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사태가 분수령을 맞았다. 7월30일 노사가 얼굴을 맞댔다. 6월19일 노사 대화가 있긴 했지만 양쪽은 기 싸움만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경전을 주고받을 여유가 없다. 쌍용자동차 최대 채권자이자 협력업체 모임인 쌍용차협동회가 정상화가 어렵다면 8월4일 법원에 조기 파산 신청을 내겠다고 밝혔다. 채권단의 최후통첩에 노사가 머리를 맞댄 것이다.

쌍용자동차가 파국을 맞든 타결이 되든 후유증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장을 점거한 죽은 자(정리해고자)나, 죽은 자를 끌어내려 했던 산 자(비정리해고자), 그리고 아예 회사를 떠난 존엄사 자(희망퇴직자) 사이에 파인 골은 크고 깊다. 이들로부터 쌍용차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들어보았다. 이들은 모두 이름과 얼굴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민노총쌍용차 내부습의 노조원 모습.
최기운씨(가명)가 사는 집은 쌍용자동차 정문 옆 아파트이다. 집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최씨는 199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사했다. 일반 회사로 치면 차장급인 ‘기감’까지 승진한 15년 근속자이다. 그가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한 것도 쌍용자동차를 평생직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6월2일 정리해고를 당했다. 그는 만감이 교차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원망도 했다. “왜 나를 해고자 명단에 올렸을까.” 후회도 밀려왔다. “난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몸이 힘들더라도 월차 한번 덜 쓸걸.”

답답함은 더해갔고 억울함은 커갔다. 그는 다른 해고자들과 같이 공장 점거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6월5일 희망퇴직서를 쓰고 제 발로 공장을 빠져나왔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존엄사 길을 택한 것이다. 아내와 어머니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5월 결혼했다.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신부를 맞았다. 처가에서 ‘도둑놈’ 소리를 들었지만 최씨는 어린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 직장도 그만두게 했다.

ⓒ민노총쌍용차 내부습의 노조원 모습.
지난해 12월 최씨가 월급을 받지 못하면서 어린 신부를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은 흔들렸다. 최씨 아내는 다시 간호사 일을 시작했다. 그런 아내를 지켜볼 수 없어 공장을 빠져나왔지만 집으로 돌아온 날 도리어 아내한테 타박을 들었다. 아내는 “억울하지 않으냐. 남자가 뭐라도 하고 들어와야지 그냥 나왔느냐”라고 말했다.

최씨는 어린 아내뿐 아니라 또 다른 식구들 때문에 마음을 굳혔다. 어머니가 파키슨병을 앓고 있는데, 검은 연기에 휩싸인 쌍용자동차를 다룬 뉴스와 회사가 집으로 보낸 ‘친절한’ 편지를 본 뒤 그만 몸져누웠다. 최씨는 어머니의 비보를 듣고 이틀간 전전긍긍하다 희망퇴직을 결심했다. 한편으로는 같은 회사에 관리직으로 다니는 매형도 걸렸다. 매형은 산 자였다. 매형이 괜히 자기 때문에 피해를 보지나 않을까 그는 마음을 졸였다.

존엄사 자 “모든 것을 잊고 싶다”

존엄사 길을 택한 지 두 달째. 최씨는 아직 재취업을 하지 못했다. 생활은 6월11일 밀린 월급 명목으로 받은 목돈으로 이어갔다. 하지만 이 돈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퇴직금은 아직 받지 못했다.

그 사이 최씨는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문턱이 높았다. 쌍용자동차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이라고 최씨는 말했다. 언론에서는 ‘평택시가 노동부에 고용개발촉진지역을 신청했다’ ‘협력업체들이 적극적으로 쌍용자동차 출신들을 취업시키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최씨는 “면접 때 전 직장을 물어보기에 쌍용자동차라고 했더니 ‘힘들겠네요’라는 답변을 하더라”고 말했다. 존엄사를 당한 다른 동료도 마찬가지이다. 최씨는 “동료가 30곳을 알아봤는데 모두 쌍용차 출신이라서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기업 사이에 골치 아픈 사람들 받으면 곤란하다는 말이 돌았다는 소문도 있다”라고 말했다.

한번 흐트러진 일상은 쉽게 정돈되지 않았다. 최씨의 아내는 쌍용차 뉴스만 나오면 눈물을 지었고, 집과 가까운 회사 쪽으로 전경차나 앰뷸런스만 지나가도 놀랐다고 한다. 남편은 빠져나왔지만 한때 같이 일하고 놀고 밥 먹던 식구나 다름없는 이들 때문에 신경이 쓰인 것이다.

최씨는 요즘 매일 아침 아내를 출근시키고, 집안일을 끝낸 뒤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닌다. 그는 “지금은 회사에서 좋았던 기억, 안 좋았던 기억 할 것 없이 다 잊으려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 쌍용자동차가 회생하기를 바랐다. 최씨는 “7월30일 끝장 협상 이틀 전부터 노사가 물밑 대화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조금만 더 힘내라고 전화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살면 좋겠지만, 그래도 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않으냐”라고 덧붙였다. 존엄사 길을 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자, 최씨는 “후회가 왜 없겠느냐. 그래도 내가 택한 길인데”라고 말했다.

최씨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쌍용자동차 공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조만간 집도 이사할 참이다.

ⓒ민노총경찰과 회사 쪽이 물을 끊고 음식물 반입을 막자, 점거 노동자들은 주먹밥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송정훈씨(가명)는 지난 6월3일 끊었던 담배를 1년 만에 다시 피웠다. 그날 송씨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정리해고 통보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해고통보서가 담긴 봉투를 받아든 아내는 차마 뜯지를 못했다. 아내는 공장을 점거한 채 옥쇄 파업에 참여한 송씨에게 울먹이며 전화했다. 송씨는 아내에게 “(통지서를) 받지 마라”고 했다.

송씨는 자신이 죽은 자(정리해고 대상자)에 포함될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회사 처지에서 눈엣가시인 노동조합 대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머릿속에서 그려본 해고와 막상 손에 쥐어진 해고통보서가 주는 무게감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컸다고 한다. 송씨는 “나뿐만 아니라 그날 집에서 전화를 받은 정리해고자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담배를 꺼냈다”라고 말했다.

정리해고 통보에 앞서 희망퇴직 얘기가 나올 때만 해도 송씨는 희망퇴직서를 쓰려던 동료를 설득했다. “희망퇴직금 2000만원 받아서 애들 어떻게 키우면서 살 것이냐?”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정리해고 되겠느냐?” 하지만 정작 뚜껑이 열렸을 때 자신은 정리해고 대상에 포함됐고, 자신이 말리던 희망퇴직을 하려는 이들은 살아남았다. 송씨는 “얄궂은 운명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눈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송씨는 2001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한 9년차이다. 1995년부터 쌍용차를 다니던 친형이 입사를 권했다. 그런데 그 형마저 정리해고 칼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형제는 나가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죽기는 한가지라며 공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형은 점거 농성 중 지난달 심장이 좋지 않아 앰뷸런스를 타고 공장을 떠났다. 동생 송씨만 홀로 남았다.

6월16일 오전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앞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비해고 임직원들이 공장 주변을 행진하고 있다.
죽은 자 “담배를 다시 피웠다”

날벼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살려고 공장에 남았는데, 회사는 계속 사지로 내몰았다. 6월22일 회사가 송씨를 비롯해 190명을 상대로 5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송씨가 결혼하면서 마련한 18평짜리 보금자리마저 위태로워졌다. 송씨는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송씨는 점거 중에도 하루에도 수십 번 아내와 딸과 통화를 했다. 물을 끊어 씻지를 못해도, 최루액을 맞아도, 주먹밥을 먹어도 그를 버티게 한 힘은 아내와 딸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7월20일 동료 이재진씨의 아내가 자살했다는 비보를 듣고서 송씨는 새삼 피붙이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 비보를 처음 전해준 이도 아내였다. 아내는 쌍용차 사태가 이제나 저제나 해결될까 컴퓨터 앞에 붙어 있다가 문자를 보낸 것이다. 송씨는 “재진이나 나나 비슷한 처지이다. 집으로 해고통보서가 날아오고 소환장이 날아오고 재산 가처분 서류가 날아오면 어느 아내가 멀쩡하겠느냐”라고 말했다.

7월30일 쌍용자동차 노사는 끝장 협상을 시작했다(위).
쌍용자동차 사태 장기화로 애간장이 타기는 공장 안에 있는 자신보다 밖에 있는 아내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송씨 역시 지난해 12월부터 아내에게 월급을 건네지 못했다. 그나마 옥쇄 파업 전에는 ‘노가다’를 뛰어 살림에 보탰다. 아내는 자기라도 돈을 벌겠다며 아르바이트를 구하려 했지만 구하지 못했다. 지금 부족한 생활비는 누나가 보태준다고 한다.

송씨는 7월30일 시작된 노사 최종 협상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노사 대화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고심해야 할 처지이다. 희망퇴직을 할지, 분사와 영업직 전환을 선택할지, 그도 아니면 다행히 무급휴직자에 포함될지 마지막 선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송씨는 “아내가 젊은데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고 위로하더라. 아내는 내 마음이 다치지 않기만 바랐다”라고 말했다. 

김영진씨(가명)는 입사 18년차 관리직 차장이다. 김씨는 매일 회사에 전쟁하러 출근했다. 출근 시각은 오전 8시30분,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던 때와 똑같다. 머리에는 흰색 헬멧, 어깨에는 ‘정상조업’이라는 띠를 매고 출근했다. 김씨는 출근해 잡무를 처리하고 회의하고 인터넷으로 언론 보도를 확인하고 ‘개밥’이라고 부르는 점심을 먹고 ‘비상’이 걸리면 각자 할당된 구역을 지키러 나가기 일쑤였다. 김씨는 “군대에서나 서던 보초를 여기서 서고 있다. 매일 전투를 치렀다. 입에서도 ‘전투태세’ 따위 군대 용어가 저절로 나왔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점거 농성하는 생산직 노동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김씨는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왜 없겠느냐. 꾀 안 부리고 열심히 일했는데 해고당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산 자인 입사 17년차 양성민씨(가명)는 “우리가 강자고 저쪽이 약자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입장이 바뀌었으면 우리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산 자 “저들은 한 식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동정심도 지난 6월26일 ‘노노 충돌’만 생각하면 싹 사라진다고 했다. 김씨는 생산직과 관리직으로 나뉘었지만 한솥밥을 먹은 처지인데 노조가 쇠파이프를 한 식구에게 휘두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김씨는 “그때 처음으로 한 식구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이제 저 사람들하고는 같이 일 못할 거 같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씨는 정상화 이후가 더 걱정이다. 노사 대타협 뒤 어제의 적이 다시 한 식구가 되는 화학적 결합을 이루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았다. 관리직인 김씨는 또 노동조합에 대한 불신의 골이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노조 주장대로 상하이차도 잘못이 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정규직 구조조정을 반대해온 노조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인공호흡기를 달기 전에 수술(구조조정)할 기회가 있었지만, 매번 노조가 수술을 거부했다고 강조했다.

산 자들도 쌍용자동차의 운명을 장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김씨는 “공장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생산이 재개되어봐야 회생 여부를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다른 산 자인 이진송씨(가명)는 “어찌 됐든 사태가 해결되면 그동안 방관한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지원을 해줘야 회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남지원·심진용 인턴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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