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8일 제2기 진실화해위가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집단 희생된 아산 지역 주민들의 유해 발굴 현장을 공개했다.ⓒ시사IN 조남진
3월28일 제2기 진실화해위가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집단 희생된 아산 지역 주민들의 유해 발굴 현장을 공개했다.ⓒ시사IN 조남진

지난 3월28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에 자리한 성재산 기슭에서 유해 발굴 작업이 공개됐다.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집단 희생된 아산 지역 주민들의 유해를 찾아내기 위해 3월7일부터 20여 일간 진행한 유해 발굴 현장이었다. 한국전쟁 시기 부역 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유해 발굴 사업을 벌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폭 3m, 길이 14m 방공호를 파내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골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빽빽한 상태로 매장된 유골들은 대부분 다리가 L자로 구부러진 형태였다. 40여 구에 달하는 두개골 옆에는 예외 없이 파랗게 녹슨 탄피가 2~3개씩 얹혀 있었다. 대부분의 손목뼈에는 가느다란 군용 전화선(삐삐선)이 칭칭 감겨 있었다. 현장에서는 집단학살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소총 탄피와 탄두가 다량 발굴됐다. 단추나 벨트, 신발 같은 유품도 나왔다. 유해들은 대부분 무릎 꿇린 상태에서 두개골에 다발성 총알 관통상을 입고 좁은 방공호에 쓰러져 그대로 암매장된 형상이었다.

“아무 죄도 없이 아버지 3형제를 잃고, 70년 동안 도망치듯 살았습니다.” 이날 유골 발굴 현장에 참석한 아산시 방축동 주민 김광욱씨(78)는 모습을 드러낸 유골 한 구 한 구를 어루만지며 오열했다. 누가 가족의 유해인지 분간할 수 없는 탓에 모두가 아버지와 숙부들의 유골인 것만 같았다.

김씨는 다섯 살 때인 1950년 10월3일, 낯선 청년들이 나타나 아버지와 두 숙부 등 가족 3명을 총구로 위협하며 끌고 가던 순간을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그날이 공교롭게도 아버지 생신이었다. 생신 축하 상을 받고 있는데 총을 든 청년들이 나타나 아버지와 숙부들을 끌고 나갔다.” 어린 아들 앞에서 그렇게 사라진 아버지 김갑봉씨는 73년이 흐른 오늘까지 소식이 없다. 사건 직후 이름 모를 폐광에서 학살당했다는 소문만 나돌 뿐 생사를 알려주는 곳도 없었다. 가해 세력은 지역 내에 살고 있던 대한청년단, 태극동맹 등 우익단체 대원이었다. 이들은 1950년 9·28 수복을 전후해 온양 아산 지역 경찰의 비호 아래 치안대를 꾸려 수많은 지역 주민을 부역 혐의자로 지목하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차별 총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전쟁 시기 부역 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유해 발굴 사업을 벌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시사IN 조남진
한국전쟁 시기 부역 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유해 발굴 사업을 벌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시사IN 조남진

경찰 비호와 묵인 아래 우익단체가 집단학살

이번에 유해를 발굴한 성재산 일대는 당시 시신을 유기한 곳이다. 1950년 10월4일 온양경찰서 업무가 정상화되면서 좌익 부역 혐의 관련자와 그 가족들을 매일 밤 1~2회에 걸쳐 40~50명씩 트럭에 실어와 학살한 다음 이곳에 유기했다. 1·4 후퇴 시기인 1951년 1월 초에는 군민증을 발급해준다며 배방면사무소 옆 곡물창고 2개와 모산역 부속창고에 좌익 부역 혐의 관련자와 가족들을 구금한 후 수일간 수백 명을 집단학살하고 유기한 지역이기도 하다. 배방면 지역은 9·28 수복 시기 최소 200여 명, 1·4 후퇴 시기 3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6·25 전쟁 당시 온양경찰서 수사계에 근무하던 임 아무개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온양경찰서에서 매일 밤 트럭으로 40~50명씩 부역자들을 처형 장소로 이송했다. 주로 성재산 방공호와 세리 폐금광, 온양 배방 사이의 하천변에서 총살했다. 즉결 총살 처분은 상부 지시도 있었지만 대부분 경찰서장과 지서장 재량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간 치안대원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아산 지역 희생자들은 부역자 처리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가 주축이 된 치안대에 의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온양읍 청년방위대원이던 박 아무개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온양 아산 지역 각 면리에서 여러 개의 우익 치안대가 결성돼 경찰이 들어오기 전에 수복 지구 치안활동을 폈다. 부역자는 대부분 경찰의 처형 지시를 받고 처리했지만 때로는 그냥 처형하기도 했다. 처형 장소에 갈 때는 우리 청년단원들이 부역자들을 끌고 가서 경찰관 한 명이 입회한 가운데 총살했다.”

부역 혐의자란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기 점령지 행정과 치안 등을 도운 주민들을 말한다. 그런데 말이 부역자이지 미처 피란 가지 못한 채 인민군 행정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부역 혐의를 받았다. 또 부역자 가족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일가족이 대거 학살당한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까지도 단순히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홍사학씨 가족 14명 몰살 사건이다. 1950년 9월 말 아산시 염치면 대동리 주민 홍사학씨와 노인, 부녀자, 어린이를 포함한 일가족 14명은 대한청년단에 의해 속칭 ‘새지기 공동묘지’에 끌려가 집단 총살당했다. 인민군 점령 시기 부역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염치면 산양리에 살던 문현기씨와 갓난아이를 포함한 일가족 9명도 온양 지역 치안대에 의해 산양리 치안분소에 끌려가 남산말 방공호에서 전원 총살되었다.

배방면 성재산에서 민간인 학살이 많았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9·28 수복 후 들어온 경찰과 치안대는 인민군 점령기 부역 혐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다수의 배방면 주민에게 군민증(현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몇 달 뒤 1·4 후퇴 시기에 배방면 주민 대다수는 신분 증명을 할 수 없어 피란을 가지 못한 채 발이 묶였다. 그 와중에 우익 치안대에서 군민증을 발급해주겠다며 주민들에게 한 장소에 모이라고 했다.

당시 배방면 세교리 주민 70여 명은 이장 집으로 모였다. 기다리던 우익 청년단원들은 마을 주민이 모두 모이자 지서 옆 창고로 연행 감금한 후 이튿날 성재산 방공호에 싣고 가 총살해버렸다. 세교리 외에도 세출리, 장재리 등 배방면 주민들이 같은 방식으로 유인돼 무차별 학살당했다. 당시 희생자 가운데는 이미 경찰에 의해 부역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대전지법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주민도 포함돼 있었다.

아비규환의 학살 구덩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도 있다. 류정수씨(당시 20세)는 1950년 10월 중순 아산시 탕정면 동산리 자택에 들이닥친 의용경찰대원 9명에게 다짜고짜 납치됐다. “당숙과 함께 끌려갔는데 주민 수십 명이 붙들려와 몽둥이로 구타당하고 있었다. 그날 밤 탕정지서 뒷산으로 끌고 가 미리 파놓은 방공호에 몰아넣고 총을 쏘아댔다. 매장당하는 순간 누군가 나를 도와 구해줬다. 그때 그렇게 탕정지서 뒷산에서 콩 볶는 총소리가 나고 무수히 많은 주민이 죽었다. 수복 시기 유족들이 한밤중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으나 못 들어가게 막아버리는 바람에 어떤 이는 치안대를 맡았던 청년방위대 간부들에게 논 다섯 마지기를 넘겨주고 시신을 찾아오기도 했다.”

발굴된 유골의 손목뼈에는 가느다란 군용 전화선(삐삐선)이 칭칭 감겨 있었다. ⓒ시사IN 조남진

아산 지역에서 자행된 부역 혐의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은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9·28 수복 직후 부역자 처벌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특히 아산 지역 부역 혐의자 집단학살은 그 잔혹성과 야만성에서 적잖은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주민 학살의 원성이 자자하자, 1951년 7월21일 조만진 법무부 장관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좌익분자 및 그 가족 살해에 관한 건’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아산 지역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주민을 학살하고, 뇌물을 바치면 풀어주던 일부 경찰 간부들의 죄악상에 관한 보고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관련 범죄 조사나 처벌을 하지 않고 유야무야 덮어버림으로써 ‘공범’이 되는 길을 택했다.

전쟁이 끝난 뒤 피해자들은 당시 가해 혐의자 중 한 명인 아산경찰서 신창지서 주임 유 아무개를 살인, 사형금지 위반, 뇌물죄 등으로 고소했다. 1955년 검찰 수사를 거쳐 유씨는 기소됐다. 1심과 2심에서 류씨에 대한 살인과 사형금지 위반죄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대법원 상고심에서 뒤집혔다. 두 죄목은 무죄를, 뇌물죄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했다.

전시 계엄 아래서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시기였다 하더라도 무장경찰 및 치안대가 단지 부역했다는 혐의, 또는 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적법 절차도 없이 살해한 행위는 명백한 위법이자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와 뒤를 이은 역대 군사정권은 학살 가해자의 범죄를 은폐하거나 두둔했다. 학살 가해자들은 사건 후에도 지역 내에서 득세하며 피해자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다. 이런 현실에서 피해 유가족은 어디 대놓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당시 희생자들은 가족 단위로 살해돼 유족이 없는 경우가 많아 유해 수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부역 혐의자 학살 사건의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 자손들이 사건 뒤에도 어쩔 수 없이 지역공동체 내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아 유해 발굴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들은 역대 군사정부의 삼엄한 감시와 연좌제 탄압 속에 무참히 죽어간 부모 형제의 시신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70여 년 세월을 숨죽여 살아왔다. 온양경찰서 정보과장으로 근무했던 윤 아무개씨는 “당시 부역 혐의로 처형된 사람의 유족은 전쟁 후에도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감시·관리하여 사회 활동을 통제했다”라고 증언했다.

‘아산 지역 주민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신발과 단추, 벨트 같은 유품들도 함께 발견되었다.ⓒ시사IN 조남진
‘아산 지역 주민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신발과 단추, 벨트 같은 유품들도 함께 발견되었다.ⓒ시사IN 조남진

“학살 현장을 후대 위한 인권 교육장으로”

살아남은 유족의 삶은 형극의 길이나 다름없었다. 5세 때 아버지와 삼촌 두 명을 잃은 김광욱씨는 사건 뒤 어머니를 따라 고향 아산을 등진 채 외갓집인 경기도 평택에서 자랐다. 그는 환갑이 넘은 2005년 이후에야 고향과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헤매다 비슷한 피해자들을 만나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다.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 하여 영문도 모른 채 집단살해된 주민들 중 지옥 같은 처형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배방면 세교리의 전유씨는 어린 나이에 돌봐줄 가족들이 모두 살해되어 혼자 떠돌다 객사했다.

공무원의 꿈을 안고 지원했던 유가족은 본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국가의 보이지 않는 폭력 앞에서 좌절해야 했다. 부모와 2·4·12세였던 세 동생을 잃은 아산시 탕정면 김장성씨는 훗날 군 장교 시험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임관하지 못했다. 그 후 연좌제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홍사학씨 일가족 14명 집단학살 사건’의 유족 홍민선씨는 1968년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연좌제 때문에 3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불순세력으로 낙인찍힌 홍씨는 충남대학교 재학 시절 제적당했다. 그 후 간신히 민간기업에 취직했지만 1년6개월 동안 매달 한 번씩 경찰 정보계로부터 사찰을 당해 회사 생활도 접어야 했다. 염치면 산양리 일가족 9명 학살 사건 피해 유족인 문종철씨는 군 생활 도중 방첩대로 발령받았으나 연좌제 때문에 군복을 벗어야 했다. 그 후 직장을 잡기가 어려웠고 이사 가는 곳마다 경찰들이 따라다녔다고 증언했다.

이들 피해 유족은 2000년대 들어서야 억울한 한을 풀 실마리를 잡았다. 노무현 정부 들어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발족하자 아산 지역 유족들이 모인 것이다. 2006년부터 피해 유족이 진실화해위에 사건을 접수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 아산 지역에서 부역 혐의자 처형 사건으로 최소 800여 명의 주민이 집단 희생된 것으로 추산됐다. 가해 주체는 온양경찰서와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였다. 희생자를 연행한 것은 주로 치안대가 담당했다. 처형을 집행한 것은 경찰 혹은 경찰의 지시를 받은 치안대였다. 이들은 온양경찰서장의 지휘를 받아 가해행위를 했으므로 온양경찰서장과 충남경찰국에도 지휘감독 책임이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최종적으로는 공권력의 불법 행사를 막지 못한 이승만 정부에까지 그 책임이 귀속된다고 보았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의 공식 사과와 더불어 유가족들에게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등을 비롯한 명예회복 조치를 적극 강구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피해 유족에게 국가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다. 이번 진실화해위의 국가 차원 유골 발굴이 있기 전 2018년 아산시가 자체적으로 유해 발굴에 나서 208구를 수습한 바 있다. 성재산 유해 발굴 현장에서 만난 아산 지역 피해유족회 맹억호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두 번 다시 민족 내부에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곳을 후대를 위한 인권 교육장으로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자명 아산/글 정희상 기자·사진 조남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