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이탈리아 전 총리가 6월12일 밀라노의 한 병원에서 86세로 사망했다. 그는 지난 4월부터 백혈병 증상으로 치료받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무수한 성적 스캔들을 비롯한 비리 혐의들로 시달리면서도 네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맡았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무솔리니 이후 최장수 총리다. 그는 이 나라의 정치뿐 아니라 언론, 문화, 스포츠 등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영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극히 드물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 시절엔 연예 활동과 청소기 판매 등을 하며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다. 그의 자질은 건설업에 뛰어들면서 빛을 발했다. 건설업으로 부를 쌓은 베를루스코니는 이후 TV 방송국, 출판, 광고 대행 등 광범위한 언론 비즈니스 제국을 건설하며 이탈리아 최고 부호 중 한 사람이 된다. 1986년엔 파산 직전이었던 축구단 AC 밀란을 인수하며 국제적 명사로 떠올랐다.

2008년 2월12일, 이탈리아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AFP PHOTO
2008년 2월12일, 이탈리아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AFP PHOTO

1994년 베를루스코니는 중도 우파 성향인 ‘포르자 이탈리아’를 창당하며 정계에 뛰어들어 201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한다. 한 번도 연임하진 못했지만, 비즈니스적 감각과 거침없는 언변(망언)이 오히려 대중의 환호를 불러일으키며 이탈리아 정치 체제가 질곡에 처할 때마다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경제를 망치고 법률을 우습게 본다고 질타해 왔다. 실제로 그는 정치적 스타로 떠오른 내내 뇌물, 탈세, 마피아와 협력, 미성년에 대한 성 착취 등 수많은 법적 문제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되거나 심지어 그가 주도하는 정부의 법률 개정으로 무죄를 선고받으며 감옥행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는 것에서 환희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각지의 별장들을 르네상스 시대의 궁전이나 테마파크처럼 화려하게 꾸몄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그는 이 별장들에 정기적으로 여성들을 불러들여 난잡한 파티를 벌이고 현금 봉투와 선물을 제공했다.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베를루스코니는 ‘극우’로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중도 우파 성향의 정치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 극우세력이 대체로 ‘반(反) EU’를 표방하는 것과 달리 그는 서유럽이나 EU 집행부와의 친밀성을 과시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극우세력과 연대하면서 그들의 주류 정치권 진입을 결정적으로 도왔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극우’로 불리는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베를루스코니 정부에서 청년부 장관을 지내며 자신의 인지도를 높였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몰락은 유로존 부채위기 당시 보여준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2011년 11월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정계를 은퇴한다(2013년 하원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해서 당선되긴 한다). 그가 이탈리아를 이끈 17년 동안 이 나라의 경제성장이 크게 지체되었다는 것도 베를루스코니의 실각을 정당화하는 이유였다. 그 무렵 영국 유력 매체인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가리켜 ‘나라 전체를 말아먹은 사람(The man who screwed an entire country)’이라고 불렀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베를루스코니의 사망 직후 영상 메시지에서 “그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라며 “베를루스코니로부터 이탈리아는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포기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개성과 충동, 욕망을 제한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이탈리아 전체를 ‘말아먹’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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