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문명이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닐까.’ 대의제 민주주의는 문제해결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고,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공적 제도들은 지속가능성을 의심받는다. 자본주의가 약속했던 무한 번영의 길은 곧 지구를 착취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 점점 또렷해진다. 20세기에 추구했던 사회적 이상은 시효를 다해가는데 21세기에 걸맞은 사회계약은 부상하지 않고 있구나, 근래에 머릿속을 채웠던 고민이다.
이언 모티머는 영국의 역사가이자 역사 저술가이다. 1999년이 저물어가던 어느 날, 그는 이 책을 집필하게 만든 아이디어와 마주한다(올해 한국에 번역된 이 책은 영국에서 2014년 출판되었다). 텔레비전 속 뉴스 진행자는 다른 어떤 세기보다 변화가 많았던 세기가 끝나간다고 말했다. 이 말이 그의 머리와 마음에 똬리를 틀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변화가 생긴 시대가 정말로 20세기일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나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서 이렇게 묻고 싶었다. ‘역사의 변곡점에 서 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이 2023년의 우리뿐일까?’
모티머는 지난 1000년을 오로지 변화라는 잣대로 뜯어본다.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세기별로 특징적인 변화들을 추려내고, 각 장의 마지막에 그 세기의 변화를 추동한 주체(인물)를 꼽는다. 약 4분의 3까지는 대체로 안도하면서 책을 읽었다. 각 세기마다 삶을 급격하게 뒤흔드는 부침을 겪으면서도 인류는 살아남았으며 야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디지만 자유·평등·박애라는 가치 측면에서도, 물질적인 풍요 측면에서도 한 발짝씩 전진해왔다.
그러나 책을 덮을 즈음에는 섣부른 낙관을 거두게 된다. 모티머에 따르면, 산업혁명이 본격화한 19세기 중반부터 인류는 “사실상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 지구라는 유한한 행성에서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확장이 아니라 자기 억제이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은 그런 식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1000년의 역사를 돌아본 이의 말이라 더욱 무겁게, 아니 무섭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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