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차기 총리로 확실시되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의 ‘나의 정치철학’이라는 장문의 글을 읽으며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눈에 익숙했던 일본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유전형질이 느껴졌습니다. 일본의 정치인 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미지였습니다. 한쪽 발은 과거에 걸쳐놓고 한쪽 발은 태평양 건너 워싱턴에 걸쳐놓은 기형적인 모습. 그래서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늘 받곤 했습니다. 경제대국 일본이 두렵지 않게 느껴졌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으며 이제 일본에도 남의 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국정 시나리오를 쓰고자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남문희 편집국장
물론 그의 미래가 밝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칫하면 1993년의 호소카와 총리와 같은 단명 총리로 끝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운명과는 별개로 그가 뿌릴 씨앗은 남아 새로운 일본의 토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정치철학의 핵심으로 삼는 ‘우애론’의 토대가 그리 약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우애론이 자민당을 창당한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에서 비롯했다고 밝힙니다. 하토야마 이치로의 우애론은 1923년 〈범유럽〉이라는 저서를 통해 EU 통합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쿠덴호프 칼레르기의 저서에서 비롯했습니다. 칼레르기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정신 중 자유와 평등이 근본주의에 빠질 때 각각 인간의 삶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그 균형을 잡는 개념으로 박애(우애)를 선택합니다. 칼레르기의 박애 정신이 바로 오늘날 EU 통합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토야마는 바로 이 우애의 정신을 오늘날 일본이 처한 국내외 문제 해결의 처방전으로 삼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시장근본주의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일본 사회를 구원하며, 중앙정부와 지방분권·지역 주권국가 간 관계를 규율하고, 나아가서는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일본의 생존이 달린 동아시아 공동체 추진을 위한 기본 개념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칼레르기에게서 유럽통합 개념으로 사용된 박애가 하토야마에게서 우애로 바뀌어 동아시아 통합의 개념으로 되살아나는 구조인 것입니다.

일본을 보며 다시 한번 바깥 세상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바깥은 바야흐로 포스트 신자유주의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자본 중심 사회를 대체할 인본주의·사람 중심의 철학을 누가 끌고 가느냐 하는 문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기자명 남문희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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