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 ⓒ시사IN 신선영

말이 많은 취재원은 대부분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캐내야 하는 기자로서는 이런 상대가 편하고 고맙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은 근래 만난 취재원 중 가장 말이 많은 이였다. 질문 하나에 30분, 40분 이상 답이 이어졌다. 하지만 수다스러운 사람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말을 즐기는 이들의 이야기는 여기저기 가지를 뻗어나가는데, 정 이사장의 화법은 깔때기를 연상케 했다. 모든 이야기가 72년 전 그날 노근리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지, 국가가 이들을 얼마나 소홀하게 대접했는지로 귀결됐다.

33년간 진상규명 작업을 해왔다는 그는 72년 전 사건 전개 과정을 무척 상세히 읊었다. 몇 월 며칠 몇 시, 어디에서 발포가 시작됐는지, 국가가 인정한 희생자는 몇 명인지, 미국 정부의 입장문에 어떤 표현이 들어가 있는지 모두 외우고 있었고, 기자에게 그걸 반복해서 일렀다. 자연히 남은 기억이 아니었다. 이기기 위해 갈고닦아온 칼날이다. “미국 정부나, 미국 눈치를 보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싸우려면 근거 없이 안 된다. 사실과 증거를 계속 제시하니 그제야 범행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정구도 이사장이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 일을 세상은 아직도 너무 모른다. 기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참사가 일어난 쌍굴다리에 데려가 아직 남아 있는 탄흔을 보여주고, 고인이 된 아버지와 함께 수십 년간 수집한 자료를 쥐여준다. 그러나 사건을 다룬 기사가 나와도 30년 전 이 일이 처음 알려졌을 때만큼의 반향은 일지 않고, 배·보상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정 이사장은 급해 보였다. 5시간여 취재하는 동안 그는 노근리 사건의 진상 외의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노력해 더 많은 사람들이 사건 진상을 알게 된다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리 없다고 믿는 것 같았다.

투사나 인터뷰이가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근리평화공원에 핀 연꽃을 발견한 정 이사장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을 때였다. 말도 표정도 없던 이때 그는 잠시 행복해 보였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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