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부조리극은 응급환자를 실은 앰뷸런스와 같다. 하지만 앰뷸런스가 응급환자를 싣고 길을 내기 위해 경광등을 켜고 달리는 이 상황만으로는 아직 부조리극이 완성된 게 아니다. 앰뷸런스가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했는데 흰 가운을 입고 나타난 의사가 코미디언이거나, 알코올의존자이거나, 습관적인 자살 기도자라야 부조리극이 완성된다. 이때 관객이 그 의사를 신의 은유로 판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부조리극이 된다.

소설가로 더 유명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70년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르 몽스트르〉(제철소, 2023)에는 부조리극 계열의 희곡 여덟 편이 실려 있다. 그중의 한 편 ‘전염병’의 막이 열리면 진찰실에서 혼자 술잔을 홀짝이던 50대 여의사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환자라는 게 도대체 뭐야? 귀찮은 것들이잖아. 아프지 말거나, 아프면 그냥 죽으면 되는 거야. 사람들을 돌봐준다고? 그들을 치료한다고? 무엇 때문에? 인간들이 너무 많아. (술을 마신다.) 의사란 건, 웃기는 거야! 편도염이나 고치는 데 쓸모가 있지. 하지만 편도염은 그냥 둬도 저절로 낫거든. (술을 마신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인 이 의사는 자신의 창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신과도 같다. 극의 중간쯤에서 이 의사는 자살을 하는데, 신의 죽음은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라는 듯이 극 중에 슬그머니 되살아난다.

〈르 몽스트르〉의 표제작 ‘괴물’은 마을 사람들이 쳐놓은 함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걸려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이 괴물은 어떤 방법으로도 죽일 수가 없다. 무대에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이 괴물은 점점 몸집이 커지며 마을을 점령하게 되고, 괴물이 커지는 것과 함께 마을 사람들은 괴물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아닌 ‘꽃향기’를 맡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을 경험한 망명 작가 크리스토프에게 괴물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상징한다. 무대 위의 오브제(objet)가 증식하면서 인간의 자리를 빼앗거나 위협하는 수법은 루마니아 출신의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특기다. 널리 알려진 〈코뿔소〉 〈의자〉 등의 작품에서 이오네스코는 무한 증식하는 오브제에 질식해가는 무력한 인간을 묘사했다.

〈광인과 수녀/ 쇠물닭/ 폭주기관차〉(워크룸 프레스, 2022)는 폴란드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며 화가인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의 전위적인 희곡 세 편을 묶었다. 1921년에 발표된 ‘쇠물닭’에는 두 차례에 걸쳐 ‘부조리극’이란 용어가 나온다. 63쪽에 나오는 “그건 심지어 부조리극에서도 금지돼 있으니까”, 128쪽에 나오는 “사람들이 요즘 쓰는 것과 같은 부조리한 작품들에서 말이지”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부조리극이란 용어는 연극평론가 마틴 에슬린이 1961년에 출간한 〈부조리극〉(한길사, 2005)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기 때문에, 저 표현을 번역자의 과욕으로 돌릴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61년에 만들어진 부조리극이란 용어는 ‘명명의 효과’가 만들어낸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무엘 베케트와 이오네스코는 서로 교류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1948년에 각자 그들의 첫 번째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와 〈대머리 여가수〉의 초고를 썼다. 이 일화는 그들의 작품이 부조리극이라고 명명되기 이전에,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부조리극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에 다다와 같은 무수한 전위연극 운동이 있었고, 그 연극들은 보란 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인과성을 위반했다.

비트키에비치의 희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부조리극이 전간기의 전위연극을 이어받았다는 좋은 증거다. 앞서 소개한 ‘전염병’에서도 자살했던 의사가 아무런 설명 없이 되살아난 것을 보았지만, 1917~1934년 사이 희곡에 열중했던 비트키에비치의 작품에서는 모든 주인공이 다 한 번씩 죽었다가 농담처럼 부활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폭주기관차’에 단서가 있다. “여기도 죽음, 저기도 죽음 – 이러면 미치는 거야!” 한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두 번째 세계대전을 겪게 될 전간기의 사람들에게 대량의 죽음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애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작가는 죽지 않는 인간으로 그 시대의 절망을 표현한 것이다.

“숨만 쉬는 거예요”

크리스토프와 비트키에비치는 문명의 진보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공유한다. 크리스토프의 ‘길’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안개 낀 도로가 무대의 전부이고 등장인물들은 모두 ‘앞으로 전진!’만을 외친다. 그들은 도로가에 버려진 폐차를 ‘피난처’ 삼아 휴식을 취하는데, 이 설정은 앞으로 전진만 가능한 현대인들에게 어울리는 아이러니다. 비트키에비치의 ‘폭주기관차’는 기관차의 운전석을 차지한 권태로운 범죄자들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기차와 충돌하여 자신들은 물론 승객을 모두 죽이는 이야기다. 주인공들이 일부는 다시 살아나지만, 그들의 생환은 오히려 께름칙하다.

두 작가에게 현대인은 집이 없는 인간이자 길 위의 인간이다. 반면 서준환의 〈죽음과 변용〉(문학실험실, 2018)에 실린 네 편의 연작 희곡에서는 엘리베이터, 외딴 오두막, 용도가 불명한 사무실이 무대다. 네 작품에서 여행이나 바깥은 항상 죽음과 관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애용하는 닫힌 공간이 집과 유사한 것도 아니다. 집이라면 외부로부터 몸과 마음이 보호되는 안전한 공간을 연상하게 되지만, 〈죽음과 변용〉에 나오는 닫힌 공간에서는 감금과 세뇌, 착취와 살인이 일어난다. 이 상황은 더 나쁘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 반복도 고유한 일회성을 갖고 있으며, 반복이 의미를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막보다 더 잘게 끊어진 장면으로만 이어져 있는 서준환의 작품에서는 막으로 구성된 작품보다 반복이 더 촘촘하게 일어난다. 순환적으로 나열되는 반복은 반복이 차이를 생산한다거나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는 논리에 물음표를 던진다. 이 희곡집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무엇에 중독되어 있거나,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다.

중독과 조종에 따라 행해지는 반복에는 의미가 깃들 수 없다. 그런 주인공들이 우리를 뜨끔하게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로 갔는가. 이 희곡들은 반복을 멈추는 순간 생존의 대열에서 낙후할 수밖에 없지만, 반복이 더 이상 차이나 의미와 연관되지 않는 오늘의 세계를 비춰준다. 이 희곡집의 마지막 작품에서 작가를 대신해 주인공들이 이렇게 말한다. “차이도 지워지고 말았어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숨만 쉬는 거예요.”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