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성폭력 범죄는 뚜렷한 특성이 있다. 먼저, 발생량이 많다. 법무연수원 자료에 따르면 2020년에 발생한 강력범죄의 91.7%는 성폭력이다. 살인은 2.5%, 강도는 2.1%다. 두 번째 특징은 다른 강력범죄에 비해 기소·구속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같은 해 성폭력 기소율은 48.6%(살인 68.3%, 강도 68.7%), 구속률은 6.0%(살인 78.1%, 강도 42.8%)다. 성폭력 범죄의 이런 기이한 특성이 어떤 이들에겐 돈이 된다. 2010년대 중반부터 가해자를 위한 감형 팁과 보복성 역고소를 안내하는 법률 지원 시장이 등장했다.

김보화(42)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은 책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서 감형을 구입하는 성범죄 가해자와 이들을 지원하는 법조 카르텔을 고발했다. 2003년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와 인연을 맺으며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로 활동해온 그는 20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올해 1월, 젠더폭력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번 책은 김 소장이 2021년에 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결과물이다. 그는 2018년부터 “비윤리적인 홍보와 상업화로 시장을 확대해온” 가해자 전담 법인을 주목해왔다.

사건 발생 횟수는 많은데 기소율과 구속률이 낮고 가해자 연령도 낮아진 성폭력 범죄. ‘빨간 줄’을 막기 위해 지갑을 여는 소비자(가해자)가 늘어나자 가해자 전담 법인은 각종 전략들을 팔기 시작했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족, 조력자까지 수백 명을 무더기로 역고소하거나 대필 반성문과 탄원서를 구매하고 여성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영수증을 법원에 제출하게 했다. 1000만원이 넘는 진술 분석 보고서도 잘 팔렸다. 그런 게 먹혔다. 재판부는 가해자가 외모 콤플렉스로 힘들어했다고, 헌혈증을 냈다고, 고도비만이라고 감형을 해줬다. 몇몇 법인은 전직 대법관·부장판사·검사 등을 자문위원으로 임명하고 한 달 홍보비로 1억원 이상을 지출했다.

김보화 소장은 이런 상황을 목격하고 경험한 성폭력 피해자 17명과 여성운동단체 활동가 6명, 변호사 8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때로는 한 차례 인터뷰에 5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긴 만남 후에도 귀가하면 모든 녹취를 풀고 꼼꼼히 ‘필드 노트’를 썼다. 단상을 쓰고, 스스로 묻고, 다시 답하며 메모에 메모를 이어갔다. 그들의 말과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책에서 ‘국가가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 모두의 법률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적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고 썼다. 국가는 성폭력 범죄를 개인화하고 각자의 자본으로 해결하라고 방임함으로써 성폭력의 구조적·근본적 문제를 외면할 수 있게 된다. 김 소장은 가해자의 반성을 이끌어내는 일은 공동체의 역량과 관련된 문제라고 짚었다. “가해자의 반성과 성찰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처벌하고 쫓아내겠다는 태도만 남은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의 모습일까요?”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우리 공동체의 문제해결 능력을 퇴화시킨다. 연구자 김보화 소장의 질문은 현재를 넘어 내일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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