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흥행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 〈오펜하이머〉가 인도에서 종교적 논란에 휩싸였다. 미국 CNN(7월24일)에 따르면, 인도의 힌두교 근본주의 세력들은 영화의 한 장면이 힌두교를 모독했다며 불매운동을 촉구하는 한편 해당 장면의 삭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을 주도했으나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된 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던 미국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힌두 근본주의자들이 문제로 삼은 장면에서, 오펜하이머로 분한 배우 킬리언 머피는 성관계 중 연인으로부터 바가바드 기타(힌두교의 성전)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낭독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다.”

1957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강의 중인 오펜하이머 ⓒAP Photo
1957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강의 중인 오펜하이머.ⓒAP Photo

영화 속 대사를 문제 삼아 해당 장면 삭제 요구

CNN에 따르면, 인도의 여당이며 힌두 근본주의 정당인 인도인민당(BJP)의 한 정치인은 〈오펜하이머〉를 “힌두교에 대한 불온한 공격”이며 “반(反)힌두 세력이 펼치는 거대한 음모의 일부”라고 말했다. 여기서 ‘반힌두 세력’의 맥락은 한국에서 ‘종북 주사파’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도 정보위원회 우데이 마후르카르(Uday Mahurkar) 위원은 지난 7월22일 낸 성명서에서 〈오펜하이머〉가 “힌두 공동체에 대해 전쟁을 벌인 것”이라며 해당 장면을 “삭제하라”고 요청했다.

힌두교 우파가 영화, TV, 광고 등에 등장하는 힌두교 관련 묘사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보이콧하거나 심지어 강제 하차시키는 사례가 번번이 발생하고 있다고, CNN은 보도했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수터블 보이(Suitable Boy)〉는 힌두교 여성과 무슬림 남성 사이의 키스 묘사로 된서리를 맞았다. 보석 브랜드 타니시크(Tanishq)는 힌두교 여성이 무슬림 시부모의 임신 축하를 받는 광고를 제작했다가 힌두 측의 격렬한 반발로 철회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무슬림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영화들은 힌두 측의 전적인 지지를 받는다. 1990년대 ‘카슈미르 분쟁’을 소재로 폭력적 무슬림 무장세력에 대한 힌두교도들의 저항을 그린 〈카슈미르 파일〉, ISIS에 가담하라고 유인되는 힌두교 소녀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케랄라 스토리〉 등이 흥행했다.

오펜하이머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원자폭탄이 사용된 뒤 “세상이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몇몇은 웃고, 몇몇은 울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했다”라며 바그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상기시킨 바 있었다.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다.” 영화에 나오는 그 대사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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