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나 정부의 밑바닥에 흐르는 대북 인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김영삼 정부 시대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체제 붕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망해가는 정권과 관계를 갖기보다는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부에서는 김 대통령이 ‘통일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장밋빛 환상에 젖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말 이명박 대통령이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다’라고 말한 밑바탕에도,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및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북한이 1994년과 같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청와대 주변 브레인들의 대북 진단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때의 ‘통일 대통령론’이 북한 체제의 내구력을 무시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이번의 신위기론 역시 지나치게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한 예로 지난해 북한 경제는 +5%에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고, 대외무역 총액도 1990년대 초 수준을 능가하는 등 상승세를 탔습니다.
지난 4월 말 있었던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 2주 후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 집무를 시작하면서 김 위원장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도 급속도로 사그라졌습니다. 김 위원장이 클린턴 전 대통령을 초청한 것도 바로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급변사태 대책으로 기울려던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정상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94년 통일 대통령을 꿈꾸던 김영삼 정부는 미국이 10월에 북한과 제네바 회담을 타결해버리자 패닉에 빠졌습니다. 통일 대통령은커녕 통미봉남의 5년을 견뎌야 했습니다. 요즘 미국 정보 당국자들은 한국의 전문가를 워싱턴에 불러 ‘미국은 북한의 WMD 외에는 관심 없다. 한국이 손 놓고 있으면 앞으로 북한에 대한 통제는 중국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말들을 흘린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얘기겠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흡수통일이든 합의통일이든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건 더 이상 전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