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2월13일 박찬일 셰프를 만났다. ⓒ시사IN 신선영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2월13일 박찬일 셰프를 만났다. ⓒ시사IN 신선영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다. SNS에는 맛집 인증 사진이 끝없이 올라오고, 유튜브에는 먹방 영상이 줄줄이 이어진다. 얼마나 흡족한 식사를 했는지, 얼마나 특별한 시간을 보냈는지, ‘나의 경험’과 ‘나의 만족’을 뽐내는 말들이 먹음직스러운 음식 위로 쏟아진다.

여기 시선을 반대로 돌린 ‘밥 이야기’가 있다. 내가 아니라 밥상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던, 주방에서 김이 펄펄 나는 공깃밥을 담아주던 너를 기어코 기억한다. 너는, 후배의 식당에 철지난 양복을 입고 찾아와 꾸역꾸역 크림스파게티를 먹던 만술이 형일 때도 있고, 일찍 세상을 떠나, 같이 먹던 돼지 껍데기 앞에서 눈물을 질금거리게 하는 옛 친구일 때도 있다. 줄 것이 없다며 달걀말이·홍어회·노랑조개·자랭이·오징어전·부추전을 내오는 홍집 사장님일 때도 있으며, 늦잠 자는 아들을 깨워 간장과 다진 마늘에 파를 넣고 두부조림을 해먹이던 내복 차림의 아버지일 때도 있다.

박찬일 셰프는 〈밥 먹다가, 울컥〉 서문에 “우리는 잘 먹는다. 많이 먹는다. 그렇지만 흘러간 기억 안의 사람들과 먹을 수는 없다. 그게 그립고 사무쳐서 잠을 못 이룬다”라고 고백한다.

2022년 6월부터 2023년 6월까지 1년 동안 〈시사IN〉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올해 2월 단행본이 나왔다. 단독 저서로 15번째 책이다. 이름난 ‘글 쓰는 요리사’답게 침샘과 눈물샘을 동시에 건드리는 절묘한 글맛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연재가 끝난다는 소식에 〈시사IN〉 한 독자위원은 “박찬일 셰프의 글을 계속 보게 해달라”는 청원을 남겼다. 연재글에 나오는 대폿집의 위치를 묻는 독자의 메일이 편집국으로 오기도 했다.

2월13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박찬일 셰프를 만났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봇짐처럼 큼지막한 백팩에 형광색 밴드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술 마시고 귀가하던 밤, 오토바이에 “살짝” 부딪힌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을 방지하게 위해 달아놓았다고 한다.

요리사의 책이지만 음식 이야기는 아니다. 먹다가 울컥하게 만든 사람들에 방점이 찍혀 있다.

먹는 얘기를 통해서 내가 살아왔던 삶과 한 시대를 말하고 싶었다. 나는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먹는 순간에 대한 기억들이 선명하다. 그건 결핍 때문이다. 모자라니까 인상적으로 남는다. 책 속에 ‘굶으며 혀가 자랐다’라는 글에도 썼는데 사흘 넘게 배를 주리다가 먹었던 ‘덕용 라면’의 찐 기름 냄새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덕용 라면은 일종의 대형 포장 라면이다. 다섯 개가 한 봉지에 담겨 있는 제품이라 약간 싸다. 아버지가 어디서 그걸 구해 오셨다. 농심라면이 나오기 전에 있었던 롯데라면이었다. 산패돼서 아주 역한 기름내가 났다. 며칠을 복통으로 고생했지만 그 라면으로 가족들이 살아났다.

〈밥 먹다가, 울컥〉은 1년 동안 〈시사IN〉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올해 2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시사IN 조남진
〈밥 먹다가, 울컥〉은 1년 동안 〈시사IN〉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올해 2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시사IN 조남진

왜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나?

나이를 먹고 그러니까 마음속에 자꾸 차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미래나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지금의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도 그렇고, 내 글도 그렇고 신파다. 눈물 짜내는 글에도 효용이 있다. 과거를 회상한다고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잊힌 것을 끄집어내려는 노력에도 사람의 존재 가치가 있지 않을까. 옛날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게 너무 삭막하지 않나. 그게 눈물이든, 옛 사람에 대한 기억이든, 그걸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윤활(潤滑)이 된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 볕 들 날 없던 인생들에 대한 얘기가 많은 건 그게 기억에 더 남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에게 바치는 공개적 조사(弔辭)라고 얘기하는 건 과장이고, 씀으로서 해원(解冤)은 좀 하고 싶었다. 걔네들이랑 밥 한 끼, 술 한 잔 더 못했던 빚진 마음을 갚고 싶었다. 실제로 갚아지지는 않겠지만. 대중들은 모르는 내 지인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이다. DJ 집에서 먹은 밥 얘기를 쓴 건 아니니까.

“정말 오랜만에 녀석과 만난 곳이 모래내 중국집이었다. 우리는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녀석은 짜장면이 불고 있는데도 젓가락을 잘 대지 않았다. ‘미안하다. 못 지켜서. 집사람은 도망갔어.’ (···) 다시 만난 건 적십자병원 빈소였다. 이 글 초고를 써놓고 방산분식에서 3000원짜리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잘 살고 있냐. 거긴 소주 있냐(‘짜장면을 안주로 들면 그가 생각난다’ 중).”

DJ?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밥 먹은 적이 있나?

그 얘기를 하면 긴데… 기자로 일할 때다(박찬일 셰프는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34세이던 1998년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 특종 기회를 놓쳤다. 1997년 대선 날, 기자라고 얘기 안 하고 DJ 집에 미리 들어가 있었다. 그 당시 정치인의 집에는 각종 지지자들이 많이 갔다. 야당 정치인은 더더욱 그랬다. 그 집에서 밥 먹고 그냥 뭉개고 있는 식객이 많았다. 자칭 김대중 선생 비서 했던 사람이 10만명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서 저녁에 당선이 확정됐다. 이 양반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왔다. 다른 기자들은 그날 외부 일정을 따라다니느라 자택 안에 기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때 짧게라도 인터뷰를 했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었으면 큰 단독이었다. 카메라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차마 말을 못 걸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완전히 퀭한, 탈진한 모습으로 2층 침소에 올라가는데 질문을 못하겠더라. 나는 기자로서는 글러먹은 사람이다. 거기서 밥만 두 끼 먹었다. 밥은 계속 차려줬다. 아침에는 떡도 줬다.

측은지심이 큰 것 같다.

과잉이다. 연민이 많다. 그래서 문제다. 도움이 안 된다.

책에서 줄곧 그리워하는 대상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통은 외면하거나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다.

나중에 글을 모아놓고 봤더니 화교나 조선족 얘기가 많았다. 어렸을 때 나에게 만터우(중국식 만두)를 준 친구 찐개는 화교이고, 세금을 체납해서 내게 연락이 왔던 찐쩐룽 씨는 조선족 동포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그분들이 한국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더라. 피차별 민족이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이 갔다. 어찌 보면 동정이다. 동정이지만, 동정이 깊어지면 관심이 되고, 관심에 논리적인 시선이 더해지면 그 사람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나는 아웃사이더라서 그런 정서를 가지게 된 것 같다. 그건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결정돼 있다. 유년기에 가난하게 살아서 결식을 경험하고, 그게 분노가 되고. 살아가는 방식에 계속해서 자극을 줬다.

“시장 골목은 그 고장 사람들이 쌓아놓은 세월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박찬일 셰프는 말한다. 사진은 남대문시장의 식당 골목. ⓒ시사IN 신선영
“시장 골목은 그 고장 사람들이 쌓아놓은 세월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박찬일 셰프는 말한다. 사진은 남대문시장의 식당 골목. ⓒ시사IN 신선영

먹는 것도 사람을 만들지만, 먹지 못하는 것도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절반은 결핍의 이야기이다. 나머지 절반은 먹은 음식을 둘러싼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는 왜 밥을 먹을 때 슬픔을 떠올리게 되는가에 대한 한 인간의 고민이 담겨 있다. 눈칫밥, 친구들과 먹었던 허접한 밥, 군대에서 먹었던 강요된 밥, 간도 쓸개도 두고 벌어와 새끼들 먹이는 밥 등등. 밥의 상징이 굉장히 깊으니까.

그냥 회상할 때보다 음식을 매개로 기억을 떠올리면 장면이 더욱 선명해진다.

음식에 관한 글을 그동안 많이 썼다. 사회적인 면을 짚기도 했고, 파스타나 와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런 얘기는 다 배제돼 있다. 짜장면의 면발이 어떠니 그런 것 다 빼고 짜장면이 갖는 감성적 측면, 그때 이 한 그릇이 내게 무엇이었는지 그 기억을 썼다. ‘누구보다 만두에 진심인 사람이 있었다’에 만두에 관해 썼지만 재료가 어떻고 그런 말은 일절 없다. 오직 ‘찐씨 아저씨’의 무허가 인생에 대해서 글로 남기고 싶었다.

눅진한 사람 얘기인데 맛깔나게 읽힌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보인다면, 아까 얘기를 다시 끄집어내게 되는데, 오래 생각을 해서 그렇다. 죽은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된 친구를 계속 생각하면서 ‘왜 걔랑 한 번 더 만나서 소주를 못 먹었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 대상을 소환해서 풀어낼 때 내가 개입을 많이 하게 된다. 파스타 얘기를 하더라도 ‘이렇게 저렇게 치대서 이런 맛을 냈다’가 아니라 파스타를 준비할 때를 상기하면서 그때 밀가루의 밀도나 내 손에 닿는 감촉, 이런 걸 쓴다. 그러면 사람들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다. 평범하지 않으니까.

조지 오웰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단호함이 별로 없다. 감정의 분출이 있고, 연민이 있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보면 국제의용군에 참여하는 거창한 포부가 아니라, 끊임없이 후회하고 빈정거리고 분노하는 오웰이 나온다. 의용군의 수기로 적합하지 않다. 너덜너덜한 생각들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본캐’는 요리사이지만 작가도 정체성의 큰 부분일 것 같다.

기자를 그만두면서 그런 것도 다 버리려고 했다. 그 일이 주는 궁색함과 고통이 너무 싫어서. 내가 일찍 죽으면 다 글 쓸 때 생긴 병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섭외는 안 되지. 기껏 섭외했어. 그러면 누가 마감이라도 해주나. 글도 써야 하는데 또 잘 써야 하지. 옛날 어른들 말로 ‘옘병’이다.

쇠락하는 상권이나 전통시장 구석에 “반쯤 없는 듯 있는 듯한” 보석 같은 식당들을 눈 밝게 찾아낸다. 비법이 있나?

‘대포’라고 쓰여 있으면 끝내주는 집이다. 그런 상호가 붙어 있으면 들어간다. 요새 대폿집, 왕대폿집 자체가 거의 없다. 요리사들은 점심 장사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니 첫 식사가 보통 오후 3시다. 먹는 시간이 다르니까 자동으로 혼밥이 된다. 낮 3시쯤에 혼밥하고 막걸리도 한잔 할 때가 있는데 요즘은 브레이크 타임이 생겨서 그런 식당이 점점 드물어진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하는 대폿집, 백반집, 그런 곳은 대개 브레이크 타임이 없다. 그분들은 열어두면 계속 장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당은 7~8개 나오는 반찬이 다 맛있는 안주거리다. 막걸리 한잔 마시면서 이런 거 저런 거 물어보곤 한다.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서 메뉴판을 보고 있는 박찬일 셰프. ⓒ시사IN 신선영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서 메뉴판을 보고 있는 박찬일 셰프. ⓒ시사IN 신선영

글에 등장하는 ‘주천집’의 주소를 물어보는 메일이 〈시사IN〉 편집국으로 오기도 했다. 강원 영월경찰서 주천파출소에서 보냈다. 지역 민원인이 위치를 알고 싶어 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식당의 실제 이름은 주천집이 아니다. 내가 그냥 ‘술이 샘솟는 집(酒川)’이라고 상상해서 썼는데 영월에 주천면이 있는 줄 몰랐다. 강원도의 다른 지역에 있는 대폿집이다. 오해를 살까 봐 책에 실을 때는 ‘술천지’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메일을 보낸 경위님에게 이 인터뷰를 빌려서 답을 드린다. 미안하게 됐다. 그 가게의 사연이 곡진하다. 할머니나 자손들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상호명을 밝히지 못했다. 글을 쓰려고 취재를 간 곳이 아니었다. 역마살이 있어서 혼자 많이 돌아다닌다. 요리의 영감을 얻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때도 지방의 시장을 찾았는데 ‘대포’라고 쓰여 있는 허름한 식당이 보여서 들어갔다. 낮술 한잔 하면서 잠깐 얘기하는데 어마어마한 삶의 내공이 그 안에 있을 줄은 몰랐지.

“내가 벽돌을 마흔 장씩 졌어. 많이 져야 돈도 많이 받아. 그걸로 애기들 먹이고 다 했지. 이 가게에서 애기들이 학교 다녔어. 요기 2층 다락방이야. 아침에 밥 먹이면 여기서 씻고 학교 갔지. 옛날엔 온갖 음식을 이 좁은 데서 다 했으니까 수도도 있고 그랬지. 이 동네 ○○병원, ○○아파트, ○○호텔도 내가 지었어. 15층까지 곰방이야(‘소금 안주에 마시는 인생 마지막 술’ 중).”

요맘때면 그리운 음식, 덩달아 그리운 사람이 있을까?

짜장면을 같이 먹던 죽은 그 친구는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우리보다 한 살이 많았다. 군대를 일찍 갔다. 1984년 2월9일. 딱 지금이네. 강원도에 눈이 펄펄 날리는데 면회를 가서는 돌아올 차비까지 술 마시다가 다 써버렸다. 그래서 노숙을 하게 생겼는데 그때 근처 다방에서 불쌍하다며 컵라면을 하나 줬다. 그 컵라면 생각이 난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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