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3공수부대 출신의 계엄군 신분으로 광주 진압에 투입됐던 광주 출신의 김귀삼씨.ⓒ시사IN 이명익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아저씨들의 흔한 술자리였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사람들과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한 공수부대원의 저녁 식사 자리였다. 나는 옆 테이블에 앉아 반찬을 집어먹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 집 동치미가 별미라는 둥 오리백숙도 잘하니까 또 오자는 둥 시시한 이야기가 한 시간째 오갔다.

내 쪽은 쳐다보지 않던 최병문씨와 눈이 마주친 건 어느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사실 내내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듯이,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는 듯이. “피비린내, 피비린내를 맡아본 적 있을런가. 그 많은 피가 고여 있었어.”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어떠한 접속사도, 맥락도 없는 벼락같은 말이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최씨는 순식간에 1980년 5월23일 광주 주남마을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검지와 엄지 사이를 좁혀 보였다. “이 정도, 5㎝ 정도… 선지, 밟으면 선지가 미끄덩하는 그 느낌….”

조사관이 꺼낸, 총탄 자국으로 벌집이 된 버스 사진을 보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다친 사람들은 버스 좌석 밑으로 들어가 있었어. 한 사람이 기어 들어가기도 어려운데 거기에 세 사람이나 엉켜 들어가 있었어. 사람이 살기 위해서라면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놀랐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두 손가락으로 이렇게 총알을 집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죽어 있더라고. 이렇게, 이렇게 총알을 집고, 자신이 집은 총알을 바라보면서….” 그는 눈물을 쏟았다.

올해 5·18 관련 기사를 쓰면서 지난해 5월 만났던 최병문씨가 종종 생각났다. 당시 함평에서 광주로 지원을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경찰관 아버지를 떠올리던 정원영씨가 순간 눈을 질끈 감을 때나, 시위대에 형제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폭력을 막아보고 싶었다던 광주 출신 공수부대원 김귀삼씨가 이미 다 마신 박카스 병을 만지작거릴 때, 그때 최병문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눈을 감을 때까지 저런 표정을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었을 누군가의 기름지고 윤기 있는 얼굴과는 도저히 겹쳐지지 않았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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