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 드높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개탄을 넘어 이제는 독재정권이 부활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과연 이런 주장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문제는 이런 발언이나 주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를 독재나 파시즘 같은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복잡한 사안을 선명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사안을 덮어버릴 소지가 있다. ‘이명박 반대’라는 가시적 구호에 편승해서 여러 권력의 복합체이자 갈등의 구현체인 이명박 정부의 문제를 ‘이명박’이라는 ‘얼굴마담’의 흠결로 환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명박 정부가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인 맥락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 정부’ 시절에도 노동 탄압은 있었다. 2007년 7월 비정규직 대량 해고와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이랜드 노조원들.
이명박과 노무현, 무엇이 다른가

미디어법 사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명박 정부는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정부이다. 대화와 협상이라는 가장 중요한 관리 능력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미디어법 강행 처리다. 근대국가 이래로 합의제 정치는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절해서 직접 충돌을 가능한 한 회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이런 비판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거리에서 발생하는 요구를 국회의사당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끌어들여 해소하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의 기능인데, 이명박 정부는 국가 안정이라는 중요한 전제를 위해 최소한으로 보장해야 할 부르주아 정치의 기본마저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정파와 이념을 초월해서 안팎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 

이번 미디어법 처리 과정은 이명박 정부의 실체에 대한 하나의 암시를 제공한다. 절대다수의 여론이 반대하는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하는 ‘용기’는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노무현 정부가 여소야대라는 유리한 조건에서도 4대 개혁입법을 밀어붙이지 못했던 까닭을 상기해보라. 그때 한나라당에서 제기한 반대의 논리는 발등에 불인 ‘민생법안’을 제쳐두고 국론 분열의 우려마저 있는 이념적 법안에 집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4대 개혁입법은 미디어법처럼 강행 처리로 결판난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합의’로 귀결했다. 진보·개혁 세력은 ‘누더기법’이라고 비판했지만, 4대 개혁입법 처리 과정은 노무현 정부의 정체를 정확하게 보여준 과정이기도 하다.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노무현 정부가 추구한 것은 근대적 민주주의 개념에 충실한 국가 운영의 합리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일부 보수 세력의 주장처럼, 노무현 세력이 일방적으로 반재벌 정책을 추진했다고 보기 어렵다. 노무현 정부는 이 합리화의 철학을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에서 가져왔다. 이런 면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나 다른 입을 가졌지만 내뱉는 말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차이는 이런 합리화의 중심에 무엇을 두는지에 따라 발생한다. 노무현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비해 훨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의 재벌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재편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적 개혁·개방을 위한 재벌 규제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적 감사’ 논란 속에 사퇴한 황지우 한예종 총장.
이명박 정부의 목적은 이런 기조를 뒤집는 것이었다. 따라서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말하고, 다른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지향성을 견지하면서도 재벌 정책은 보호주의 방침을 취하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노무현 정부가 ‘재벌 불화’ 정책이었다면, 이명박 정부는 ‘재벌 친화’ 정책인 셈이고, 크게 본다면 이런 기조는 세계화의 흐름에 역행한다. 한국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특수한 자본 축적 형태라고 할 재벌을 둘러싼 문제는 사회 갈등과 이념 대결의 잔재를 끌어안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낡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좌우 이념 대결구도를 너무 자주 써먹는 것 같은데, 이는 사회 갈등을 정치적으로 조정할 능력이 없는 이명박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도덕적 비판은 ‘맞불 대응’ 불러올 뿐

이처럼 합의제 민주주의의 절차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소통’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런 비판은 수사적인 차원에 그칠 뿐 이명박 정부를 둘러싼 문제에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원래 소통보다 불통에 근거한다. 이 불통의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경제’를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명박 정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기를 기대하는 것은 앞뒤가 조금 맞지 않는다.

반발이 거세지자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서민 행보’를 취하고 민생 해결에 주력하겠다고 정책 기조를 ‘수정’하는 인상을 풍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게다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친재벌주의’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발생한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이명박 정부다운 경제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 쌍용자동차 문제가 불거져서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노동 탄압을 자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있지만, 이런 문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잠재해 있었다. 노동자 처지에서 보면 과거 ‘민주적’ 정권이라고 해서 딱히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보장받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 세력 또는 독재정권으로 쉽게 규정하는 것은 그다지 눈에 띌 만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낡은 구도를 다시 들고 나오는 순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 판단의 문제로 환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이른바 자칭 ‘민주 세력’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것인데, 환경운동연합 간부 횡령의혹 사건이나 한국종합예술학교 문제에서 보여준 ‘언론 플레이’는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결국 동일한 방식의 맞불 대응만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정치로부터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정황이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이야기해야 할 사람들에게 유리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 세력으로 포장하기에 급급해하기보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누구의 민주주의이고, 어떤 민주주의인지를 문제 제기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제도 자체의 한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근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지도 모른다.

기자명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학 교수·문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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