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30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거둔 압승은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일본 신자유주의 변혁’의 실패가 표면화된 사건이다. 이 변혁을 주도한 자민당, 그리고 미국에 대한 일본 서민의 반란이기도 하다.

미국은 적어도 일본에 대해서는 ‘자식을 집어 삼키는 크로노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폐허로 전락한 일본 자본주의에 제도적 틀과 자금, 기술을 지원해서 발전시킨 것은 미국이다. 그러나 최전성기를 누리는 ‘자식(일본)’을 습격해서 수십년 동안 기를 못 펴게 만든 것도 미국이다. 때는 1980년대 중반, 바야흐로 “도쿄 특별구의 땅값이라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 “드디어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았다”라는 일본 자본주의 찬가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지던 시기다.
 

하토야마 일본 민주당 대표(사진)가 8월30일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오른쪽 위는 참패한 자민당의 아소 총리.

당시 일본은 전 세계의 좌·우파를 감동시킨 나라이기도 했다. 우파는 일본 기업의 경쟁력에 감탄했다. 좌파는 종신고용으로 상징되는 안정적 노사관계에도 불구하고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는 일본 경제에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찬사를 보냈다. 노·사·정이 협력해서 고도성장과 높은 수준의 복지를 성취한 ‘제조업 대국’ 일본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파국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엄습했다.

문제는 1984년에만 1300억 달러에 이르렀던 미국의 무역적자였다. 이 중 30%가 대일 적자였다. 미국 민·관은 이를 빌미로 대일 무역전쟁을 선포하고 일본 시장개방을 강제했다. 그래도 미국의 무역적자가 줄지 않자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자는 것이었다. 이 경우, 미국에서 팔리는 일본 제품 값은 오르고, 일본에서 팔리는 미국 제품 값은 떨어진다. 1985년 9월, 엔화 절상 등이 미국·일본·서독·이탈리아·프랑스 정상 간에 합의된다. ‘플라자 합의’로 불린다.

엔화 가치는 급속하게 올라 1985년 9월 1달러당 240엔이었던 것이 다음 해 9월에는 140엔이 된다. 사실 세계대전 전이었다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폭거였다. 그러나 일본 경제에 더욱 치명적인 조처는 1년 뒤인 1986년 9월의 루브르 합의. 플라자 합의 덕분에 달러 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지자, 미국 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금리 인하를 요구한 것이다. 보통 금리를 내리면 해당 통화의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일본의 금리가 인하되면 투자 목적의 엔화 매입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엔화가 절하되는 대신 달러화는 반사적으로 절상된다. 루브루 합의에 따라 일본은 1986년 12월부터 두 차례에 걸쳐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수준인 2.5%까지 금리를 내린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사실상 0%였다. 이렇게 금리가 내리자 경기가 과열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금리 인상으로 경기를 안정화하는 전통적인 처방을 실시할 수 없었다. 엔화 인상에 따른 달러화 절하를 우려한 미국 정부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7년 하반기, 독일 정부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올렸고 이는 달러화 및 미국 주식의 투매로 이어지면서 10월19일의 블랙 먼데이(다우지수가 하루 동안 22.6% 하락)로 귀결되었다.

결국 일본은 엔저(낮은 가치의 엔화)와 저금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일본 정부가 금리를 올리고 이에 따라 엔화가 절상되면 또 하나의 블랙 먼데이가 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계 경제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일본이 이자율을 실질금리 0%인 상태로 유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또한 일본이 저금리를 유지하는 한 호경기도 계속될 것으로 ‘상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기업들은 엔고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출실적을 계속 기록했고, 이에 따른 무역잉여는 일본 내 자산시장에 투입되어 주식·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1990년 초, 일부 금융기관이 이런 상황이 영원할 수는 없다고 내다보면서 금리를 올렸다. 이는 자산시장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자본주의 사상 유례없는 장기 디플레이션으로 귀결되었다. 불과 6개월여 동안 일본의 부동산 시세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결국 일본이 미국의 무역·통화 정책에 휘둘린 것이 버블 발생과 붕괴, 장기 디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 미국은 1995년 일본의 디플레이션을 진정시킨다는 명분 아래 달러화 가치를 엔화에 대해 높여 엔고 시대를 끝냈다. 미국은 1990년대 최고의 호황을 누렸지만 일본 경제는 개선되지 않았다.

고이즈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990년대 초반, 디플레이션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안은 재정적자를 늘려 공공투자, 즉 도로와 다리와 댐을 막무가내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여기 들어가는 자금은 국채로 조달되었다. 이로 인해 2009년 현재 일본의 국가부채는 GDP의 217%인 860조 엔에 이른다.

이런 공공투자와 함께 일본의 사회·경제적 구조개혁도 미국의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양자 협상을 통해 조세, 노동, 예산, 금융 시스템 등 일본의 ‘불공정한’ 제도를 뜯어 고치라고 강압했다. 1993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당시 일본 미야자와 총리와 일본 금융 시스템 개혁에 대한 협상을 진행한다. 일본 기업에 안정적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 시스템은 일종의 무역장벽이므로 미국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당장 해체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 배석한 우정통신 장관이 바로 고이즈미 전 총리다. 고이즈미는 당시부터 이미 미국의 입장(일본의 근본적 구조개혁)을 전면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2001년 총리가 됨으로써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

고이즈미의 노선은 일본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미국식으로 전복하는 것이었다. 고이즈미는 취임 직후부터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구조개혁을 논의하게 되는데 ‘우정국 민영화’를 강력히 요구받는다. 2004년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의 로버트 죌릭 대표는 다케나카 대장상에게 우정공사 민영화를 돕겠다는 친필 편지를 보내 내정간섭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미국을 방문한 고이즈미는 우정국 민영화에 대한 부시의 관심을 전달받자 이렇게 답변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국이 일본 우정국의 개혁을 이토록 끈덕지게 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01년 4월26일 국회에서 총리 취임 인사를 하는 고이즈미(왼쪽 사진 가운데). 일본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미국식으로 전복한 고이즈미 노선은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2005년 9월11일,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이끄는 연립 여당(자민+공명)은 전체 480석의 3분의 2를 넘는 326석을 거둬들인다.(자민당 296석, 공명당 30석). 이때 총선의 중심 의제가 바로 ‘우정국 민영화’였다.

일본 우정국은 한국의 우체국과 많이 다르다. 우정국은 일본 전국에 2만5000여 지국을 거느린 우편배달 시스템일 뿐 아니라 이 나라 최대의 저축·보험 기관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정국에 축적된 자금 규모다. 2005년 당시 일본 우정국은 산하의 저축기관이 200조 엔, 보험기관이 100조 엔 정도를 관리하고 있었다. 미화로는 3조3000억 달러, 원화로는 3300조원 규모로 일본 민간 자금의 6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009년 현재 세계 최대 금융기관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운용하는 고객자산 규모가 1조5000억 달러, 전 세계 은행과 투자업체들이 관리하는 자산이 14조5000억 달러라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 우정국은 단일 기관으로는 세계 최대 자금창구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정국 민영화는 단지 ‘우체국 기능이 사기업에 넘어가 산골 주민들은 우편배달 등의 공적 서비스를 받지 못할까 우려된다’ 수준의 사건이 아니었다. 결국 우정국 민영화의 핵심은 이 같은 거대한 자금의 운영 및 배분 권한이 ‘일본 국가’에서 ‘세계 금융시장’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이 우정국 민영화를 원했던 이유다.

우정국 민영화는 일본 시스템의 혁명

일본 우정국은 이른바 ‘일본 토건국가 시스템’의 중심 기구였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일본 시민은 1% 이하의 초저금리인데도 저축이나 보험 형태로 우정국에 돈을 맡긴다. 우정국은 이 자금으로 일본 국채를 매입한다. 일본 정부는 국채를 매각한 자금(결국 서민에게 빌린 돈)으로 고속도로·공항·다리·댐 등 사회간접자본을 지나칠 정도의 수준으로 건설했다. 이는 돈을 거리에 뿌려서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행위였다. 1990년대의 디플레이션 시기 우정국을 중심으로 한 자금흐름은 일본의 경기를 그나마 살리면서 소자영업이나 중소기업에 흘러들어가 사회계층 간, 지역 간 재분배 역할을 했다. 일종의 일본판 케인스주의였다. 결국 우정국 민영화는 일본 정부가 국내 경기를 떠받치기 위해 ‘계획적’으로 배분하던 ‘자금의 풀(pool)’을 세계금융시장의 질서에 맡기기 위해 시도된 개혁이었다.
 

위는 플라자 합의 당시 나카소네 총리(왼쪽)와 레이건 대통령.

우정국 민영화는 일본 국가가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사용하는 방식을 시장 규율에 종속시키기 위한 개혁이기도 했다. 예컨대 민영화된 우정국은 안정적인 국채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좇아갈 것이기 때문에 일본 국채를 이전 같은 규모로 사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국채의 주요 매입자는 해외 투자자가 될 것인데 이들은 국채로 조달한 돈을 케인스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부정부패와 낭비, 정경유착을 초래하긴 했으되 우정국 자금은 일본 국내용 자금으로 사용되어 불황에 시달리는 서민 경제를 지탱해왔다. 이런 우정국의 민영화가 본격 추진될 경우 실업난과 빈부격차가 더욱 격심해질 것이며, 재정·채권시장·환율·금리 등의 거시경제 변수들이 일대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토야마 민주당 대표가 공언하는 우정국 민영화의 철회는, 이런 의미에서 ‘일본 신자유주의 변혁을 중단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우정국 민영화는 취업난·빈부격차 등 서민 피해가 있더라도, 전후 55년을 지배해온 일본의 국가 질서를 일거에 뒤엎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정국 민영화의 철회는 고이즈미가 본격화한 국가 발전 노선을 폐기하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하토야마는 일본을 어디로 끌고 나가겠다는 것일까. 일본 민주당의 공약과 하토야마가 지난 8월27일 헤럴드 트리뷴에 게재한 ‘일본의 새로운 길’을 참조하면,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하토야마가 일단 표명하고 있는 자료로 볼 때는 신자유주의에 매우 저항적이다. 그는 ‘일본의 새로운 길’에서 “일본은 계속해서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근본주의라는 풍파에 시달려왔다”라고 감히 말한다. 그러면서 당면한 문제로 “시장근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종식시키고 서민의 생계와 재정을 보호하는 것”을 제시한다. 또한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무시되었던 “비경제적 가치에 관심을 집중시키자”라며 ‘복지와 보건체계’ ‘교육과 보육 지원’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는 정책들’을 발전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공동체와 지역통화 체제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불투명하게나마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무료 배식을 받는 일본 노숙자들.

물론 하토야마의 구상이 실현된다면, 일본은 과거와 다른 국가가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은 대표적인 수출주도형 국가였다. 그러나 하토야마의 공약은 이후 일본이 내수 주도형 국가로 변신할 것을 시사한다. 일본이 내수 주도형 국가가 된다면 가장 중대한 변화는 엔화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엔화 가치가 높아야 수입품의 가격 하락으로 소비자 후생이 커지고 내수 주도 정책이 가능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수출기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형성되어 있는 정치-경제-금융의 부정부패 네트워크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엔고가 지속적인 현상이 되면 동아시아를 비롯한 이머징 마켓은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대일 무역흑자’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무역수지는 흑자 폭이 감소하거나 심지어 적자로 돌아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엔고에 기반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머징 마켓에 대한 자본수출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하토야마가 말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나 지역통화 체제 주장을 뜯어보면, 어쩌면 일본 민주당의 대안은 ‘아시아의 미국’일 수 있다. 미국이 전 세계의 소비재를 흡수하는 대신 기축통화를 공급한다면, 일본도 아시아의 소비재를 흡수하는 대신 엔화를 다른 아시아 국가에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아시아 협력 구조를 염두에 두고 동아시아 공동체나 지역통화 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마침,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저축률이 높아지면서 엔화가 절상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이 같은 구실을 담당하려면 금융시장을 더 개방하고, 금융산업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토야마의 동아시아 구상과 우정국 민영화 철회는 상충하는 계획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토야마의 유토피안 드림

이번 선거의 압승으로 민주당은 일단 강한 추진력을 갖게 될 것이다. 더욱이 7월이 일본의 경기 저점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도 늘어나고 있다. 취업률·가계지출 따위 통계수치도 일단 청신호를 보인다. 더욱이 지구경제도 호황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어서 수출 주도적인 일본 경제에는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일본 패전 60주년을 맞은 8월15일 일본 우익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장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너무 많은 약속을 했다. 소비세 인상을 연기할 뿐 아니라 최저임금도 40% 인상하고, 유류세와 고속도로 요금을 대폭 낮추거나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런 부문에 투입할 자금의 조달 방법이 너무 불투명한 데다 경제운영 경험의 부족이 민주당을 믿을 수 없는 이유로 거론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대비되는 대안적 발전노선을 마련하겠다는 하토야마 대표의 발상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한국 정치세력들에게도 주요한 벤치마킹 대상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위대한 이념은 유토피안 드림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현실로 끝을 맺는다. 어떤 이념이 유토피아적 꿈으로 남느냐 현실이 되느냐는 그 이상을 믿는 사람들의 수와 그를 실행하는 사람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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