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일 밤,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피치(Fitch)가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의 신용등급을 종전의 AAA(최고 등급)에서 AA+로 한 단계 내렸다. 그러나 시장은 의외로 평온한 편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신용평가사 피치의 사무실 ⓒEPA
미국 뉴욕에 있는 신용평가사 피치의 사무실.ⓒEPA

국가 신용등급이란? 개인의 신용등급이 의미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 역시 빌린 돈을 상환하지 않을 가능성이 낮다(채무상환 능력이 높다)고 평가될수록 높은 신용등급을 받는다. 피치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은, ‘미국 정부가 돈을 빌렸을 때 이를 돌려주지 못할 가능성이 좀 높아진 것’으로, 이 신용평가사가 내다본다는 의미다.

국가는 돈을 빌릴 때 주로 국채를 발행한다. 국채가 발행될 때 100달러로 산다면, 이는 해당 국가(정부)에 100달러를 빌려준다는 뜻이다. 만기일에 국채를 제시하면 원금(100달러)과 이자를 돌려받게 된다. 국가의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발행한 국채의 신용등급이기도 하다.

미국 국채(재무부 채권)는 특별하다 세계의 모든 나라 정부들은 국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이 가운데서도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는 대단히 특별하다. 글로벌 최대 경제대국이자 패권국가인 미국만큼 믿을 만한 채무자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모든 채무자들(개인, 기업, 국가) 가운데서 미국은 빌린 돈을 상환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낮은 채무자로 간주된다. 이는 미국 채권보다 더 안전한 증권(혹은 예금)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나라 정부나 기업들 역시 자산 중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로 보유한다. 수많은 금융 포트폴리오가 미국 국채를 포함하고 있다. 어떤 금융상품의 수익률이 만족할 만한지 아닌지 따질 때도 미국 국채의 수익률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금융자산의 세계에서 미국 국채는 단지 한 종류의 상품이 아니라 그 세계를 떠받치는 머릿돌과 같다.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이 내려갔다는 것은 글로벌 차원에서 거래되는 셀 수 없이 많은 금융자산들의 가치가 요동칠 수 있다는 뜻이다.

피치가 미국 신용등급을 내린 이유는? “앞으로 3년 동안 미국의 재정 건전성이 악화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일반정부부채(general government debt burden,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비영리 공공기관 등의 부채를 합산) 역시 이미 높은 수준인 데다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피치에 따르면 미국의 ‘GDP 대비 일반정부 적자’는 2022년의 3.7%에서 2023년엔 6.3%로 상승하게 된다.

그런데 피치는 이런 ‘순수 경제’적 문제 이외에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중대한 이유를 발견했다. ‘거버넌스의 부식(erosion of governance)’이다. ‘거버넌스’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탓에 아무렇게나 남용되는 용어다. 피치의 문맥에서는 ‘국가 운영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피치는 ‘미국의 국가 운영 시스템이 서서히 썩어 문드러지고 있(erosion, 부식)’으며, 이에 따라 ‘앞으로 국가부채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나라로 전락할 수 있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피치는 최근 사례에서 판단의 근거를 찾았다. 미국 ‘국가부채 한도’를 둘러싼 민주당과 공화당의 당파싸움이다.

국가부채 한도 문제 미국 정부의 살림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구조다.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해 확정되더라도 이를 집행하려면 행정부가 국채 발행으로 돈을 빌려야 한다. 다만 행정부가 독단으로 국채를 발행하게 놔두면 국가부채가 천정부지로 늘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의회가 백악관과 협의해서 ‘빌릴 수 있는 돈의 한도’, 즉 부채한도를 결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정부지출과 이를 충당하기 위해 빌려야 하는 돈(국가부채)의 규모는 역사적으로 계속 증가해 왔다. 부채한도 역시 계속 상향되었다. 다행히 미국 행정부는 이 문제에서만큼은 의회의 협력을 어렵잖게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부가 부채한도에 묶여 돈을 빌리지 못하고, 이에 따라 미국 내나 해외의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지 못하면 국가부도 사태가 터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대전 이후 최근까지 미국의 국가부채 한도는 100여 회에 걸쳐 상향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부채한도 상향’ 이슈마저 당파싸움의 자장 내로 끌려 들어간다. 주로 공화당이 ‘부채한도 상향’을 빌미로 민주당의 정치적 굴복을 요구하다가 국가부도 발생 예상일을 며칠 앞두고 아슬아슬하게 협력해주는 식이다.

지난 5월23일, 케빈 매카시 미 하원의장이 부채한도 상향 협상을 벌이기 위해 백악관 측과 만나기 직전 국회의사당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REUTERS
지난 5월23일, 케빈 매카시 미 하원의장이 부채한도 상향 협상을 벌이기 위해 백악관 측과 만나기 직전 국회의사당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REUTERS

지난 6월엔 부도 예상일을 불과 3일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와 공화당이 협상을 타결시켰다. 2011년엔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와 공화당이 부채한도 상향을 둘러싸고 국가부도 이틀 전까지 줄다리기를 벌였다.

피치는 “부채한도 문제와 관련된 (양당간) 교착 상태가 반복되다가 국가부도 직전에 타결되곤 하는” 현상에서 미국 ‘거버넌스의 부식’을 읽어냈다. ‘모두가 파멸하는 국가부도를 걸고 당파싸움이나 벌이는 식의 정치 행태를 보면 이 나라가 빚을 잘 갚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난 2011년 국가부도 위기 당시엔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S&P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한 바 있다. 피치는 지난 2021년 1월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사건도 '거버넌스 부식'의 한 사례로 본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에 대한 시장의 반응 미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된 다음날(8월2일), S&P500 지수는 약 1.4%, 나스닥 지수는 2.17%, 다우존스 지수는 1% 하락했다. 미국 국채 가격도 2023년 들어 최고 폭으로 떨어졌다. 같은 날, 유럽과 아시아의 증시들도 1~2% 가량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

피치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한 다음날인 8월2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트레이더들이 금융시장 추이를 모니터하고 있다. 이날 다우존스 지수는 1% 하락했다. ⓒAFP PHOTO
피치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한 다음날인 8월2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트레이더들이 금융시장 추이를 모니터하고 있다. 이날 다우존스 지수는 1% 하락했다. ⓒAFP PHOTO

그러나 이런 금융시장의 하락 폭은, S&P가 2011년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했을 때와 비교하면 매우 완만한 편이다(당시 S&P500 지수는 6% 이상 떨어졌다). 미국 국채 시장과 외환시장도 당시에 비해서는 훨씬 안정적이다. 미국 국채의 리스크를 사고파는 신용부도스왑(CDS)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시장은 피치의 결정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장이 안정을 유지한 까닭? 무엇보다 미국 국채가 매우 특별한 증권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AAA 등급의 증권이라면, 신용등급이 하락했을 때 팔아치우는 것이 당연하다. 그랬다면 미국 국채 가격이 폭락하고, 앞으로 미국 정부는 돈을 빌릴 때 이전보다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한다. 이는 글로벌 금융시장 전반을 격동 속에 몰아넣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가 미국 국채에선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 국채의 뒤엔 글로벌 패권국이자 경제 대국인 미국 정부가 있다. 그만큼 미국 국채는 안전한 증권이다. 안전성 측면에서 다른 나라나 기업의 AAA 등급 증권은 미국 국채와 비교할 수 없다. 상당수 국가의 중앙은행이나 금융기관들이 자산의 일정 비율을 미국 국채로 보유하도록 의무화되어 있는 이유다. 미국의 금융기관 ‘아카데미 증권’의 거시 전략 책임자인 피터 치르(Peter Tchir)는 〈파이낸셜타임스〉(8월3일)에 “미국 국채를 단지 신용등급 때문에 매입하는 사람은 없다”라며, 피치의 결정은 미국 국채 수익률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이벤트라고 말했다.

시장이 그런대로 안정된 이유가 또 하나 있다면 최근 미국 경제가 너무 강건해 보이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은 낮아지는데 경제성장률이 예상치를 웃돌고, 최근엔 7월 민간 기업 고용이 전달 대비 32만4000개나 증가했다는 통계가 나와 시장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미국 종합금융기업 JP모건 체이스의 최고경영자 제이미 다이먼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의 강점을 언급하며, 피치의 결정은 “말이 안 되는” 데다 “중요하지도 않다”라고 주장했다.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미국 경제가 예상보다 강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피치는 기이하고 무능한 결정을 내렸다”라고 X(트위터)에 썼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8월2일 미국 국세청 관련 단체에서 가진 연설에서 “피치의 결정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즉 미국 국채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유동적인 자산이며 미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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