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씨가 전두환 정권의 위세가 아직 시퍼렇던 1983년 험한 꼴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잡지에 〈태백산맥〉 연재를 시작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출판사는 쏟아지는 주문을 소화하지 못해 쩔쩔맸고, 독자는 ‘빨리 좀 쓰라’고 아우성이었다. 잎이 무성하면 그늘도 짙은 법. 작가는 독자로부터 숱한 찬사를 받았지만 그 못지않은 무게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공권력과 극우 반공 단체의 매질과 협박은 집요했다. 정보기관의 내사가 이어졌고, 급기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돼 2005년 무혐의 판정을 받을 때까지 11년을 시달려야 했다. 이는 사법사상 가장 길게 끈 고발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익 단체의 조직적이며 매우 ‘진지한’ 살해 위협이 계속되자 작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두 차례나 유서를 썼다. 작가는 곧 발간될  〈황홀한 글감옥〉에서 공권력과 극우 폭력의 실상을 자세히 밝혔는데 다음은 그 일부이다. 불행하게도 작가의 경험은 아직도 유익하다.
작가는 8만의 빨치산을 받아들였던 지리산 준령을 열 번도 넘게 넘나들어 빨치산을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1988년 노고단에서.


〈태백산맥〉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되었다가 11년 만에 무혐의 처분을 받으셨습니다. 그 전모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한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닐 것입니다.
- 김현지 (시드니 공과대학·저널리즘)

1994년으로 접어들면서 저는 〈아리랑〉 쓰기에 더욱 골몰해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8개의 반공 단체들이 저를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빨갱이로 고발한 것입니다. 그거야말로 날벼락이었습니다. 그 많은 수사기관들의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내사 종결로 다 끝난 문제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고발자들이 나타났으니 사건은 새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즉각적인 반응은 공갈 협박 전화로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기가 좀 수그러들었던 협박 전화는 새 기운을 얻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 〈아리랑〉 쓰기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습니다. 그 일을 당해내야 할 것이 까마득하고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그래, 다 팔자고 운명이다….’

저는 이를 맞물며 저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너무 힘겹고 외로웠습니다. 아내 몰래 한숨도 많이 쉬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아내가 문득 말했습니다.

“영욕(榮辱)은 반반이다.”

그것은 위로인 동시에 용기였습니다. 그동안 작품에서 얻은 영예를 혼자 누렸듯이 작품에서 오는 곤욕도 혼자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4월에 고발당하고 6월에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종철을 수사했던 속칭 남영동 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종철 사건 이후 그곳은 문화촌 구석으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무슨 회사 간판을 붙여놓고.
김영삼 정권으로 바뀌었기 때문인지 지하실로 끌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으쩌끄나 와! 개 패디끼 헌다든디.”

며칠 전에 여든다섯이 넘은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 말이었습니다.

“괜찮아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이 바뀌었고, 저 같은 사람은 못 때려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잘 해라 잉. 뻣대지 말고.”

어머니의 애타는 당부였습니다. ‘뻣대지 말고’ 하는 말에서 저는 콧날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작은아들의 빳빳한 성깔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중략)

그 고소 고발 사건은 수사기관과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파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태를 야기했습니다.

작가는 극우 단체의 전화 테러가 극성을 부린 1994년과 1996년 두 차례 유서(위)를 남겼다.
제가 고발당하는 것에 발을 맞추어 어느 종합 월간지는 ‘조정래는 역사 왜곡한 빨갱이’라는 식으로 대형 특집을 꾸몄습니다(불명예도 명예더라고, 독자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그 월간지에 지면 한 페이지를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어려운 형편에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특집감이 되었으니 그보다 더 큰 영광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지요).

지식인의 표변에 아연실색

인터뷰 형식의 그 특집 기사를 보고 저는 소스라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씩 눈을 질끈질끈 감았다 뜨며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제가 아는, 제가 믿었던, 저의 〈태백산맥〉을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한 글을 썼던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문학 평론가였고, 한 사람은 박사 과정에 있는 정치사회학 연구자였습니다. 그들은 기자의 질문에 전에 글을 썼던 것과는 정반대로 〈태백산맥〉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자의 추궁성 질문에 따라 〈태백산맥〉이 역사를 왜곡한 국면이 있고,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그 말은 고발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재판정에 증거로 내놓으면 제가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표변에 아연실색하여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특집은 그런 식으로 〈태백산맥〉과 저를 부정하고 매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좋습니다. 저 벌교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증언해주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늙은 촌사람들이 서울에서 내려간 신문사 소속의 잡지 기자 명함을 받고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지 눈에 환히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만나보아서 알지만, 이 아무개라는 그 젊은 기자는 촌로들 앞에서 또 얼마나 기세등등했겠습니까.

그런데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평소에 지식인이라고 으스대며 의식 있는 척하던 사람들이 촌로들과 전혀 다름이 없다니…. 지식인의 지성과 마음이 이리도 얄팍하고 가볍고 하잘것없는 것이라니…. 인간이 기회주의적 동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제가 그렇게 당하고 보니 참으로 기막히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조정래씨가 검찰로부터 무혐의 판정을 받기 전인 2004년 10월 국보법 폐지 반대 시위를 하는 보수 단체.
그러나 저를 궁지로 몬 것은 그들만이 아닙니다. 김 아무개 평론가는 ‘왜 우익은 다 나쁘고 좌익은 좋으냐’는 내용으로 긴 글을 썼고, 권 아무개 칼럼니스트는 그 부분을 인용해가며 ‘조정래를 빨리 잡아넣어라’는 내용의 칼럼을 썼습니다. 그리고 경찰 수사관은 평론가 12명이 〈태백산맥〉을 이적성이 있는 작품으로 평가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를 편들고 나선 무모한 평론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태백산맥 다시 읽기〉라는 평론집을 낸 것입니다. 권 교수는 평론집을 낸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분은 미국 버클리 대학에 교환 교수로 가 있었는데, 만약 제가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서면 변호를 하려고 귀국할 작정까지 하고 있었다는 말을 그 다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책을 낸 다음에 심한 곤욕을 치렀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를 수사한 수사대장이 권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대 교수 해먹고 싶으냐’는 둥 험한 협박을 몇 시간씩 한 것이었습니다. 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요.

그리고 또 한 분, 소설가 최일남 선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최 선생께서는 그 살벌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를 옹호하는 칼럼을 쓰셨습니다. 김중배 선생과 함께 우리 시대의 2대 칼럼니스트로 꼽히는 그분의 칼럼은 저에게 무한한 격려가 되었고, 새로운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젊은 후배들이 무정하게 등을 돌려버리는 상황 속에서 대선배께서는 궁지에 몰린 후배를 구하려고 세상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명 칼럼을 쓰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선생께도 곧바로 험한 일이 닥쳤습니다. 수사대에서는 신속 기민하게도 그분께 협박성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공권력이 하는 일이 이렇다니, 대한민국 참 사람 살 만한 좋은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신문사에서 고정적으로 쓰기로 되어 있던 최 선생의 칼럼을 더는 쓰지 못하게 해버린 것입니다. 수사대장의 힘은 이렇게도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아, 어쩌면 좋습니까. 그 원고료는 최 선생의 유일한 수입원이었습니다. 죄송하고 또 죄송해 저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죄스러움과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해보지 못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그런 속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얼마나 부족하고 마땅찮은 것인지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아리랑〉과 〈한강〉 때문에 외국 취재를 다닐 때 대사관이나 영사관 직원들이 노골적으로 저를 기피하는 것은 전혀 서운한 느낌 없이 그냥 웃어 넘겨버립니다. 공무원들의 제2의 DNA가 되어 있는 보신주의의 발로이니까요. 그러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의 이 아무개 여직원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후배 작가 정동주씨의 소개를 받아(아주 친절하게 잘해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찾아갔는데 어찌 그리도 냉정하고 불친절하던지요. 저는 그녀의 출세에 지장을 주는 병균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서둘러 돌아섰습니다. 그렇게 단호한 그녀는 계속 그렇게 나가면 결국 외무부 장관까지 해먹게 되리라 믿습니다. 부디 건승하시길.

외국 나갈 때마다 검찰에 사유서 제출

해가 바뀌었습니다. 〈태백산맥〉 사건을 경찰이 검찰로 넘겼다고 신문들이 보도했습니다. 그건 경찰이 강제 구인을 포기한 것이었고, 1차적인 저의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한시름 놓게 되었습니다. 다시 검찰의 조사가 시작되겠지만, 일단 경찰에서 한풀이 꺾였으니 검찰이라고 수사 신명이 날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고 불린 환란이 터지고,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그 격랑 속에서 검찰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던지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일이 닥치면 그때 대응하기로 하고 〈한강〉 준비에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외국 취재를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출국정지, 검찰이 저의 발목에 채워놓은 족쇄였습니다. 저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검찰청에 찾아가 담당 검사에게 사유서를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검사님네들은 어찌 그리도 나이가 젊은지요. 아닙니다. 다 늙은 나이에 새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는 제가 주책이었지요.

꼼꼼한 취재 수첩. 기록의 달인답게 조정래씨는 ‘대하 자료’를 제출해 검찰의 기를 꺾었다.
저를 그렇게 괴롭힘으로써 고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었습니다. 그 불편함과 괴로움은 매번 너무 짜증나고 혐오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고독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취재를 다 마치고 〈한강〉을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에 이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고발자들이 사건을 빨리 처리하라고 압력도 가하고 시비를 걸고 하니까 검찰에서는 계속 담당 검사를 바꾸며 자료 검토 중이라고 한다.’

그것 참 묘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발자들은 검찰의 처분만 바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판사에게 출판을 중단하라는 협박의 내용증명을 보내는가 하면, 〈태백산맥〉을 번역하고 있는 일본 출판사에까지 번역을 중단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태백산맥〉 100쇄 기념식장인 프라자호텔 정문 앞에서 태극마크가 찍힌 머리띠를 두르고 ‘김일성 앞잡이 조정래’라는 삐라를 뿌려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에서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던지 저에게 수사 날짜를 통고해왔습니다. 1998년이었습니다.

저는 〈한강〉 쓰기를 중단하고 그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을 쓰다가 딴 일로 소설을 중단하는 것처럼 짜증나고 기분 상하는 일은 없습니다. 작가들은 아마 다 똑같을 것입니다.

120여 가지에 대해 ‘객관적 자료’ 요구

역시 검찰은 경찰과 달랐습니다. 500개가 넘는 혐의 사실을 120여 개로 줄여놓은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은 빼버리고 간추린 것이었습니다. 경찰에서도 그랬더라면 제가 수사를 거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검찰은 그 120여 가지에 대해 ‘객관적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객관적 자료―그건 국가 기록물(국회 증언록이나 행정관청의 발간물), 그리고 국가가 납본필증을 내준 책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사실도, 제가 직접 취재한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한 가지라도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게 유죄 혐의가 될 수 있습니다.”

젊은 검사의 말이었습니다.

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겠습니다.”

저의 대답이었습니다.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겠습니다.”

저는 검사만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전과 동’의 응답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희 세대는 6·25를 모릅니다. 잘 생각하시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젊은 검사가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뜻을 금방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6·25를 모르니 심정적 이해란 있을 수 없고 객관적 자료대로만 판단할 뿐이니 정신 차리라는 뜻 정도로 파악했습니다.

〈태백산맥〉에 대한 검찰 내부의 의견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검사가 70%,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는 검사가 30%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검사는 어느 쪽일까?’

그 순간에 왜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전과 동’의 응답은 계속되었습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조사는 오후 5시에 끝났습니다. 저는 이튿날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대검찰청에 나갔습니다.

조사는 12시가 못 되어 다 끝났습니다. ‘전과 동’의 되풀이였으니 사흘 예정이던 조사가 절반으로 단축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객관적 자료 제출을 준비할 기간으로 일주일 여유를 요청했습니다.

“예, 열흘을 쓰셔도 좋습니다.”

검사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한강〉 쓰기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놈의 객관적 자료들을 찾아 이미 기억 저편으로 몰아내버린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설 쓸 때보다 더 말이 없어졌고, 아내는 없는 듯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그림자처럼 오갔습니다.

당황하고 놀란 젊은 검사

저는 객관적 자료들에 ‘포스트잇’이라는 색종이를 붙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포스트잇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신식 문구는 전에는 쓸 일이 없었으니까요.

매일 새벽 3~4시까지 계속된 자료 찾기는 예정대로 일주일 만에 끝났습니다. 책은 모두 17권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자기에 쌌습니다. 그 보퉁이를 들고 나서는 저의 모습은 국정감사장의 국회의원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그날 한국일보사 기자로 검사실 앞에까지 저와 동행한 유일한 사람은 오늘의 소설가 김훈씨였습니다. 저는 그 보퉁이를 검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니,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젊은 검사의 놀란 말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예,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다 표시해 왔습니다.”

저는 보자기를 풀어 포스트잇이 줄줄이 붙은 책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조사받은 혐의 사실들입니다. 여기에 책과 그 페이지들을 다 표시해놓았습니다.”

저는 목록을 정리한 A4 용지 묶음을 검사에게 내밀었습니다.

“아 예에….”

검사는 놀라고 당황한 기색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충대충 살피며 넘겨 갔습니다.

“조사받으실 때 하나도 메모를 안 하시던데 어떻게 이렇게 다….”

검사가 약간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야 뭐…, 빠진 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섰습니다.

아마 그 검사님은 제 소설을 한 편도 안 읽으신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태백산맥〉에서만 280여 명, 〈아리랑〉 〈한강〉까지 합하면 1200명이 넘는 인물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걸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검찰은 그 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협박자들도 그만 지쳤는지 더는 심야 전화를 해오지 않았습니다. 하긴 작가야 자정을 넘기면 원고량이나 불어나지만 그 사람들이야 자정을 넘기면 수면 부족만 초래할 뿐이지요. 햇볕정책을 내세우며 북한을 오간 정권도 〈태백산맥〉 사건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끝났습니다.

“아예 상을 탈 생각도 하지 말고, 교과서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말아요. 백날 정권이 바뀌어도 윗대가리 빼고는 다 보수니까.”

어느 후배 평론가가 술 취해 한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웃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의 물결 위에 〈태백산맥〉 표지가 찍힌 삐라가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엄동설한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분단은 위기의식을 낳고, 위기의식은 보수를 낳고, 보수는 그렇게 견고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태백산맥〉 같은 것을 쓰다니…. 새삼스럽게 가슴 한복판으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정권에서도 틀렸다…, 저는 마음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검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세 가지 자료를 좀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신문에 보도되었던 〈태백산맥〉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들이었습니다. 셋 다 스크랩북에 있는 것이어서 힘들이지 않고 쉽게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검찰이 〈태백산맥〉에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고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1994년 4월에 고발당해서 2005년 5월에 무혐의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만 11년을 잡아먹은 그 사건은 사법사상 가장 길게 끈 고발 사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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