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7월은 패션의 달이다. 샤넬·구찌 등 유명 디자이너가 신상품을 선보이는 명품 패션쇼가 열리는가 하면 여름 정기 세일을 맞아 저렴한 가격에 의류를 구매하려는 소비자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런데 글로벌 경제 위기로 인해 명품 소비를 주도하던 파리 패션쇼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새로운 소비 패턴이 등장했다. 알뜰 소비에서 친환경 패션까지, 패션계의 새로운 지형을 소개한다.

7월7일 파리의 무대예술 박물관에서는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의 고별 패션쇼가 열렸다. 1987년 문을 연 메종 라크루아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트쿠튀르(최고급 맞춤 의상) 디자이너로 활약해왔는데, 경제 위기를 맞으면서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이다.

지난해부터 경제 위기가 본격화하면서 패션계 역시 위기이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지갑을 닫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류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경제 호황은 명품 소비를 부추겼다. 상류층의 전유물로 생각되던 명품 소비가 대중화되면서 소비의 거품 역시 커졌다. 파리의 명품 매장 레클뢰르에서 일하는 캐티 씨는 경제 위기 이전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람들은 가격대를 보지 않고 옷을 샀다. 마치 소비에 미친 듯 정신없이 돈을 썼다.”

ⓒ에티컬 패션쇼 제공파리의 한 살롱 모습.
달콤했던 꿈은 찰나였다. 경제 위기가 전염병처럼 돌면서 주머니 사정을 먼저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를 반영하듯 새로운 소비족도 탄생했다. 명품과 마크에 집착했던 패셔니스타(fashionista)에서 경제 위기가 반영된 리세셔니스타(recessionista)의 출현이다. 리세셔니스타란 적은 예산으로 유행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서도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터넷·디스카운트 매장 등을 뒤져 원하는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알뜰 소비족이다.

샤를로트는 올해 20세로 유행에 민감한 여대생이다. 인터넷 블로그 ‘샤를리파리의 유행녀’로 꽤 알려진 그녀는 블로그를 통해 새로운 패션 흐름과 거리 패션 등을 전한다. 또 블로그에서 만난 친구들과 포럼을 열어 유행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패션 전문기자를 꿈꾸며 패션쇼 홍보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명품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패셔니스타였다.

그녀는 지난해부터 매달 옷 교환시장을 자기 집에서 연다. 옷장에 처박혀 있던 묵은 옷들을 가져와 교환하는 이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12명에서 20여 명. 인터넷을 통해 찾아온 18~25세의 ‘울트라 패션’을 자랑하는 파리지엔들이다. 그 가운데는 간혹 40대 여성도 있다. 학생·프리랜서 디자이너·호텔 종업원 등 직업도 다양하다.

ⓒ최현아‘현명한 선택’에 주력하는 리세셔니스타 샤를로트(위)는 자기 집에서 옷 교환시장을 연다.
샤를로트는 “옷장에 가득한 옷을 처분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기회를 통해 새로운 옷이나 액세서리를 얻게 되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도 처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새로운 옷을 구입할 수 있는 즐거움, 바로 이것이 옷 교환의 장점이다.

그녀는 또 안 입는 옷을 이베이(eBay)를 통해 판매하고 세일 기간에 새 옷을 구매했다. 경제 위기 이후 그녀의 소비방식도 달라졌다. ‘품목을 줄이는 대신 현명한 선택’에 주목한다. 예전에는 세일할 때 이것저것 사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가짓수를 줄이고 오래 간직하고 입을 수 있는 옷을 사려 한다.

환경을 생각하는 패션쇼 잇달아 열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변변한 옷이 없는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커튼을 찢어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다. 커튼으로 드레스를 만들었던 그녀는 패션계의 리세셔니스타인 셈이다. 이러한 재활용 패션부터 면·마 등 친환경 소재를 이용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패션계의 리세셔니스타는 환경적·사회적 의미를 실천한다.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은 입을거리에 대한 관심도 높였다. 이를 반영하듯 패션계에서는 친환경 소재 사용, 공정거래, 재활용을 이용한 의류가 떠오르고 있다. 베를린에서 열리는 환경 친화적 의류·액세서리·화장품을 선보이는 ‘그린 쇼룸’, 스웨덴·베를린 출신 디자이너의 재활용 의류만 선보이는 ‘파모요(Pamoyo)’와 파리의 ‘에티컬 패션쇼(Ethical fashion show)’ 가 그것이다.

ⓒ에티컬 패션쇼 제공‘에티컬 패션쇼’
에티컬 패션쇼는 2004년 설립된 친환경 패션쇼다. 매년 가을 전세계  디자이너가 참여해 패션쇼와 살롱,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 행사 기획자인 이자벨 케 씨는 우연히 세네갈과 방글라데시의 디자이너를 만나면서 이 행사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두 나라 디자이너를 만나면서 개발도상국의 패션과 문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에티컬 패션쇼를 준비하게 되었다. 패션쇼 콘셉트는 현지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공정무역, 살충제·화학적 염색제 사용 배제, 천연 재료를 이용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첫회 행사에는 디자이너 20여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하면서 그 수가 늘어 올해 행사에는 디자이너 100여 명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참여 국가도 인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타이·영국·일본 등 다양하다. 패션쇼에 참여하려는 디자이너는 에티컬 패션쇼의 취지에 부합되는 질문 사항에 답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패션계의 위기가 이곳에는 없는지 궁금했다. 의외로 큰 어려움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소비자들이 처음에는 우리 패션쇼의 콘셉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 환경 문제가 새로운 주제로 떠올랐고, 경제 위기로 인해 소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자리 잡았다. 덜 소비하면서 잘 소비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크다. 소비자들은 이 상품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소재를 이용했는지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하듯 최근 베를린을 비롯해 친환경 패션쇼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라고 말했다. 환경을 고려한 패션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명품에서도 이 콘셉트를 도입했다. 최근 명품 브랜드 펜디가 가방을 제작할 때 식물성 가죽을 이용한 것이 그 예다.

ⓒ최현아‘에티컬 패션쇼’ 행사 기획자인 이자벨 케씨는 환경을 고려한 패션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트렌드로 관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자벨 케 대표는 “처음에는 친환경 소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격대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환경을 고려한 의류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 천연섬유 생산도 늘어나게 되고 가격대 역시 저렴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는 소비에 대한 발상을 전환시켰다. ‘적게 쓰고 잘 쓰는’ 소비철학은 경제적이면서 환경 지향적이다. 최근 등장한 리세셔니스타는 이를 반영하듯 소비에서 거품을 빼고 대신 환경이라는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기자명 파리·최현아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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