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 ‘작은 선거’란 없다. 10월28일 치러지는 재·보선에서는 전체 국회의원 의석수의 2%에도 못 미치는 다섯 석을 뽑지만 이 선거에 정치권 전체의 촉각이 곤두섰다. 단순히 의석 수가 변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 시점의 민심을 가장 정확히 알려주는 풍향계가 선거인 까닭이다. 마침 지역분포도 고르다. 수도권 두 곳(경기 수원 장안, 안산 상록을), 충청권 한 곳(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 영남권 한 곳(경남 양산), 강원권 한 곳(강원 강릉)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지난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도 재·보선에서 전패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지난 4월 재선거에서 역시 ‘0대5’로 참패한 한나라당은 쇄신론과 조기 전당대회 주장이 터져 나오며 박희태 체제가 좌초 일보직전까지 갔다. 민심이반이 단순한 여론조사가 아닌 표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손학규·김근태(왼쪽부터) 등 거물을 출마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10월 재·보선이 예고하는 충격파도 그 못지않다. 다만 공수는 4월 재·보선 때와 뒤바뀐 모양새다. 6개월 전 전패 악몽에 시달리던 한나라당 친이계는 “최소 2승을 확보했다”라며 표정관리에 들어갔고, 박근혜 전 대표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친박계는 “이번엔 우리 선거가 아니다”라며 선을 긋는다. 수도권 승리로 기세를 올렸던 민주당은 만만치 않은 판세에 목이 탄다.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한 석을 만들어냈던 두 진보 정당은 제자리걸음이다. 크게 보아 한나라당이 양산과 강릉에서, 민주당이 증평·진천·괴산·음성에서 우세를 확보한 가운데, 수도권 두 곳이 승패를 가르는 형국이다.

‘한 선거가 끝나는 날부터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정치권의 속성대로 여야는 이미 여름부터 10월 재·보선의 밑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선거를 보름여 남겨둔 현재, 최초 설계도와 비슷하게라도 판을 짜낸 정파가 드물다. 중앙당의 의지와 현장의 의지가 충돌하고 ‘징발령’을 내려도 거물들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밑그림이 꼬였다.

표정 관리하는 친이계 :  “전패 악몽은 끝났다. 최소 2승은 확보했다.” 여권 주류의 ‘대외용’ 판단이다. 박희태 전 대표가 나선 경남 양산에서는 박 전 대표가 강력한 경쟁자인 김양수 전 의원(무소속)을 제칠 것이라고 낙관한다. 여권 성향이 강한 지역인 강원 강릉에서는, 친박계의 심재엽 전 의원과 지역 연고가 두터운 최돈웅 전 의원이 잇따라 선거를 포기하면서 변수가 사라졌다는 분위기다.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가 힘을 실어줬지만, 심재엽 전 의원(왼쪽)은 출마를 포기했다.
내심으로는 4승까지 바라본다. 민주당 세가 강한 충북을 제외하고도, 수도권 두 곳까지 이길 수 있다는 속내다. 대통령 지지도가 상승 추세로 반전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한나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4승 얘기를 먼저 했다가 실패하는 것보다야, 2승만 말해놓고 초과 달성하는 게 더 낫지 않겠나”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양산에 출마한 박희태 전 대표가 사퇴하면서 대표직을 승계한 정몽준 대표는 일단 시간을 벌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때 기정사실처럼 이야기됐던 ‘내년 2월 조기 전당대회’ 이야기가 쑥 들어가면서 7월까지로 정해진 임기를 채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졌다. 이 역시 10월 재·보선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까닭이다. 여권에서는 수도권에서 한 석만 건져도 3대2로 ‘우세승’을 거둘 수 있다고 본다. 4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과다.

‘압력’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정계 복귀를 위해 줄기차게 조기 전당대회를 주장했던 친이재오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전 최고위원의 지역구인 서울 은평을 재선거가 10월에 열리지 않게 된 데다, 이 전 최고위원이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되면서 ‘우회로’를 확보했다. 이재오계로 분류되는 한 수도권 의원은 “국민권익위원장을 하면서 내년 은평을 선거를 준비하라는 게 청와대 뜻일 텐데, 2월에 조기 전당대회가 열리면 일정이 꼬이는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10월 재·보선에서 체면치레할 성적만 거둔다면, 정몽준 체제의 수명은 예상보다 길어질 전망이다.

부담스러운 구석은 있다. 한나라당은 이번 공천 과정에서 내부 교통정리에 실패했다. 중앙당의 공천에 현장 기반이 있는 인물들이 반발하는 그림이 경남 양산과 경기 안산 상록을에서 나왔다. 양산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김양수 전 의원은 국회의장 비서실장 자리를 내던지고 출마할 만큼 의지가 강한 데다 만만찮은 지역 기반을 가졌다. 안산 상록을에서는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았던 이진동 전 당협위원장이 공천에 반발하고 있다. 공천을 받은 송진섭 후보의 뇌물 비리 의혹까지 거론하는 등 쉽사리 물러설 태세가 아니다.

‘단일화’가 야권의 지상 명령이지만 쉽지는 않다. 위는 민주대연합을 위한 지도자 연석회의.

선 긋는 친박계 :
수는 같았다. 그런데 결과가 다르다. 선거전이 본격 개막되기 전인 8월11일 박근혜 전 대표는 강릉 출마를 선언한 심재엽 전 의원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찾았다. 박 전 대표는 심 전 의원과 “아주 각별한 사이”라고까지 말하며 힘을 실어줬다. 지난 4월 경주 재선거에서 정수성 후보에게 했던 그대로다. 덩달아 ‘빅딜’ 이야기도 나왔다. 양산에 출마하려던 박희태 대표를 친박계가 나서서 지원하고 수도권 공천에서 친이계의 지분을 인정하는 대신, 친박계가 강릉 공천을 받는다는 시나리오였다. 8월까지만 해도 친박계 의원들이 부인하지 않던 그림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얘기가 달라졌다. 심 전 의원의 경쟁력이 기대 이하였다. 양산에 출마한 친박계 유재명 후보의 지지율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빅딜을 하려 해도 친박계가 얻을 게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경북 경주에서 선거사무소 방문 한 번으로 정수성 후보를 당선시켰던 ‘박근혜의 힘’이, 강원도는 물론 경남만 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박 전 대표가 ‘선거의 여왕’이라고는 하지만, 2006년 지자체선거 때는 얼굴에 진짜 칼을 맞았고 지난해 18대 총선 때는 공천으로 등에 칼을 맞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피해자 정체성’을 가질 때 박근혜의 힘은 극대화된다. 그게 없는 선거에서는 현실적으로 경북의 맹주가 박 전 대표의 포지션이다. 올해 두 차례 재·보선에서, 특히 경주와 강릉의 결과가 판이한 데서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한나라당의 중립 성향 수도권 의원의 분석이다.

이런 분석에 친박계는 물론 고개를 젓는다. 박 전 대표의 강릉 방문은 개인적 인연 때문일 뿐 심 전 의원이 친박계 후보는 아니었다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지난 4월 경주 재선거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박 전 대표나 친박계나 ‘개인적 인연’을 강조했을 뿐이었지만, 그때는 선거를 이겼다.

‘박근혜의 힘’을 전제로 한 ‘빅딜 구상’은 선거가 가까워오면서 성립하지 않는 그림으로 판명됐다. 친박계가 10월 재·보선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달리 움직일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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