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표 현장의 모습. 우리에게 선거는 민주주의 그 자체로 인식된다. ⓒ시사IN 이명익
한 개표 현장의 모습. 우리에게 선거는 민주주의 그 자체로 인식된다. ⓒ시사IN 이명익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사물을 탐구하여 앎에 이른다는 의미다. 물리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해보려는 칼럼 제목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 같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첫걸음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의심하고 그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이때 우리가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증거다. 즉, 격물치지라는 말이다.

첫 칼럼에서 선거가 민주적인 방법인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곧 총선이 치러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거는 민주주의 그 자체다. 선거를 제외하고 대다수 국민이 정치권력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 선거는 정말 민주적인 방법일까? 18세기 장 자크 루소는 영국인이 자유로운 것은 선거기간 동안뿐이며 선거가 끝나자마자 노예로 되돌아간다고 말했다.

우선 민주주의부터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체제로, 그 시작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노예와 여성을 제외하고 자유인 남성으로만 구성되었다. 실제 모든 것을 모두가 결정한 것은 아니었고, 권력을 위임받은 공직이 있었다. 공직의 상당수는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선발되었다는 점이 특별하다. 예를 들어, 기원전 4세기 최고 권력기관인 민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아테네 인구(자유인 남성) 3만여 명 가운데 6000명 정도였는데, 행정관 600명, 시민법정의 재판관 및 배심원 6000명 정도를 추첨으로 선발했다. 이들은 임기가 1년으로, 상당수 시민이 돌아가며 공직을 체험했다고 볼 수 있다.

선거는 속성상 (여러 의미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출하게 되므로 모든 시민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선거는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과두적 제도라고 지적했다. 선거는 힘 있고 알려진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란 현대와 같은 공직 출마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공직 수행 기회의 평등이었고,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구현되었다. 추첨이야말로 민주적인 선발 방법이었다는 뜻이다. 추첨은 로마 공화정, 피렌체와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사용되기도 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것은 선거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를 만든 페리클레스 장군과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를 만든 페리클레스 장군과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현대 민주주의는 유럽의 근대 시민혁명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17세기 계몽사상가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존 로크는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시민의 동의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이다. 누구도 이런 권리를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오직 개개인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서만 국가권력에 종속되는 것이 가능하다. 근대국가는 규모가 커서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기 힘들었고, 시민은 대표에게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이를 대의 민주주의라 하는데, 이때 사람들에게서 국가권력에 종속된다는 동의를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당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

근대 민주국가가 성립될 당시 추첨은 동의의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추첨이라는 방법에 합의했더라도, 개별 시민의 의지로 권력에 종속되는 것에 동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거는 투표자가 자신의 의지로 결정에 참여했다고 느끼게 하여,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 결국 근대 대의 민주주의에서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인 권력 분배의 평등보다 중요했던 것은 권력 위임에 대한 동의의 평등이었다. 선거는 사람들이 권력에 복종하도록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종의 장치였다는 뜻이다.

선거는 대개 특정 집단에 유리하여 불공정한 공직 분배를 가져올 수 있다. 민주주의가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체제라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의 직업 분포는 실제 분포와 비슷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21대 국회의 경우 법조인 출신이 15%에 달한다. 하지만 모든 국민 가운데 법조인 출신은 0.05%에 불과하다.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 법조인이 더 필요한 존재일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많이 대표된 것인지도 모른다. 선거가 특정 집단에 유리한 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를 지나며 보통선거가 확립되고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자 유권자 수가 대폭 늘어났다. 일반 국민이 대표 후보자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고 투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정당이라는 조직을 보고 투표를 하게 된다. 이른바 정당 민주주의다.

정당정치는 문화적·경제적 차이를 바탕으로 사회구성원을 대개 두 진영으로 나눈다. 사람들은 정당의 정책이 아니라 정당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에 따라 투표를 한다. 유권자는 개인의 이익이나 신념에 따라 정당에 집착하기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하는 경우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정당은 개인과 일체가 되어가고, 대개 평생 하나의 정당을 지지할 뿐 아니라 다음 세대로까지 지지가 이어진다. 따라서 정당은 정치에 안정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의회 대표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정당 때문에 선출되었기에 자신의 의견보다 정당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정체성이 다른 정당 사이의 타협은 쉽지 않고 대립은 격화된다. 의회에서 상대 정당과 토론을 하여 합의를 끌어내기는 힘들지만, 각 정당 내부에서는 정책을 두고 치열한 토론을 하게 되는데, 이때 시민의 요구가 반영된다. 선거에 나갈 후보를 선정할 때 검증 과정을 통해 최소한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역할도 한다.

필자에게 사실 정당은 불가사의한 존재다. 한국에서 정당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모두를 배출한다. 정당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 이는 근대 민주주의의 뼈대를 이루는 삼권분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는 정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가 합법적으로 무너진다고 이야기한다. 통치자로 부적합하고 인기만 있는 인물을 정당은 단지 선거에 이기기 위해 내세운다. 나중에 그를 제어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미국의 트럼프 등 수많은 사례가 있다.

다수결의 정당성은 이타심에서 온다

한국 총선도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당에 대표를 맡기는 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수의 지지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다. 단 한 표라도 많은 사람이 이기는 방법이다. 다수결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표가 갈려서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후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2000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무소속의 랠프 네이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경쟁을 벌였다. 네이더와 고어는 지향하는 바가 비슷했고 결국 표가 갈려 부시가 가까스로 승리했다. 고어와 네이더의 표를 합치면 전체 표의 51%였는데 부시가 진정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2000년 10월17일 텔레비전 토론에 나온 조지 W. 부시(왼쪽 사진 왼쪽)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왼쪽 사진 오른쪽). 랠프 네이더 무소속 후보(오른쪽 사진)와 앨 고어의 표가 갈려 최종적으로 부시가 승리했다.ⓒAP Photo
2000년 10월17일 텔레비전 토론에 나온 조지 W. 부시(왼쪽 사진 왼쪽)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왼쪽 사진 오른쪽). 랠프 네이더 무소속 후보(오른쪽 사진)와 앨 고어의 표가 갈려 최종적으로 부시가 승리했다.ⓒAP Photo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보르다 투표법’이 있다. 세 후보에게 1등 3점, 2등 2점, 3등 1점으로 점수를 주고 합산하여 최다 득점자를 선발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네이더나 고어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부시에게 최하점을 줄 것이니 부시가 당선되기 힘들다. 보르다법의 또 다른 장점은 후보들이 모든 유권자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를 1위로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여전히 2점이나 1점을 두고 선택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보르다법 말고도 많은 선거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다수의 지지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도 쉽지 않은 문제지만,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다수의 지지를 따라야 하는지 대답할 수 있을까? 다수의 이익과 욕망이 언제나 옳은 것일까?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유권자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투표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다수의 지지는 사회의 일반 의지를 드러내게 되며 정당성을 갖는다. 물론 많은 사람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투표한다. 하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창시자들이 생각한 다수결 투표의 정당성은 이타적인 마음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다수가 소수의 유대인을 학살하기로 결정하거나 르완다에서 다수의 후투족이 소수의 투치족을 박해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루소에 따르면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수결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원래 선거는 추첨보다 민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선거는 근대 민주국가 초기에 사람들이 권력에 복종하게 만드는 수단에 가까웠다. 현대는 정당 민주주의 시대다. 정당이 제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합법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 다수결만이 선거의 방법이 아니며, 다수의 지지가 언제나 정당한 것도 아니다.

총선을 앞둔 지금, 어디에 투표할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하는 선거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으니까.

기자명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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