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는 5인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기관이지만, 현재 2명으로만 심의와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은 김홍일 방통위 위원장. ⓒ시사IN 이명익
방송통신위원회는 5인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기관이지만, 현재 2명으로만 심의와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은 김홍일 방통위 위원장. ⓒ시사IN 이명익

미국 연방 대법원의 스칼리아 대법관과 긴즈버그 대법관은 보수와 진보를 대표했다. 그들은 사회적 쟁점마다 치열하게 의견을 달리하면서도 수십 년 동안 우정을 굳게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스칼리아의 반대 의견을 반영해 최종적으로 발표한 내 판결문은 초안보다 훨씬 나았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우정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법을 해석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미국 헌법과 연방 대법원을 숭상하는 마음은 같다”라는, 서로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반론을 통해 더 나은 의견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동료가 뜻이 같은 동지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살다 보니 두 대법관의 우정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위원장 김홍일)는 5인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기관이지만, 현재 2명으로만 심의와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애초에 ‘반대 의견’이라는 것이 나오기 쉽지 않은 구조다. 법원이 “방통위는 정치적 다양성을 그 위원 구성에 반영하도록 함으로써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 및 공익성, 국민의 권익 보호와 공공복리 증진이라는 방통위법 입법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2명 위원들의 심의 및 결정은 방통위법의 입법 목적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통령 추천 위원 2명만으로 운영되는 기형적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의견 조율 시도조차 없는 방심위

위원 숫자를 채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위원장 류희림) 회의록을 읽다 보면, 회의가 맞는지 회의감이 든다. 방심위는 특정 당의 당원은 위원이 될 수 없도록 하는 등 정파성을 탈피하기 위한 법적 규제를 마련하고는 있지만, 여당과 야당 몫을 구분하여 위원을 추천하도록 설계된 탓에, 구조적으로 ‘정파적 위원회’가 될 위험성이 크다. 위원들이 사명감과 전문성을 발휘하여 토론으로 합의에 이르겠다고 작심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론이 정해진 다수결 기구일 뿐 합의 기구가 되기 어렵다.

예전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2010년 ‘천안함의 의문’을 방송한 KBS 〈추적 60분〉 방송을 심의할 때, 방심위는 2시간 반 이상 제작진으로부터 사안에 대한 의견을 듣고 필요한 사항을 질문했으며, 위원들의 토론 과정을 거쳐 제재 수위를 조율했다. 그 과정은 회의 속기록 80여 장에 담겼다. 2014년 JTBC 〈뉴스9〉 ‘다이빙벨’ 보도를 심의할 당시 방심위 박효종 위원장은 “방심위는 합의제 정신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라며,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들이 바라는 공정 심의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소수와 다수 간의 합의를 이루는 것”이니 허심탄회하게 논의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비록 ‘문제없음’과 ‘관계자 징계 및 경고’에 이르는 생각의 간극을 끝내 좁히지 못했지만, 그 시절에는 의견을 조율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했다.

위원 간 의견 조율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진은 류희림 방심위 위원장. ⓒ시사IN 신선영
위원 간 의견 조율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진은 류희림 방심위 위원장. ⓒ시사IN 신선영

10년이 지난 지금은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뉴스타파〉의 김만배 녹취 보도를 인용한 KBS, JTBC, YTN에 과징금의 중징계를 결정할 때, 야권 측 추천위원 2명은 퇴장, 1명은 문제없음, 여권 추천위원 4명은 과징금 부과 등 극단적으로 의견이 갈렸지만, 조율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생각을 바꾸는 유연성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자신의 논리를 더 탄탄히 만들기 위해서라도 다른 생각을 잘 듣고 재반박하는 ‘토론’이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모두 자기 할 말만 한다. 잘 듣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시절이다. 합의에 이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 없이 다수결로 운영할 거면, 굳이 모여서 논의하느라 시간과 비용을 써가며 ‘위원회’ 형태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각자 원칙과 해석은 다르더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같다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토론한 과정이 담긴 회의록을 읽고 싶다. 반론을 진지하게 들을 때 나의 주장도, 우리의 결론도 더 나은 길에 이를 수 있다.

기자명 이혜온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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