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복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일명 ‘사이다’ 서사가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사이다 서사는 최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최소 1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웹툰 〈외모지상주의〉는 외모로 인해 놀림받던 형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어느 날 갑자기 형석이 완벽한 몸과 수려한 외모를 지니게 됨으로써 사는 세계가 달라진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폭발적 인기를 끈 게 2014년이다. 뒤이어 2018년 연재를 시작한 웹툰 〈여신강림〉도 메이크업을 통해 주인공 ‘주경’의 외모가 아름답게 변하게 된다는 설정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평상시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거나 외면받던 캐릭터가 외모 변화를 기점으로 교내 최고 ‘서열’에 등극하는 이 같은 설정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사이다 서사의 막이 올랐다.
초반에는 외모를 중심으로 주인공의 격변이 이루어지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유형도 다양하게 확장됐다. 특정 분야에서 전설적인 실력을 얻게 된다거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지하는 것, 혹은 엄청난 부잣집에서 사랑받는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등 출신·지식·실력·경험 등 모든 것이 사이다 서사의 근간이 된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주인공 ‘지원’은 그중에서도 과거로 회귀한 사례다. 이전 생에서 지원은 암 투병하던 중 남편 ‘민환’과 절친한 친구 ‘수민’이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대로 생이 끝나려나 싶던 찰나, 지원은 민환과 결혼하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자신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훤히 알고 있는 상태로.
그녀를 배신할 사람들, 이후 찾아올 어려움, 상승할 주식 차트까지 손에 쥔 지원은 민환과 수민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그녀가 모든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만큼 이 복수는 아주 수월하게 진행된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두 알고 있으므로 지원은 자신의 행동을 아주 조금 수정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나 드라마 〈더 글로리〉의 동은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들여 설계한 복수와는 차원이 다른 난도다. 그래서일까. 앞선 작품들의 복수가 부단히 괴롭고 씁쓸하며 고통스러운 행위라면, 지원의 복수는 가볍고 통통 튀는 데다 때로 발랄하기까지 하다. 한없이 선한 이가 완벽한 악인을 징계하는 권선징악의 세계 안에서 복수란, 식도를 부드럽게 넘어가는 탄산처럼 부대끼지 않은 데다 달콤한 ‘사이다’ 그 자체다. 복수 너머의 허망함, 복수 이후 남겨진 주인공의 고독함 같은 건 여기 없다.
일반적으로 사이다 서사는 성장 서사와 비견되어 논의되곤 한다. 성장 서사에서 주인공은 역경의 긴 구간을 지난 후 마침내 성장·성취에 도달한다. 반면 사이다 서사는 주인공이 작품 초반에 모든 역경을 한꺼번에 겪는다. 신뢰하던 이의 배신, 배우자의 외도, 가정의 파산, 혹은 부모님의 죽음 등 온갖 불행이 바구니째 쏟아진 듯 주인공을 덮친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이 모든 불행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손쉽게 작은 성취를 달성하고 이를 같은 방식으로 꾸준히 반복해서 눈덩이 굴리듯 더 큰 쾌감과 성취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사이다’가 시작된다.
가난은 악하고 부는 선하다는 구도
이런 서사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콘텐츠 하나를 소비하는 데에 긴 시간을 투자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콘텐츠를 보고 난 후 불쾌하고 찝찝한 감정이 아니라 깔끔하고 유쾌한 기분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서사는 매우 적합한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다만 사이다 서사가 대체로 복수라는 소재와 연결되는 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복수와 사이다 서사를 결합한 극은 종종 ‘참교육’이라는 단어로도 불리는데,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일부를 잘라 쇼츠로 재업로드한 영상의 제목은 대부분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달고 있다) 실제 참교육 콘텐츠 중 정말로 ‘교육’에 관심 있는 내용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교육이 상대를 이해하고 감화하는 데에 비해 이른바 ‘참교육’ 콘텐츠들은 상대를 완벽하게 뭉개고 짓누르는 쾌감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짓밟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대상을 ‘당해도 싼’ 완벽한 빌런으로 만들어야 한다. 악역을 악역답게 만드는 부분도 서사적 고민이 많이 필요한 영역이지만, 대개의 사이다 서사는 짧은 복수를 여러 번 반복하는 사건의 연속에 집중한다. 그런 나머지 악역 캐릭터의 서사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 모로 봐도 ‘당해도 싼’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더 자극적으로 빌드업하기도 한다. 바로 사회적 혐오를 이용하는 것이다.
웹툰 〈내 남편과 결혼해줘〉로 보자면, 악역으로 등장하는 수민은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과 빈곤에 관한 혐오를 재생산하는 캐릭터다. 수민은 지원이 자신과 같은 한부모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달리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와 열등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변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무리한 거짓말을 일삼기도 한다. 불우하고 가난했던 가정환경이 악역의 ‘악역 됨’을 완성한다는 이 설정은 다른 웹툰에서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웹툰 〈장난감〉에서는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이들이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력과 통제를 대물림하고, 〈여신강림〉에서도 극 초반에 빌런으로 등장하는 ‘수진’이 궁핍한 가정환경으로 고통받는 장면이 그려진다. 반면 주인공들은 어렵게 자라나더라도 결국 가족에게 사랑받는 금지옥엽이다. 지원이 회귀한 이유조차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때문 아닌가.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가난에 처한 이들을 악하게 그릴 뿐만 아니라 돈이 많은 이들은 선하게 그리는 경향까지 있다. 어린 시절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착하게 성장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하다는 구도뿐만 아니라 파산이나 주식 하락 등 경제적 빈곤이 복수의 계기로 작동한다. 복수 이후 주인공은 재벌과 결혼한다는 설정마저도 구시대적 편견을 답습하고 있다.
OTT 플랫폼과 웹툰·웹소설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 지금, 서로가 서로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고자극’ 서사가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고들 흔히 지적한다. 그러나 그 자극이 어떤 요소에 의한 것인지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폭력의 수위 때문인지, 아니면 날것의 대사나 설정의 낙차 때문인지.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지원과 수민의 낙차가 극심한 고자극 서사였다. 이 안에서 수민은 끝내 이해와 협력·화해의 대상이 아니라 완벽한 복수의 대상으로 추방되며, 이를 통해 지원의 세계는 비로소 완성된다. 가난도, 피해도, 폭력도 없는 매끈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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