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러기시 해커스(게으른 해커들)’ 구성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조경숙 제공
‘슬러기시 해커스(게으른 해커들)’ 구성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커뮤니티의 미션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엑셀과 싸우는 시간을 줄여 세상과 싸우자”는 것이다. ⓒ조경숙 제공

지금까지 여러 지면에 테크 업계나 그 서비스를 비판하는 칼럼을 자주 기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술 반대론자인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기술을 꽤 사랑하는 편이다. 학창 시절 취미로 시작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업으로 삼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술에 몰두하며 보냈다. 무엇보다 내가 동경한 기술의 세계는 언제나 열린 문이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오픈소스 프로그램이 많았고, 많은 사람이 선뜻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접하는 오류 메시지라도 무섭지 않았다. 구글에 메시지를 넣어 검색하면 언제든 답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서로의 지식을 기꺼이 공유하는 호의에 기대어 나 역시 눈앞의 수많은 오류를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개발을 업으로 하지 않지만, 가끔 개발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요새는 활동가들이 단체를 운영할 때 발생하는 반복 업무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주로 만든다. 혼자서 하는 건 아니고, 커뮤니티인 ‘슬러기시 해커스(게으른 해커들)’의 동료들과 함께다. ‘슬러기시 해커스’라는 이름은 여러 번 클릭해서 해결해야 할 일을 한 번의 클릭만으로 가능하게 하는 식으로 가급적 ‘게으르게’ 일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해부터 개발자 승훈, 정보공개센터의 조은과 함께 논의하며 이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 커뮤니티의 미션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엑셀과 싸우는 시간을 줄여 세상과 싸우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소만 입력하면 우편번호를 자동으로 검색해 엑셀에 채워준다든지, 수십 명의 후원증서를 클릭 한 번으로 뚝딱 만들어준다든지. 이런 종류의 일은 하나같이 자잘하게 손이 많이 가는 데다 사람이 직접 하다 보면 왕왕 틀리게 입력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자동화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단순히 개발자가 의뢰를 받아 코드를 짜는 게 아니라 매월 정기적으로 모임에서 활동가와 개발자가 함께 만나 의견을 나누고 머리를 맞대어 방법을 찾아나가는 식으로 커뮤니티를 이어가고 있다.

기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시민 해킹(civic hacking)’이라 부른다. 슬러기시 해커스 활동도 넓은 범위에서는 시민 해킹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해킹이라는 단어는 기업의 데이터를 불법적으로 빼내는 등 부정적 활동을 지칭하지만, ‘시민’과 결합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공공의 영역에서도 자주 쓰이곤 하는 시민 해킹은 시민들이 공공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내거나 기존 정부 시스템을 개선하는 등 여러 활동을 통칭한다. 해킹와 달리 시민 해킹은 적법한 절차 아래 이뤄지며, 대체로 공익적인 목적으로 기획된다. 이때 개발자들은 외주를 받아 개발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비전과 방향성을 갖고 개발한다. 개발자들이 스스로의 역량을 토대로 참여하는 연대 활동인 셈이다. 이 분야의 선구자는 아주 많고, 국내에서 이 영역의 개발자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다종다양하다. 그들이 만든 것 중 어떤 서비스들은 우리가 이미 들어봤거나 사용해본 적이 있다.

가장 비싼 차 모는 국회의원은 누구?

공적 마스크 5부제가 실시되던 2020년 3월11일 서울 관악구 한 약국 앞에 시민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공적 마스크 5부제가 실시되던 2020년 3월11일 서울 관악구 한 약국 앞에 시민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이를테면 코로나19 팬데믹이 막 시작되던 시기, 갑작스럽게 마스크 구매량이 폭증해 약국마다 줄 서 있던 광경이 기억나는지. 각 약국에 얼마만큼의 재고가 남아 있는지 몰라 약국마다 방문해야 했던 때, 약국별 마스크 재고 현황을 보여주는 공적 마스크 앱이 혜성처럼 개발됐다. 공적 마스크 앱의 개발자들은 이윤 때문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손을 보탰고, 이후 코드포코리아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코드포코리아는 이후에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방문 장부를 남기는 곳에 핸드폰과 이름이 적힌 개인정보가 아니라 암호화된 개인 안심번호를 사용할 수 있게끔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실현한 바 있다.

공적 영역의 빈곳을 채워주는 서비스 이외에 시민으로서 응당 알아야 할 정보의 접근성을 높여주는 서비스도 있다. 지난해 공개된 웹사이트 ‘오픈와치(https://www.openwatch.kr/)’가 대표적이다. 오픈와치는 비영리단체인 정보공개센터와 오픈와치의 취지에 공감한 개발자, 디자이너 등이 협업하여 함께 만들었다. 오픈와치의 슬로건은 “권력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다. 슬로건처럼, 이곳 웹사이트에서는 지방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의 기본 정보와 정치후원금 내역, 고액 기부자 명단 등을 일반인도 보기 쉽게 알 수 있도록 정리하여 공개하고 있다. 사이트에 접속하면 첫 화면에서 20대 대통령 선거 후원금 중 최대 액수는 얼마인지, 가장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국회의원은 누구이며 차 값은 얼마인지 등을 소개하는데, 이 모든 것이 해당 데이터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다. 오는 총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에 관한 정보도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때로 이런 서비스는 ‘목적 없는 만남’ 가운데 이루어지기도 한다. 매주 만나서 감자튀김을 먹는 모임인 ‘널채움’에서는 감자튀김을 먹으려고 모였다가 ‘남양유없(https://isnamyang.nullfull.kr/)’이라는 서비스를 개발한 바 있다. 이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편의점이나 마트 등에서 구매하려는 제품이 남양유업 제품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한창 남양유업 불매 운동이 고조될 때 등장한 서비스다.

공직자 및 정치인의 정보를 공개하는 웹사이트 ‘오픈와치’의 메인 화면.
공직자 및 정치인의 정보를 공개하는 웹사이트 ‘오픈와치’의 메인 화면.

시민 해커는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 개인적 이익보다 사회의 공익을 목적으로 서비스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가 하면 국경을 넘어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국제적 연대체도 있고, 특정 목적에 따라 한시적으로 모이는 국제 시민 해커 모임도 있다. 예를 들어 기술 정의를 위한 글로벌 연합(Global Coalition for Tech Justice)에서는 2024년 한정으로 민주주의 해(Year of Democracy)라는 이름의 캠페인 연합체를 꾸린 바 있다. 올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굵직한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각국의 시민 해커가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공동으로 감시하고 디지털 캠페인을 기획하는 것이 연합체의 목표다. 이 모임에는 유럽, 북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 국적의 시민 해커들이 참여하고 있다.

시민 해커들은 세계 곳곳에서 자신만의 활동을 일구어나가고 있다. 자본력을 앞세워 기술을 휘두르는 테크 업계와는 상반된 결의 기술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시민들의 기술은 그 영토를 더욱 확장해나갈 것이다. 자본은 모르거나, 알아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격 요건도, 우대 조건도 없는 이 땅으로 누구든 용기 내어 발을 내디뎠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기술은 필요한 이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으며, 우리는 기술을 활용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일까지도.

기자명 조경숙 (테크-페미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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