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양규 열전’에 담긴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에 대한 기록.

우리 역사에 이민족의 침입으로 맞은 ‘위기’라면 차고 넘치게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 이후 한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을지 모르겠다 싶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꼽으라면 아빠는 고려 현종 때 있었던 거란(요나라)의 2차 침입을 들 것 같구나. 이때 거란군을 이끈 것은 거란 최대의 전성기를 일군 성종(聖宗)이었어. 즉 거란 황제의 친정(親征)이지. 친정이란 그만큼 그 나라의 국력을 기울인 총력전을 펼쳤다는 얘기야.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던 북방과 대륙의 황제들, 즉 수 양제, 당 태종, 청 태종 모두 그랬다. 거란 성종 역시 기록상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어.

몇몇 성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요나라 성종은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격멸한 뒤 대군을 휘몰아 수도 개경으로 직행한다. 거란군은 거침없이 남하하고 고려 왕 현종은 허겁지겁 남쪽으로 몽진을 떠난다. 이때 고려의 상황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했어. 신하들이 죄다 도망쳐버려 임금의 몽진 대열을 호위할 기십 명의 대오조차 갖추지 못할 형편이었고, 시골 아전이 임금 앞에서 “내 이름 알지요? 내 이름이 뭐죠?” 하며 무례를 떨어도 임금이 대꾸도 못할 지경이었어.

무엇보다 가장 아슬아슬한 장면은 거란군의 선발대가 현종 일행에 십여 리 정도까지 육박했을 때일 거야. 당시 거란군을 만난 하공진이 “고려 남쪽 수천 리 밖으로 피하셨다”라고 허풍을 쳐서 거란군의 추격 의지를 꺾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병자호란 때 일어난 삼전도의 치욕을 일찌감치 겪었거나 중국 송나라가 겪은 정강의 변, 즉 황제가 적국에 끌려가는 참극을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런데 이 전쟁이 시작할 즈음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한국사의 영웅이 있다. 이름은 양규(?~1011). 전쟁 당시 벼슬은 서북면 도순검사. 정변을 일으키기 전 강조가 맡았던 벼슬이야. 양규는 강조의 후임이었던 셈이야. 기록은 없지만 강조가 엄선한 군인이 아닐까 해. 전쟁이 나고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은 양규가 지키던 흥화진 앞으로 몰려왔지.

양규는 이수화, 장호 등과 함께 1주일가량 거란군의 맹공을 버텨냈는데 이에 거란 성종이 편지를 보낸다. 계속 저항한다면 개경으로 쳐들어가 너희들 처자까지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이었지. 그런데 이때 이수화가 보낸 편지(물론 양규도 같이 썼겠지)들은 정중하면서도 단호하다. 성종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고나 할까. “어버이를 봉양하고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가져야 할 것이니 만약 이 도리를 어기면 반드시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이에 성종은 선물을 흠뻑 안기며 다시 항복을 권유하지만 양규 이하 장수들의 어조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괴로움에 허덕이는 저희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자애로운 마음을 절실히 바랍니다. 저희는 어떤 고난이라도 이기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이며, 분골쇄신 길이 천년의 왕업을 받들 것입니다.” 번역하면 ‘불쌍한 백성들 생각해서 물러가라.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운다’. 강조를 격파한 거란 성종이 이번엔 강조의 명령이라며 항복하라고 압박했을 때, 양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여기 임금의 명으로 와 있지, 강조의 명으로 와 있는 게 아니오.”

흥화진을 함락하지 못한 거란군은 흥화진 일원의 고려군을 견제하기 위해 병력의 절반을 떼놓고 남하해서 강조의 고려 주력군을 격파한다. 그리고 곽주(오늘날의 곽산)를 함락하고 이를 중간 거점으로 삼았지. 그러고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개경으로 직행했던 거야. 그렇게 개경을 점령했지만 요 성종은 개경에 열흘 정도 머문 뒤 철군해야 했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양규 등 서북면에 남아 있던 고려군의 대활약이었다.

위에 말한 곽주는 거란군이 꼭 확보해야 할 요충지였어. “최소의 희생과 최대한의 시간 절약을 위해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통로에서는 최소한의 중간 기지를 두기로 했고 그렇게 선택된 곳이 곽주”(〈전쟁과 역사〉 임용한 지음)였기 때문이야. 양규는 700여 병력으로 거란군 6000명이 지키던 곽주성을 공격해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이 성을 되찾는다. 거란군으로서는 보급로는 물론 돌아갈 길조차 막히게 된 셈이지. 급히 개경에서 철수한 거란군이 청천강을 넘어서자 양규, 김숙흥 등이 이끄는 고려군들은 호랑이에 굴하지 않는 고슴도치의 기세로 거란군을 찔러대기 시작해.

왜 전투의 정석대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상대는 황제가 이끌고 온 제국의 대군으로, 중앙군도 아닌 변방의 수비군 정도였던 양규 부대가 감당하기엔 압도적인 규모였지. 하지만 양규는 일점 두려움 없이 거란군의 뒤통수를 야무지게 쳐나간다. 그런데 양규는 단순히 적을 많이 죽이기 위해 전투에 매진한 게 아니었어. 이를테면 적들이 강을 건널 때 병력이 분산되면 그것을 틈타 격멸하는 살수대첩 같은 방식이 정석이겠지만, 양규는 “소수의 기동 부대로 쉬지 않고 거란군을 찾아 공격하는 방식을 택했다”.

고려는 거란의 세 차례에 걸친 침입을 맞아 항쟁하였고 여진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사진은 거란의 3차 침입 때 승리한 귀주대첩 민속기록화.ⓒ전쟁기념관 소장

그것은 바로 거란군에게 끌려가던 고려인 포로들 때문이었어. 인구가 많지 않던 북방 유목민족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한 쪽 사람들을 끌고 가 인적자원으로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몽골군도 그랬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 사람들도 그랬지. 거란군도 급박하게 철수하면서 고려인 수만 명을 후려치고 짓밟으며 끌고 갔던 거야. 양규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대군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기록은 건조한 숫자일망정 그 마음을 전하고 있어.

“무로대(武路代)에서 거란군을 습격하여 2000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 2000여 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梨樹)에서 전투 후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500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 1000명을 되찾았다. 사흘 뒤 여리참(余里站)에서 싸워 1000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 1000여 명을 되찾았다.”

빈약한 기록이나마 양규의 활약상으로 적을 물리친 숫자 뒤에 빠짐없이 되찾은 고려인 수가 따라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양규가 거란군의 목이 아니라 고려인의 자유를 전략적 목표로 삼고, 이를 실현하고자 집요하게 거란군을 따라붙고 들이쳤다는 거겠지. 거란군의 철수 시기는 음력 1월, 아직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 청천강 이북은 더욱 추웠겠지. 그 칼바람 속에서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채찍을 맞으며 끌려가던 고려인들에게 “양규 장군이 나타났다”라는 외침이 그야말로 복음이었을 거야. 그렇게 양규 부대가 구한 고려인이 자그마치 3만명이었단다. 당시 고려 인구를 300만 정도로 잡으면 인구의 1%를 구해낸 거야.

신출귀몰하던 양규 부대는 마침내 거란의 대군에 포위된다. 위 〈전쟁과 역사〉의 임용한 교수는 산줄기로 이어진 우리나라의 지형상 부대를 완벽히 포위하기는 어려우며, 지휘관이 몸을 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지만 양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병사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고자 했거나, 구출한 포로들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려 한 것 같다는 추정이지. 양규, 그리고 그와 함께 싸운 김숙흥을 비롯한 병사들은 압도적인 거란 대군에 맞서서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가 산화해갔어.

최전방의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성을 지켰고, 주력군이 붕괴된 가운데 자신의 변방 수비대만으로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고, 철수하는 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그들이 끌고 가는 동족을 구출하기 위해 적의 숫자가 얼마든 개의치 않고 적의 파도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진정 ‘한국사를 바꾼 영웅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들에 대한 기록이 빈약한 것이 아쉬울 뿐.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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