대통령이 됐냐? 앞으로든 뒤든, 어쨌거나 뭘 던진 놈은 됐다는 거다(웃음). 결국 이게 문제다. 민주당은 뭐하고 있었냐는 거다.

2007년의 대중은 10년간 이미 어느 정도 충족된 민주·통일 같은 걸 원한 게 아니다. 여러분은 배부른데 밥 더 먹고 싶은가? 

그러는 사이에 빈부격차는 늘어났다. 또 고용 안정성이 떨어졌다. 우리나라가 사회복지 시스템이 없어도 그걸 대신해줬던 게 암묵적 평생고용 약속이었는데 그게 1990년대 들어서 다 깨졌다. 사람들이 뭔가 해결책을 바라긴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는 모르고 막연하게 좋았던 과거 생각만 한다. 펑펑 돌아가던 박정희 때 시절, 그때는 일자리라도 많았지 하는 복고적 취향이 MB노믹스고, 이게 먹혔다.

재미있는 건 지금 우리가 보수 싱크탱크의 수준을 봤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머릿속에 든 게 없다(웃음). 하다못해 YS도 시대정신을 읽었다. 하나회를 해체해 쿠데타를 불가능하게 했고, 금융실명제 해서 공직자 비리를 드러나게 했다. 근데 MB는 뭐하는 거지? 다시 삽질로 돌아간다. 지금 겨우 ‘경기’ 살리는 걸 ‘경제’ 살린다고 생각한다. 시장 가서 어묵 먹고, 떡볶이 먹고. 그게 서민 행보라는 건데, 그런 식의 서민 행보는 우리 동네 초등학생이 더 잘한다(웃음).

하지만 비판만 해서 될 게 아니다. 재·보선이 어떻고 선거연대가 어떻고 하는 얘기도, 지금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삶의 질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며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싱크탱크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그 밖에 시민단체가 있고 굉장히 많은 전문가가 있다. 이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대충 해서 선거공약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면 흔쾌히 동의할 수 있고, 또 보수가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그들도 대강은 받아들여서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프로젝트를 만드는 게 가장 시급한 과제다. 그 다음에 그걸 대중적으로 요약해서 제시해야 한다. 우선 콘텐츠만 만들면 대중의 자발성과 결합해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옛날식 지식인은 필요 없다.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작업, 사회적 합의를 구하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권에서도 좀 심각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당마다 몇 명 놓고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되지 않는다. 일단 연구하려면 돈이 든다. 최우선으로 그것부터 해서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대안을 프로그래밍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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