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창간 2주년 소설가 조정래 특별 기고 ❶
현대사 3부작이라 불리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저자 조정래씨가 올해로 작가 생활 40년을 맞았다. 작가는 그동안 소설을 쓰느라 바빠 이 현대사 3부작에 쏟아지는 독자의 수많은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했던 걸 못내 아쉬워했다. 게다가 작가의 마음 속에는 ‘자전소설은 언제쯤 쓸 생각이냐’ ‘왜 자전소설은 쓰지 않느냐’는 질문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참언론을 위해 어깨동무하고 나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신문 〈시사IN〉이 출판사를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는 한여름 더위를 무릅쓰기로 했다. 40년간의, 황홀했지만 지옥 같았던 세월에 대한 절절한 기록이 곧 책으로 엮여 나온다. 〈시사IN〉 인턴 기자 희망자들이 던진 500여 개의 질문 가운데 84가지를 추려 이에 답하는 형식이다. 〈시사IN〉은 그중 두 편을 연재하고, 추석 합병호에는 작가의 인터뷰를 싣는다.

〈태백산맥〉의 소년 전사 조원제의 모델이 〈민족경제론〉의 저자 박현채 선생이라고 합니다. 그게 어떻게 된 사연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빨치산과 관련된 작품으로 이태의 〈남부군〉과 이병주의 〈지리산〉 등이 있습니다. 이들 작품과 〈태백산맥〉이 혹여 무슨 관련이 있는지요.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생기는 궁금증입니다.
- 권지은 (경희대 정외과)

“와따메, 해방 직후 사회적 문제의 핵심이 농민허고 농토라는 것을 어찌 그리 딱 알아부렀드라냐! 참말로 용허당께로.”

“거 참 요상허당게. 백아산을 한 번 보고는 워찌 그리 사진 찍데끼 딱 써부렀냐. 재주는 따로 있는겁서 이.”

박현채 선생께서 겨우 예순하나 그 아까운 나이에 떠나신 지 어느덧 13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길목에서나, 계절이 바뀌는 어떤 날이면 문득문득 선생님의 그 어기차면서도 정다운 음성이 들리고는 합니다.

위의 첫 번째 말은 제가 〈태백산맥〉에서 ‘해방공간’의 사회적 갈등과 충돌, 그것이 급기야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으로 다루었던 문제였습니다. 국민의 80퍼센트가 농민, 그중의 80퍼센트가 소작인인 나라에 해방이 왔습니다. 해방은 새 세상을 뜻했고,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인들은 새 세상에 어울리는 생존조건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작인의 신세를 면하는 것, 농토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습니다. 그 요구가 실현되지 않으면 한반도가 미·소에 의해 분단되지 않았더라도 세상은 뒤집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내란(내전)입니다. 저 먼 당나라 때부터 일러왔습니다. ‘백성은 바다고 권세는 그 위에 뜬 일엽편주다.’ 그 진리에 입각해, 백성을 굶주리게 하면 동서양의 모든 권세들은 성난 바다의 파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습니다.

새 욕구가 분출하는 ‘해방 공간’에서 자신들도 한 번 사람답게 살고 싶은 생존권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농민들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였습니다. 저는 그 점을 〈태백산맥〉의 핵심 주제로 해서 소설을 전개해나갔고, 그 점을 가장 빨리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최초로 인정해준 사람이 박현채 선생이었습니다.

왼쪽부터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원고의 동산이다. 5만 장이 넘는다. 가운데는 작가의 손자.
“모든 지식인들이 이데올로기에 쏠려 분단의 열쇠를 찾고 있을 때 조정래는 엉뚱하게 그 열쇠를 ‘농민들’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긴 소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끈질기게 농민의 문제를 제시하며 읽게 한다. 그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우리는 끝내 설득당하고 만다. 감동을 동반한 그 설득에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이의가 없으니까 그의 이야기는 승리한 논리가 된다. 그의 분단 내인론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경제학자 정운영씨가 쓴 글입니다. 그는 ‘농민 문제의 중요성’을 발견한 두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 두 분은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분 다 서울대 상대 출신이고, 예순한 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옛날부터 예순한 살에 환갑잔치를 했던 것은 무언가 범상치 않은 뜻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찍이 그 농민 문제를 설파한 이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모순은 수탈적인 농지 소유관계이다.’

이건 누가 한 말일까요. 조선 500년사에서 오늘날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 세종대왕이라면, 그이는 가장 존경받는 학자이며, 베트남 해방의 아버지 호찌민의 책상에 그분의 책이 꽂혀 있습니다. 그분은 〈목민심서〉의 저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십니다.

이상야릇한 원고 거래

박현채 선생은 광주 서중학교 저의 선배이십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조형’이었던 호칭은 금세 ‘니’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호칭만큼 서로 마음속 저 깊은 곳까지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음 밑바닥까지 드러낸 이야기들이 〈태백산맥〉에 담겨 있습니다. 〈태백산맥〉 후반부를 이루고 있는 빨치산 이야기들은 선생의 천재적인 기억력에 의한 증언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에 앞선 빨치산 출신들에 대한 취재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 답답한 상황에서 빨치산 평대원도 아니고 문화부 중대장을 지낸 간부를 만났으니 그것은 길을 가다가 다이아몬드 덩어리에 걸려 넘어진 격이었고, 길에서 주운 복권이 1등 당첨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몇몇 평론가들은 ‘〈태백산맥〉이 이태의 〈남부군〉에 빚진 바 크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회적 사건에 대한 직시도 하지 않고, 정확한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무책임한 글입니다. 그 글이 말하는 바는 ‘〈태백산맥〉의 빨치산 부분은 이태의 〈남부군〉 덕을 많이 봤다’는 지레짐작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제가 〈태백산맥〉 1부의 중간쯤을 쓰고 있었던 1984년 말쯤에 동료 소설가 백시종씨가 3000여 장의 복사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지금 쓰는 소설에 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한 번 살펴보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고는 이미 다른 소설가 몇 사람도 읽었으니 알고 있으라는 단서도 붙어 있었습니다. 퍽 신중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태백산맥〉에서 하대치와 안창민이 부하를 이끌고 군 수송열차를 습격하는 진트재 터널.
저는 그 원고를 보자마자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건 제가 바로 그렇게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빨치산 이야기가 아닌가! 아무리 잡으려고 애써도 빨치산의 실체는 뿌우연 안개 저편에 가려 흐릿흐릿 가물가물할 뿐이던 그때에 그 원고 뭉치는 그대로 보물 덩어리였습니다. 앞의 몇 장이 떨어져나가 제목도 알 수 없는 원고이기는 했지만, 문장은 별 손색없이 틀이 잡혀 있었고, 내용도 아주 구체적이어서 읽어갈수록 실감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부분 몇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어서 그 글의 필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필자는 원고를 다 읽은 다음에 찾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저는 숨 가쁘게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으며 취재 노트에 빽빽하게 기록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장면, 장면들이 영상화되며 마침내 소설 구성이 생생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쳇말로 ‘발동’이 걸린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작가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식의 작동으로, 무당으로 치자면 굿판에서 서서히 신 내림이 이루어지고 있는 뭐 그런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태백산맥〉 2부를 거의 마쳐가던 1987년 하반기에 느닷없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원고가 6·10 항쟁에 뒤따른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의 물결을 타고 〈남부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9·28 수복 이후부터 전개되는 빨치산 투쟁이 소설에 나오려면 아직 멀었고, 저는 2부를 쓰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그 원고의 필자를 찾는 일은 느긋하게 뒤로 미뤄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로소 그 필자가 ‘이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는 〈태백산맥〉에서 깡패 염상구가 다이빙을 한 철교이다.
그런데 〈남부군〉은 저만 난감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한 사람 소설가를 참혹하게 몰락시키는 사건을 빚어냈습니다. 다름 아니라 동아일보는 이태씨의 인터뷰를 통해서 소설가 이병주씨가 그의 소설 〈지리산〉에다가 〈남부군〉을 그대로 도용했다고 대서특필한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이병주씨는 원고를 도용한 게 아니라 정당하게 원고료를 지불하고 산 것이라고 액수까지 밝히는 글을 썼습니다.

결국 이병주씨의 〈지리산〉 일곱 권 중 뒤의 두 권은 이태의 〈남부군〉 그대로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이 표절인지 도용인지 독자들로서는 알쏭달쏭 구분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원고를 사고파는 이상야릇한 거래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지난날 열심히 메모해두었던 취재 수첩을 미련 없이 찢어버려야 했습니다. 제 앞에는 다시 취재를 시작해야 할 암담함이 닥쳐와 있었습니다.

천군만마가 따로 있으랴

“조정래가 누구여? 나랑 잠 만났으면 쓰겄는디.”

이 말을 앞세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 박현채라고 허요. 근데, 소설 참 맛나게 잘 썼습디다 이. 아조 재미지게 읽었는디, 앞으로 빨치산 야그가 본격적으로 나와야 쓸 것 같등마, 워째, 나가 그짝얼 쪼깨 아는 것이 있응께로 들어볼 맴이 있소?”

그 투박한 진짜배기 전라도 사투리가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가! 빨치산 얘기를 해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저는 솟구치는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내며 대답했습니다.

“예, 예, 그런 분을 찾고 있었던 참입니다.”

“잉, 그러문 마침 잘 되았소. 내 자서전 대신 써준다고 생각허고 내 이약얼 듣도록 허먼 되겄소.”

이렇게 홀연히 제 앞에 나타난 경제학자 박현채. 빨치산 간부 출신에, 중학교 선배이고, 특출한 기억력을 가진 데다, 먼저 경험담을 얘기하고 싶어하니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찰떡궁합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흔한 천군만마(千軍萬馬)라는 말, 박현채 선생께서 제 앞에 출현하신 것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수시로 박 선생의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마다 선생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반갑게 말상대를 해주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빨치산 이야기를 하기에는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그때까지도 한 달에 두 번씩 중부서 형사가 가져오는 동향조사서에 꼭꼭 도장을 눌러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선생은 얘기에 열중하다가 문득 중단하기도 했고, 사무실로 들어서는 저에게 빠른 눈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형사 나으리께서 왕림하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다방, 저 다방 구석자리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 선생은 증언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멀고 험한 지리산의 현장 취재도 언제 어느 때나 싫은 기색 한 번 하지 않고, 모든 일 다 제쳐두고 흔쾌하게 배낭을 지고 나서고는 했습니다.

“잘 써라 잉. 니는 아조 큰일을 허고 있는 것잉께.”

박현채씨(왼쪽)는 멀고 먼 지리산 취재 여행에도 매번 동행했다. 1988년 겨울 지리산 임걸령에서.
길을 나설 때면 선생께서는 이런 말을 나직하게 하고는 했습니다. 그건 당신이 왜 그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제 소설을 통해서 사회주의자나 빨치산들이 ‘뿔 돋친 도깨비들이다’ ‘흡혈귀나 드라큘라다’ ‘살인마이고 악당들이다’ 하는 반공주의적 누명을 벗을 수 있기를 기대하셨던 겁니다.

박 선생은 지리산 준령을 넘고 넘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아무도 엿듣는 사람이 없고, 옛날의 비극이 점철된 현장에 들어서 있으니 선생의 이야기는 깊은 회한과 함께 실타래 풀리듯 풀려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세석평전의 드넓은 분지에 가을 달빛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소주잔에 담긴 달빛까지 마시며 선생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여기 세석평전에서 경남도당이 몰살을 당해부렀어야. 밑에서는 포위한 군경들이 밀고 올라오고, 우에서는 비행기가 네이팜탄을 퍼부서 대는디 워쩔 수가 있었겄냐. 시체들이 늘핀허니 여그럴 다 덮어부렀제. 여그서 지천으로 피는 철쭉은 그냥 철쭉이 아닌 것이여.”

깊은 한숨으로 선생의 목은 메고, 두 볼에는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과음하신 선생은 발을 헛디뎌 한 길 넘는 낭떠러지로 곤두박이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선생은 목을 다쳤고, 침을 맞으며 서너 달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죄송스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염치없고 뻔뻔스럽게도 또 지리산을 가자고 했고, 선생께서는 또 씩 웃으며 “가야제”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산행에서나 식당에서나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묵어, 다 묵어. 배에 들어가면 다 소화되는 법이여.” 선생은 옆 사람을 다그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선생을 보고 사람들은 식탐이 많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식탐이 아니었습니다. 감수성 예민하고 식욕 왕성했던 10대 후반에 빨치산 생활을 하며 사무치게 배고파야 했던 그 기억이 선생의 평생을 지배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과식을 하고, 과식은 살을 찌게 하고, 살찐 몸은 고혈압이 되고, 고혈압은 선생을 저세상으로 데려간 뇌줄중의 치명상을 입힌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지금까지도 떼칠 수가 없습니다.

2008년 11월21일 문을 연 태백산맥문학관. 아리랑문학관에 이어, 조정래씨는 생전에 두 개의 문학관을 가진 최초의 작가가 됐다.
소년 전사 조원제 탄생

“선생님, 선생님이 겪으신 일을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에 등장시키면 어떨까요?”

저는 어느 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려? 그것도 괜찮허겄제.”

잠시 생각하시던 선생께서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름을 그대로 써도 괜찮을까요?”

“내 이름을…?” 선생은 한동안 저를 빤히 쳐다보시더니, “나야 영광이제만, 그거 긁어 부시럼 될지도 몰르는디? 글 안해도 주목허고 있다는 소문잉께 니 조심혀야 써.”

선생은 무겁게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예, 그러면 새 이름을 짓지요.”

그래서 저는 며칠 궁리 끝에 ‘조원제’라는 이름을 지어냈습니다.

그 이름이 탄생한 사연은 이랬습니다. 그때까지 〈태백산맥〉에는 이미 2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씨 성’은 쓰이지 않았습니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저의 성씨라서 무의식중에 제외해놓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제 애정과 신뢰의 표현으로 ‘박현채’를 대신하는 성을 ‘조’로 결정했습니다. 그 다음 고민이 이름이었습니다. 끝 자를 우리 함안 조가의 항렬자인 ‘래’자로 하자니 선배님을 저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한 항렬을 높여 ‘제’자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자는 ‘빼어난 빨치산 박현채’를 의미해 ‘으뜸 원’자를 쓴 것이었습니다.

“허! 작명허는 재주도 있구마 이.”

제 설명을 듣고 박 선생은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거기까지는 순조롭게 좋았는데, 그 다음에 아주 고약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조원제 부분이 나오기만 하면 실존인물 박현채가 앞을 딱 가로막으며 펜이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늘 부리부리한 선생의 눈이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가 하면, ‘아따, 나가 그리 애써감서 이약해줬는디도 겨우 요렇게밖에는 못 쓰는 것이여!’ 하는 선생의 타박이 들려오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모습을 떼치려고 애쓰며 파지를 내고 또 냈습니다.

가끔 독자들이 묻습니다. 〈태백산맥〉 중에서 어느 대목이 가장 쓰기 어려웠냐고. 그건 두말할 것 없이 ‘박현채 부분’이었습니다. 가장 쉬웠던 부분이 왈패 염상구 부분이었다면 박현채 부분은 그보다 열 배는 더 힘이 들었습니다. 주먹패 염상구는 제멋대로 거칠 것 없이 사는 인간이니까 거의 파지를 내지 않고 써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니까 전혀 신경 쓰고 눈치 볼 데가 없었습니다.

박현채 부분이 나올 때마다 저는 진땀을 흘리며, 당사자에게 검토받게 될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롭게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그런 설정을 했던 것을 문득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허허, 글재주라는 것이 참 묘헌 것이여. 나가 나오는 대목대목이 모두 가슴이 통게통게 험시로 첨 듣는 이약 같드랑께로.”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크게 후배를 칭찬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소설을 다 쓴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나와는 사상이 다르지만, 당신네들이 추구하는 세상이 온다면 그 사람 수상감이오.”

인혁당 사건으로 선생을 수사했던 검사가 선생의 후배를 조사하며 했던 말이었습니다.

선생은 준수한 인물에 강건한 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천재적인 머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남자다운 기가 승했고, 논리적 원칙론을 바탕으로 결단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정이 많았고, 너그러웠고, 사람을 폭넓게 이해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카리스마는 그런 모든 것들이 융합되어 피어나는 꽃이었습니다.

기자명 조정래(소설가 )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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