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대 8. 얼마 전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가 빈털터리 외교에 불과했다며 낙담한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는 ‘게임 스코어’다. 미국 대통령실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은 한국 대통령의 이번 국빈 방문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지난 2년여 동안, 한국 기업은 1000억 달러(약 133조원) 이상을 미국에 투자했다.” 반면, 뻥튀기 논란 속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방미에서 거둔 성과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에 대한 59억 달러(약 8조원) 규모의 미국 기업 투자 유치를 꼽았다. 가뜩이나 윤 대통령의 내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겐 “133조를 퍼주고 8조만 받아왔다”는 식의 탐탁지 않은 이유 하나가 추가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25일(현지 시각)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누바르 아페얀 모더나 이사회 의장(왼쪽),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공동취재

세상의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할지, 한국에 투자할지를 어떻게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의 선진국이 된 한국의 기업들은 상품만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직접투자 등을 통해 자본도 수출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의 한국 대통령은 더 이상 자본을 통제하며 ‘중화학산업 육성’을 위해 100억 달러 규모의 위험한 투자를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1973년의 박정희가 될 수 없다. 다만 법인세를 깎아주든, 세금 감면 혜택을 주든, 보조금을 주든, 싼값에 땅을 빌려주든, 이도 저도 안 되면 해고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고 기업이 불편해할 규제라도 모두 풀어서 한국이 사업하기에 얼마나 좋은 곳인지, 따라서 투자처로서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세계 모든 기업을 향해 호소하는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일 뿐이다.

하지만 대통령 스스로가 영업사원을 자처하고, 정치는 투자 유치를 위해 기업의 온갖 애로사항을 처리해주는 민원 창구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모두가 기업주나 투자자로 ‘출세’할 순 없는 시민들 입장에서 그저 달갑기만 한 건 아니다.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가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과 다국적화한 기업의 글로벌한 경영활동은 기업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는 바람직할 수 있지만 국가라는 한정된 영토에 묶여 있어야 하는 국민 모두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에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짓고 현대자동차가 조지아주에 전기자동차 공장을 짓기로 한 건 이들 기업으로선 유망한 새로운 투자처를 찾은 것이기에 분명 축하받을 일이다. 그러나 텍사스주나 조지아주에 살고있는 미국인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가 축하받을 일은 결코 아니란 점 또한 분명하다. 게다가 우리나라 4대 금융지주회사의 주식 중 60% 이상을 글로벌 사모펀드 중심의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고, 한국 경제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반도체 산업에서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주식의 50% 이상을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토록 많은 돈을 벌어놓고 ‘한국’ 기업이 왜 한국에 투자하지 않고 엉뚱하게 미국에 투자하느냐며 기업의 국적을 따져 묻는 일은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기업은 성장하는데 국민이 가난해진다면

2000년 이후 기업은 돈을 벌지만 좀처럼 대규모 투자나 양질의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산업 공동화’를 우려해야 할 만큼 국내 기업들의 해외투자와 자본 이탈이 늘어났다. 이 같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나름 진지한 정책적 대안을 내놓았던 건 바로 노무현 정부였다. 여러 다른 견해가 존재할 수 있지만, 사실 노무현 정부가 제시한 ‘동북아 중심국가론’과 이를 경제정책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동북아 물류허브론’ ‘동북아 금융허브론’ 등은 물류나 금융과 같은 특정 산업에서 유리한 입지를 제공함으로써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로 인해 생긴 경제적 공백을 외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메우려는 일종의 산업입지 전략에 가까웠다. 또한 이러한 맥락하에서 2003년 이후 전국 곳곳에 ‘경제자유구역’이 지정되고, 송도국제도시 같은 외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제자유구역 내 신도시들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콩·상하이·싱가포르·두바이 등을 모델로 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론’은 세계 최고의 금융 강국인 미국에서 2008년 발생한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로 인해 정책적 정당성 자체에 회의론이 제기되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경제자유구역 가운데 그나마 가장 성공한 경우로 평가받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껏 경제자유구역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다소 기여했지만 애초 의도한 만큼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설령 이 같은 정책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GM의 군산공장이나 그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쌍용자동차의 경우에서처럼 투자자가 아닌 노동자로 살아가는 다수의 국민이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해 더 큰 불행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언제든 공장을 폐쇄하고 떠날 수 있는 외국 기업의 투자에 의존하는 것이 과연 능사일 수 있는지 정말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맞아 5월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민의힘 지도부와 오찬을 했다. ⓒ대통령실 제공

지난 30여 년간 세계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목도해온 것은 투자할 자본의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화된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면서 기업은 성장하지만, 국민은 안정적인 일자리의 부족에 시달리며 언제든 가난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합리성이 경제를 통해 추구해야 할 국민적 이해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져왔다.

농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경쟁력 있는 자동차를 더 팔아서 그 돈으로 농사짓던 땅에 골프장을 만들면 된다. 그러면 경제는 성장할 것이다. 이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을 이해하는 게 경제적 합리성이다. 하지만 자기 땅을 가진 자영농의 삶과 자신이 농사짓던 땅을 수용당하고 골프장 햄버거 가게에서 부자들을 위해 일하는 일용직의 삶은 다르다. 훨씬 복잡하고 난해한 이 같은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누가 되었든 상관없이 더 많은 상품을 팔기만 하면 되고, 누구의 돈이 되었건 상관없이 불편한 민원을 해결해주면 된다는 영업사원의 경제적 합리성으로는 복잡하고 난해한 정치적 문제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대한민국 유수의 기업인과 관료들만으로도 ‘영업사원 1호’를 자처할 사람은 많다. 부디 대통령은 누구도 갖지 못한 지혜로 정치를 살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길 바랄 뿐이다.

기자명 김정주 (원광대 경제금융학과 초빙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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