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원씨(69)가 드디어 붓을 들었다. 하얀 화선지 위에 조심스레 그린 건 다름 아닌 감자. “아이고, 난 그림 그릴 줄 몰라”라며 손사래를 치던 이씨는 자신이 키우는 작물 이야기가 나오자 태도가 달라졌다. “소도 눈이 있고 개도 눈이 있듯이 감자에도 눈이 있어. 그걸 칼로 오려서 심으면 싹이 나”라면서 감자를 그리고, “벼를 거두면 큰 쌀도 나오고 작은 쌀도 나오고 돌이랑 딩게(쌀겨)도 나와”라면서 철원 오대쌀을 그렸다. 어느새 화선지가 감자와 쌀 그림으로 소복이 채워졌다. 

7월14일, 일상예술창작센터와 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의 작가·기획자 10여 명이 강원 철원군 철원읍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이들은 정부 공모를 통해 받은 예산으로 철원 지역 작가들과 함께 철원읍 월하리에서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예술가들은 ‘달 아래 마을’ 월하리(月下里) 곳곳을 갤러리 같은 공간으로 꾸밀 계획을 세웠다. 마을 초입 버스정류장을 초승달 모양으로 꾸미고 길섶에는 두루미 조형물을 설치하고 빈집 외벽에는 꽃과 나무, 물고기와 새를 그릴 예정이다.

철원 지역 화가 김선경씨(왼쪽)가 버려진 간이 화장실 벽에 그림 그리는 것을 마을 주민이 지켜보고 있다.
월하리 골목길은 크게 세 가지 주제 에 따라 새롭게 꾸며진다.
하지만 이건 월하리 프로젝트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단순히 마을을 예쁘게 꾸며 눈에 띄는 랜드마크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배기는 ‘가가호호 워크숍’에 숨어 있다. 감자 키우는 아저씨는 감자를 그리고, 과거 잘나가던 미싱사였던 할아버지는 조각보를 만들고, 평생 붓 한번 들어본 일 없는 할머니가 난생처음 화선지에 쓴 이름으로 문패를 만들어 주민이 스스로 예술가가 되도록 돕는 일, 이게 바로 작가와 기획자의 임무이다. 이들은 이 ‘맞춤형 예술 프로젝트’를 위해 지난 6월부터 매주 1박2일씩 월하리 80여 가구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다.

처음에 월하리 주민들은 시큰둥했다. “우린 그림이고 뭐고 볼 줄도 모르고 할 줄도 몰라”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어르신은 “같은 돈으로 차라리 도로를 넓혀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들은 주민들을 붙들고 말로 설득하는 대신, 손과 발을 움직여 마음을 얻어냈다. 각자 잘하는 붓글씨와 손바느질, 금속공예, 목공예 기술을 활용해 월하리 주민에게 문패나 외등, 토시, 부채 따위를 만들기를 제안했다. 생활에 실용적으로 쓰는 물건을 만드는 일이 예술이라니, 주민들의 마음이 한 번 열렸다. 집 앞 허물어져가는 농기계 보관소나 간이 화장실 외벽에 그린 물고기·자전거·들판 그림을 보고 “어따 잘 그렸네” 하며 마음이 두 번 열렸다.  

꼬마들은 소식지에 사용할 제호 글씨체를 완성했다.
“마을 주민들이 미술 작가 같다”

월하리 주민은 자신들이 얼마나 예술적 ‘끼’가 다분한지 잘 모른다. 애초 작가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마을을 월하리로 점찍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고 티팟 기획팀 김상미씨는 말했다. “마을을 보고 주민들이 미술 작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단이나 텃밭 하나를 가꿔도 타이어나 의자 같은 생활 속 물건을 사용해 아기자기하게 잘 꾸몄더라.” 담장 하나 없이 나무와 화단 따위로 내 집 네 집을 나눈 마을 모양새, 초록색 바탕에 주황색 테두리를 두른 집 지붕들, 민트색 페인트를 칠한 김옥순 아주머니네 집 벽, 안재범 할아버지네 집에 아담하게 쌓인 빛깔 좋은 고동색 나무 장작더미, 웬만한 건 다 만들어주는 ‘아티스트 할아버지’ 전봉원씨의 오래된 재봉틀, 모두 월하리를 원래부터 ‘예술 마을’로 꾸며놓은 주역이었다.

할머니는 직접 부채를 장식했다.
그래서 작가들은 ‘원래부터 충만한’ 월하리 주민의 예술성을 끄집어내는 데 힘을 모았다. 집집마다 내걸 문패 나무도 직접 사포질하고 겉을 칠할 색깔도 주인이 고르고 동판을 뜰 글씨도 직접 쓰게끔 했다. 우체통을 꾸밀 장식도, 외등을 덮을 조각보도, 매주 마을에 돌릴 소식지의 바탕 그림도 모두 월하리 주민의 작품이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때때로 기가 막히다. 집 벽 가운데 드리운 빨랫줄을 보고, 영란 엄마 김옥순 아주머니는 “빨랫줄에 앉은 것처럼 벽에 참새를 그려보자”라고 제안했다.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이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작업 시간을 약속하고 함께 작품을 만들어내려면 무조건 ‘가가호호 방문’밖에는 없다. 그래서 작업은 길고 느리다. 그 긴 시간, 얼굴을 내비치고 신발 벗고 집 안에 들어가다보면 주민들은 마음을 열고 자기 재주와 살아온 이야기를 공개한다. 정을 쌓은 월하리 사람들은 감자를 그리다가 감자를 쪄서 내오고, 꽃 그림을 그리면서 월하리에 피는 초롱꽃·도라지꽃·백합꽃 이름과 쓰임새를 얘기해주고, 재봉틀 발을 굴리다가 30년간 미싱 하나로 먹고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준다. 연습하다 망친 화선지, 실이 잘못 박힌 헝겊은 물론 작가들이 받아 적은 주민들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마을을 꾸밀 소재로 활용된다.

마을회관 앞에는 주민과 손님이 함께 앉아 쉴 수 있는 2층 나무 정자가 들어설 계획이다.
손바느질과 일러스트를 그리는 서희정 작가는 몇 주에 걸쳐 월하리 지도를 만들어왔다. 처음에는 집주인의 이름과 나이를 몰라 ‘귀여운 안경 할머니 집’ ‘초록색 의자 집’ 따위로 이름표를 비워놨던 곳에 차츰차츰 정확한 세대주 실명과 나이를 적어나갔다. 여름 한철 주민 모두와 인사를 나눠 ‘이야기가 있는’ 마을 지도가 완성될 초가을 무렵, 월하리 작업은 마무리될 것이다. 곳곳에 예쁜 조형물과 그림이 완성되면 안보 관광 코스로 근처 노동당사와 땅굴을 찾는 외부 손님들이 호기심에 마을을 기웃거려볼 만도 하다. 밖에다 마을을 자랑할 수 있는 것도 흐뭇하겠지만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다. 일상예술창작센터 기획팀 권도윤씨는 “동네를 아름답게 꾸며 유명하게 만드는 것보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함께 뭔가를 만들어내는 이 시간 자체가 더 소중하다”라고 말했다. 예술은 ‘먼 곳’보다 ‘일상’에, ‘완성된 순간’보다 ‘채우는 과정’에 있었다.
마을미술 프로젝트팀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월하리는 ‘일상의 아기자기함’이 충만한 곳이었다. 작가들은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기자명 철원·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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