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장애인 학대 사건을 표시해둔 지도.ⓒ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제공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장애인 학대 사건을 표시해둔 지도.ⓒ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제공

벌써 10년 전 일이다. 실종되었던 시각장애인이 엄마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염전 노예 사건. 장애인 100여 명이 임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가혹행위를 당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한 현대판 노예 사건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외신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세계 시민들도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서 벌어진 일이 맞냐?’며 경악했다.

부모가 맡겨놓고 간 장애인을 지금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는데, 왜 처벌받아야 하느냐고 법정에 선 염전주들은 항변했지만, 법원은 단호했다.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 보장이라는 기본이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 (중략) 염전업계의 노동력 수급 실태와 관행 또는 장애인 복지에 관한 우리 사회의 현재 수준 등과 같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법원은 판결했다.

‘장애인은 임금 안 받고 일해도 된다’는 기존 고정관념을 혁파하고 장애인이더라도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아야 하며 노동의 대가인 정당한 임금을 지급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천명한 건 바로 법원이었다. 이후 장애인복지법 개정으로 장애인 학대에 대응하는 시스템인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2017년 전국에 구축되었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첫 번째 제작하여 배포한 카드뉴스 ‘무슨 지도일까요?’에는 축사 노예, 타이어 노예, 토마토 노예, 식당 노예, 배추 노예, 뻥튀기 노예 등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장애인 학대 사건을 지도에 표시해두었다. 법원 판결을 통해 고정관념을 떨쳐버린 시민들의 적극적인 신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올바른 판결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2019년 서울 노원구의 한 사찰에서 32년 동안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는 지적장애인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노동력 착취와 함께 피해 장애인 명의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2억원을 은행에 예치한 후 그의 명의를 위조하여 예금을 인출한 행위까지 밝혀지자, 염전 노예 판결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시민들은 ‘사찰 노예 사건’이라고 명명하며 분노했다.

애초에 폭행 12건으로만 약식기소한 검찰은 시민들이 공분하자 재수사를 통해 주지 승려를 2020년 재판에 넘겼다. 사찰 구성원이면 누구나 해야 하는 ‘울력’이었다고 피고인은 변명했지만, 1·2심 재판부는 주지 승려가 피해 장애인을 폭행하는 등 승려로 대우하지 않았다며 그 변명을 일축했다. 염전뿐만 아니라 사찰 등 종교기관에서도 장애인에게 임금 안 주고 일을 시키면 안 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가 다시 새롭게 천명된 것이었다.

학대와 차별 없는 세상, 10년 전으로 퇴행하나

그런데 지난 1월4일, 대법원은 이 판결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피해 장애인에게 임금을 안 준 건 사실이지만 장애를 이유로 악의적으로 금전적 착취를 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사찰 내 종교적 사역에 참여시킨 것이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 실현’이라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취지에 오히려 부합한다는 것이다.

“보통 사찰 내에서 행자나 상좌들이 청소나 잡일들을 하는 것 아닌가요?” 최초 수사 단계에서 경찰이 던진 질문에 피해 장애인은 이렇게 답했다. “그런 정도는 다 합니다. 그런 정도의 일은 스님들도 합니다. 저는 그 정도의 일은 아니고 모든 작업과 노동 일을 하였습니다. 쉴 틈도 없이 일을 하였습니다.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거의 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을 잘하지 못하면 툭하면 때리고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피해 장애인은 승려일까? 노예일까?

피해 장애인은 자신을 노예라 말하고, 대법원은 1·2심 판결과 달리 그를 승려라고 했다. 염전 노예 사건 판결로 시작되어 시민들이 애써 쟁취해온, 학대와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이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인해 10년 전으로 퇴행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우려된다.

기자명 최정규 (변호사·<얼굴 없는 검사들>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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