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단편집 〈어떤 전설〉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황토〉 〈한, 그 그늘의 자리〉, 중편집 〈유형의 땅〉, 장편소설 〈대장경〉 〈불놀이〉 〈인간 연습〉 〈사람의 탈〉,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출간했다. 또한 산문집과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 시리즈를 펴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동리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어김없었다. 지난 9월2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앞 카페. 조정래씨(66)는 오후 2시55분에 나타났다. 정확히 5분 전. ‘5분 전’은 그의 평생 습관이다. 50년 전, 새벽마다 물지게를 지고 성북동 비탈길을 오르내리던 고교생 조정래는 작지만 큰 깨달음을 얻었다. 공동수돗가에 5분 먼저 가면 한 시간을 벌고, 5분 늦으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부터 5분 먼저 움직였다. ‘조정래의 문학산맥’을 쌓아올린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5분 먼저 움직여라’였다.

조정래씨가 현대사 3부작(〈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황홀한 글감옥〉은 한 권짜리 단행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몇 권의 책이 들어 있다.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현대사 3부작에 얽힌 비화와 제작 노트가 첫 번째 책이다. 40년 글쓰기 체험을 바탕으로 풀어놓은 문학론과 창작실기론이 또 다른 책이다. 작가가 “내 인생을 정리한 유서로 봐도 좋다”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정돈하는 진솔한 고백과 젊은이에 대한 당부는 ‘책 속의 책’이다. 또한 현대사 3부작을 읽은 독자에게 이 책은 소설을 다시, 아니 새롭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제공한다.

자신의 저서 목록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이번 자전 에세이를 세상에 내놓는 소감을 묻자, 그는 “오랫동안 지고 있던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다. 이런 성격의 책은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는 조정래씨의 특별기고 ‘소년 빨치산 박현채’(〈시사IN〉 제105호)와 ‘국가보안법 망령에 시달린 11년’(제106호)에 이어지는 지면이다.

1인칭 고백체, 대학생 집단과의 대화 등 이번 책은 작가 조정래에게는 여러 가지로 새로운 시도다. 지금까지 책을 한 권밖에 내지 않은 그야말로 신생 출판사인 ‘시사IN북’에서 책을 낸 것도 이채롭다.
머리말에도 밝혔지만 오래전부터 이런 형식의 책을 내자고 요청한 출판사가 많았다. 하지만 소설 쓰느라 바빠서 미뤄왔다. 마침 내가 작가 생활 40년인 데다, 〈시사IN〉에서 출판사를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 싶었다. 나는 한국의 1980년대가 이룩한 기적이 다섯 가지라고 생각한다. 노동 조직의 대중화, 통일 운동의 대중화, 군부독재 타도, 전교조 탄생,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탄생이다. 한겨레신문은 세계 언론 사상 국민 모금으로 탄생한 최초의 언론이다. 그런데 시대가 보수화하면서 언론도 보수화하고 말았다. 지난해 〈시사IN〉이 창간될 때, 기득권에 편승하지 않고 ‘참언론’이라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 기자들이 정말 믿음직스러웠고 작가로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들이 출판사를 차렸다기에 지난 7~8월 두 달 동안 그 더위를 무릅쓰고 또 ‘글감옥’에 들어갔다.

조정래씨(위)는 〈황홀한 글감옥〉을 펴낸 소감을 묻자 “오랫동안 지고 있던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다. 이런 성격의 책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라고 말했다.

미디어법이 통과되었다. 최근 언론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아쉽고 서운하다. 작가의 존재 이유는 예술성을 전제로 한 ‘인간 긍정을 위한 부정’이다. 비판정신과 예술성의 결합인데, 예술성 속에 비판정신이 감춰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언론은 비판정신이 없으면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한국 언론은 지나치게 보수화하고 있다. 미디어법이 헌법재판소에 올라가 있는데, 나는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통과의 불법성을 심판하리라고 믿는다.

이번 〈황홀한 글감옥〉에는 여러 권의 책이 들어 있다. 작가 스스로는 이 책의 성격과 의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먼저, 문학을 평생 직업으로 삼으려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는 지나친 물신사회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환기하는 구실을 하리라고 본다. 젊은이들에게는 무엇이 제대로 된 인생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만일 지금 내가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이번 글이 내 인생을 정리한 유서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글은 쓰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내 아들에게도 못한 얘기를 이번에 다 썼다. 이번 글은 내 유언과 마찬가지다.

인터넷을 통해 언론인을 꿈꾸는 대학생들로부터 다양한 질문을 받았다. 대학생 집단과 ‘대화’를 나눈 셈인데.
작가와 작품에 대해 던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문이 망라되었다. 소설을 통해 역사와 시대를 알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욕구가 진지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썼다. 젊은이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건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괄호를 자주 사용하거나 갑자기 퀴즈를 내는 등 젊은이들과 대화하기 위해 배려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방송에 비유하자면 ‘애드리브’가 종종 있다. 
작가로서 오만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없애고, 또 진실성과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괄호를 사용했다. 퀴즈를 낸 것은 독자의 참여, 독자들과의 쌍방향 교감을 의도한 것이다.

ⓒ한향란
조정래씨는 “기득권에 편승하지 않고 ‘참언론’이라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 〈시사IN〉 기자들을 작가로서 도와주고 싶어 ‘시사IN북’에서 〈황홀한 글감옥〉을 펴냈다”라고 말했다. 위는 2007년 8월11일 열린 〈시사IN〉 창간 선포식.

야뇨증이 심하던 어린 시절, 엄격한 아버지와의 관계, ‘소년 빨치산’ 박현채 선생의 격려와 도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두 번의 도움’, 소설가 최일남씨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욕먹을 각오를 하고 밝힌’ 박태준 회장의 기부 사실 등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비화가 많이 나온다.
이번 책에 실린 내용은 거의가 처음 밝히는 것이다. 이어령 전 장관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그때 받았던 도움에 대해 고맙다고 밝힌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말씀도 못 드리고 책만 꼬박꼬박 보내드렸다. 이어령 선생 같은 분이 보수주의를 한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태백산맥〉의 독자들이 이번 자전 에세이를 읽으면 보물찾기나 퍼즐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태백산맥〉에는 작가 조정래의 분신이 들어 있는데, 지금까지 그걸 찾아낸 독자가 몇 안 된다. 내가 미국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번 에세이를 보면 좀 더 확연히 알게 될 것이다. 지난 20년간 강연을 수없이 해왔는데, 시간 제약이 있어서 한 번 강연할 때 받을 수 있는 질문이 2~3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에 대학생들에게 질문을 84개 받고 성실하게 답했다. 이 책은 앞으로 조정래의 소설을 연구하는 학생이나 학자에게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박정희 재평가는 여전히 예민한 문제이다. 유신독재에 반대했던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젊은이들도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생태·환경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식 개발과 성장의 그늘이 너무 크다. 압축 성장의 폐해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맞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 경제 성장 방법론은 수십 가지가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학자들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평가도 중요하고, 또 그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 지금 일어나는 박정희 평가가 첫 번째 평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박정희는 얼마 전까지 ‘지하 2층’에 묻혀 있었다. 외환위기 시기가 그를 ‘지하 1층’으로 끌어올렸고, 김대중 정부 시절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왔다. 대중이 역사를 평가하는 데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의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나는 작가로서 박정희의 공과를 정리한 것인데, 내가 다 옳지는 않을 것이다. 유신 피해자의 처지에서만 보는 것도 반쪽이다. 나는 작가로서 객관적 시각으로 역사의 균형을 잡아주고 싶은 것이다.

민족주의 또한 민감한 주제이다. 이번 책에 나오는 것처럼 분단국·약소국에게는 민족주의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배타적 우월주의가 내면화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드러나지 않는가.
내가 책에서 분명히 지적했듯이 내가 말하는 민족주의는 건설적·공생적·저항적·방어적 민족주의이다. 제국주의적인 민족주의가 내면화하고 있다는 지적은 옳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여본 경험이 없다. 첫 경험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빨리 우리 자신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 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썼고, 많은 지식인이 칼럼 등을 통해 우리와 다른 문화를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민족주의가 병적인 경향을 띠는 이유는 광복 이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전 국민에게 ‘은근과 끈기’ 같은 새로운 이념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주의가 오래된 것 같지만 50~60년밖에 되지 않았다. 분단 상황에서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경제가 다국적화하는 시대에 외국인을 포용하는 사회적 반성과 훈련을 병행하면서, 우리 민족주의는 100년, 200년 된 강대국 민족주의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이 시대 지식인의 책무이다.

현대사 3부작을 관통하는 세 가지 메시지가 민중성의 발견, 통일에 대한 자각, 그리고 친일파 문제라고 밝혔다. 현대사 3부작이 완간된 이 시점에서도 이 세 주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요즘 젊은 작가들은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쓸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남과 북이 통일되지 않는 한 그 세 가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잠복하거나 돌출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젊은 작가들이 역사 체험이나 사회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도 하고, 또 우리 것이 아닌, 불필요한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것에 경도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젊었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후 세계문학에 영향을 받은 감각적 문학, 실존주의 문학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를 먼저 생각하는 문학이 새로운 것으로 인정받았다. 1970년대 초반, 한 문예지에서 ‘이광수문학상’을 만들겠다며 당시 젊은 작가 7~8명을 한자리에 부른 적이 있다. 나도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나만 빼고 나머지가 모두 이광수문학상 제정을 찬성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젊은 작가들이 ‘조정래는 촌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나를 비난했던 소설가들은 지금 흔적도 없다. 우리 때에도 근본·본질을 따지면 촌스럽다는 소리를 들었고, 순수문학을 하지 않으면 등단하기조차 어려웠다.

〈태백산맥〉 독자들은 조정래씨의 이번 자전 에세이를 읽으며 보물찾기나 퍼즐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위는 ‘태백산맥 문학관’ 모습.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커다란 비극이다. 정권은 누가 맡든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잘하려고 하다가 시행착오를 겪었다. 국민의 이름으로 뽑은 대통령은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퇴임 후에 나라를 위해 충고하며 자연수명을 다 하는 것이 정상이다. 노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투신하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의 천박한 모습을 확인시켰다. 검찰이 이미 ‘포괄적 뇌물죄’라고 규정한 상태에서 노 대통령은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변명이 되는 상황이었다. 죽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진실한 자, 가장 용기 있는 자, 가장 남자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6월, 시국선언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사회 원로로서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으로 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특히 경직된 남북관계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칼럼을 쓸 때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혀왔다. 북한은 핵을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남한은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국제사회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과 북한은 서로 신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신뢰가 원자폭탄 100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명박 정부가 이번에 뒤늦게 위와 같은 내용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 길로 나아가면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 이전 정권의 착오와 오류가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다. 박정희의 잘못이 김대중과 김영삼을 살렸고, 부시의 잘못이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명박 대통령 도 노무현 정권의 잘못이 만들어낸 것이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 정권이 잘못한다면 다음 정권이 바로잡을 것이다.

조정래씨는 환경소설도 한 편 쓸 계획이다. 위는 지난 3월 열린 〈태백산맥〉 200쇄 출간 기념식.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한숨을 길게 쉰 다음) 참 안타까운 일이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과 4대강 사업은 분명히 다르다. 고속도로는 산업의 필요에 의해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강은 탄생할 때부터 자연의 몸이다. 인간이 손을 대면 망가지게 되어있다. 분명 모든 개발은 자연을 망치는 것이다. 강이 범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데, 범람한다면 강 가까이에 살지 않으면 된다. 강을 막고 강바닥을 파내는 것은 인간으로 비유하면 혈관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심히 우려된다. 예산도 너무 많이 책정되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민운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시민운동 단체가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이 잘못이다. 1980년대 민주화 세력이 시민운동으로 옮아간 것은 건설적 변신이었다. 시민운동은 국민이 회원이 되어 십시일반으로 도와야 한다. 그래야 정치·경제 등 모든 부문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정부 지원을 받으면 안 된다. 정부 지원을 받는데 어떻게 정부를 향해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지원해주면서 시민단체를 이용하려고 한다. 내가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작가들이 당당한 것은, 내가 책에도 썼듯이 정부 지원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이 위축된 책임은 현 정권보다는 우리 시민 모두에게 있다. 시민단체가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할 때 정치권과 경제 세력이 얼마나 횡포를 부리는지 우리 모두 자각하고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럴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뒤에서 불평할 게 아니라 시민단체를 위해 1000원, 2000원씩 내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너무 단순하고 순진했다. 혁명만 피를 먹고 자라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다. 나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작가로서, 또 시민으로서 시민단체를 후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어깨가 축 처져 있다.
청년실업은 전 사회적 문제다. 그런데 청년실업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된다는 것은 우리 인권이 그만큼 신장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50년 전에는 아무도 실업 문제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개인 문제였다. 요즘 젊은이는 일의 귀천은 약간 있겠지만 아르바이트로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 수 있다. 우리 경제는 이전보다 두꺼워졌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대처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동등하지만, 능력은 서로 다르다. 물론 상대적 박탈감은 자본주의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이다. 빈부 격차, 양극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강한 비판은 우리 사회의 건강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인권의 평등과 능력의 평등을 혼동하지 말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체계적으로 경영해나가야 한다. 나는 젊었을 때 부자들이 피우는 비싼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나의 경제 형편에 맞추면서 참고 견디되, 목표를 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것을 국가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해 보인다.

어릴 때 꿈이었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부인 김초혜 선생께 사랑을 고백할 때 선물로 건넸던 링컨 초상화가 이번 책에 실렸다. 보통 솜씨가 넘어 보인다.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으신가. 
반 고흐의 그림을 볼 때마다 크게 감동을 받는다. 〈태백산맥〉을 쓰기 위해 지리산에 갔다가 천왕봉 바로 아래 장터목 산장에서 새벽 별을 본 적이 있다. 별이 그야말로 밤송이만 했다. 하지만 그 자연의 경이로움을 글로 쓰지 못했다. 글은 내 안에서 오래 곰삭아야 나온다. 삭히고 삭혀야 문장 한 줄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지리산에서 보았던 그 별을 반 고흐는 유화로 그려냈다. 앞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자연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나도 환경주의자다. 환경소설도 한 편 쓸 계획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 승려였던 아버지의 강권으로 ‘조계종 승적 168번 인천(麟天) 스님’이 될 뻔했다. ‘인천’은 그때 아버님께서 지어주신 호였는데, 왜 ‘인천’ 대신 ‘백산’이란 호를 쓰는지 궁금하다.
나중에 아버지가 호를 새로 지어주셨다. 아버지께서는 1988년, 〈태백산맥〉 3부를 마쳤을 때 돌아가셨다. 병상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다른 형제는 다 부르면서도 둘째 아들인 나는 부르지 않았다. 소설에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종을 못 지켰다. 아버지는 〈태백산맥〉을 3부까지 다 읽으셨다. 그리고 ‘백산(白山)’이란 호를 새로 지어주셨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아버지께서 조계종 승적표와 ‘인천’이란 법명을 보여주며 출가하라고 하셨을 때는 즉각 반발했다. 나는 문학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아들 키운 보람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기자명 이문재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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