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위)이 고용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난제는 일자리 부족이다. 선진국 단계로 접어들면서 과거 같은 고성장을 기대하기 힘든 데다 최근 기술발전의 방향 역시 ‘고용 없는 성장’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특히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 2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6.9%로 전체 실업률(3.4%)의 2배 수준이다.

2010년대 이후 중앙은행(한국은행)이 실업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이는 사실 매우 낯선 주장이다. 통화 발행 기관인 중앙은행의 주된 역할은 ‘통화량 및 금리를 조절해 물가를 안정되게 관리’하고 ‘과다한 부채나 자산 거품이 터지면서 금융거래가 중단되는 사태(금융위기)를 차단’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행법에 따르면, 한국은행의 양대 책무는 물가안정(제1조 1항)과 금융안정(제1조 2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과 학계 일각에선 한국은행의 정책목표에 ‘물가안정’ ‘금융안정’ 이외에 ‘고용안정’까지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하려면 한국은행법을 다시 개정해야 한다.

사실 ‘중앙은행의 책무(정책목표)’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나라마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한국의 경우,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이 강행되던 개발독재기에는 정부가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한국은행법에 정해져 있었다. 정부가 경제 전반의 성장을 위해 통화를 많이 공급해야 한다고 전망한다면, 한국은행은 물가 인상 우려가 높은 시기라 해도 통화량을 늘려야 했다. ‘통화량을 늘린다’는 것은 시민 입장에선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1년 9월 개정 때 ‘금융안정’ 조항 포함

한국은행법이 크게 바뀐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 말의 개정(제6차) 당시다. 우선 정부가 한국은행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게 되었다(중앙은행 독립성). 한국은행의 책무 역시 ‘물가안정’으로 명시적으로 규정되었다. 투표로 정권을 차지하거나 유지할 수 있는 민주국가에서, 정부는 대체로 통화량 증가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경기를 촉진해서 시민들의 인기를 끌 수 있다. 한국은행법에 ‘중앙은행 독립성’과 ‘물가안정’ 조항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원칙적으론 한국은행이 경기와 상관없이 자주적으로 통화량 완화 또는 긴축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시 글로벌 중앙은행 차원의 대세이기도 했다. 1970년대 서방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인플레이션이 격화되고, 1980년대 이후엔 금융산업이 두각을 드러내면서(금융 투자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경제 현상이 바로 물가 인상이다. 물가가 오르면 투자수익률이 하락하기 때문), 각국 중앙은행들은 물가안정을 가장 중요한 책무로 정립하게 된다.

물가안정의 주요한 정책 수단은 당연히 기준금리 조정이다. 예컨대 물가가 지나치게 상승했다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높인다. 이에 따라 시중금리가 높아지면 경제주체들은 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민간의 소비 및 투자 여력을 줄여 총수요를 감소시키면서 물가안정이 달성될 수 있다. 반대로 물가가 지나치게 하락한 경우,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낮춰 물가를 상승시킨다.

2008년 12월, 미국 금융위기 때의 모습. 퇴거 명령을 받은 가족이 가구를 길가에 내놓고 있다.ⓒREUTERS

‘금융안정’ 조항이 한국은행법에 포함된 것은 2011년 9월의 개정(제8차) 때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서방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물가는 대체로 안정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시민과 기업들이 엄청난 돈을 빌려 잔뜩 높여놓은 자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불량 채무자로 전락하고, 각 국가 내부나 글로벌 차원에서 금융거래가 끊기는 미증유의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이 물가안정 이외에 과잉 부채나 자산 가격 급등 같은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거시경제 환경도 관리해야 한다는 시각이 글로벌 차원에서 형성되었다. 2011년 개정된 한국은행법 역시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수행할 때 금융안정에 유의해야 한다는 목적 조항을 추가하게 된 것이다. 다만 물가안정이 한국은행의 최우선 목적임을 고려해 금융안정을 물가안정보다 하위 책무로 도입했다. 이렇듯 한국은행에 부과된 법적인 정책목표는 국가경제가 마주한 위기 상황에 발맞춰 변화해왔다.

중앙은행의 정책목표에 고용안정을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글로벌 차원에서 형성된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선진국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저성장·저물가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물가가 낮은 수준으로 계속 유지되거나 심지어 떨어지는 현상(디플레이션)은, 소비자 입장에선 일견 바람직하게 보일 수 있지만, 경제 전반의 차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상품의 소비자들은 다른 상품의 생산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가가 계속 떨어진다면 소비자들은 ‘오늘’보다 ‘내일’ 사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구입을 늦춘다. 이는 생산자에게 큰 타격을 줘서 경제성장률을 낮춘다.

이에 따라 2010년대 이후의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어떻게든 적절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예컨대 2%)을 달성하기 위해 악전고투했다. 기준금리를 낮추고 새롭게 유동성을 발행해서 시중은행에 뿌렸다. 그런데도 물가는 상승하지 않았다. 경제성장률도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저성장·저물가가 지속되면서 한국 등 선진 자본주의국들의 고용 상황은 점차 악화됐다. 결국 각 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이 고용안정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했다.

더욱이 글로벌 학계와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의 상관관계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고정관념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물가가 오르면 고용이 늘어나고, 물가가 내리면 고용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고용이 늘어나면 물가가 오르고, 고용이 줄어들면 물가가 내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는 의미(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의 상충관계)이다. 예컨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높이면(통화긴축), 시민들이 돈을 빌리기 힘들게 되어 수요가 줄고, 이는 기업활동의 축소로 이어져 고용 사정을 악화시킨다. 한국이든 다른 선진 자본주의국이든 고용이 중요하지 않았던 시기는 없었지만, 중앙은행에 고용안정 책무를 기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명료하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책무인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이처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두 가지 목표 중 물가안정을 중앙은행에 맡겨왔다고 볼 수 있다.

2021년 11월, 시민들이 실업급여 신청을 위해 대전고용복지플러스센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물가안정과 고용안정 사이의 상충관계’라는 믿음에 금이 가는 상황이 발생한다. 국제기구나 유명 대학 등 권위 있는 연구기관이 실증 데이터로 살펴본 결과 ‘물가 인상과 고용 사이의 상충관계가 약화됐다’는 분석이 잇따라 등장한 것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2017년 11월 한국은행이 발간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서 추정한 바에 따르면 선진국뿐 아니라 한국 역시 두 목표 사이의 상충관계가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금리인하로 경기를 부양해서 고용을 늘려도, 물가가 ‘우려했던 만큼’ 크게 오르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중앙은행들로서는 정책 수단(금리인하, 통화량 증가 등)을 사용할 때 안아야 했던 부담감(높은 물가인상률)을 떨칠 수 있는 연구 결과였다. 이는 곧 물가안정을 위해 고용안정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줄어들었다는 주장으로 연결됐다.

이런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부 국가의 중앙은행들은 고용안정 책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경우 1977년부터 ‘최대 고용’ 책무가 부과되어 있었으나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이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0년 하반기부터 ‘통화정책 결정문’에 최대 고용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며 ‘중앙은행이 고용안정의 중요성을 받아들였다’는 신호를 민간 시장에 전송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2012년 고용안정 책무를 받아들였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의 경우 법 개정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2013년 이후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칠 때 고용안정을 언급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행은 지난 10여 년 동안 ‘중앙은행 책무에 고용안정을 포함시키는 것’에 꾸준히 반대 의견을 펼쳐왔다. 가장 큰 이유는 정책 수단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정책 수단이 주로 금리 및 통화량 조절에 한정된 상황에서 정책목표가 증가하게 되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지난해 2월 이주열 전 한국은행 총재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나가 “고용안정과 금융안정은 지금 단계에서 보면 상충되기 십상이다”라고 말했다. 고용을 늘리기 위해선 금리를 낮춰야 하는데, 이는 자산 버블의 심화를 불러일으켜 금융안정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오랫동안 한국은행의 고용안정 책무와 관련된 논의는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 국회에서 관련 질의가 나올 때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질의한 국회의원은 한국은행 측에 반박하기보다는 ‘방안을 궁리해보라’며 넘어가기 일쑤였다. 논의가 진전되지 못한 것에는 한국은행의 책임도 있었다. 한국은행은 매번 “(고용안정 관련 목표까지 수행하기에는) 정책 수단이 부족하다”라는 의견을 내왔을 뿐, 막상 어떤 정책 수단이 더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고용에도 신경 쓴다’ 말만 할 게 아니라…

2020년 10월16일 국정감사에서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은행이 필요로 하는 정책 수단에 어떤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이주열 전 총재는 이렇게 답변했다. “사실상 고용과 관련해서 통화 당국이 구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수단을 주십시오’라고 할 게 지금 생각이 안 날 정도다.” ‘정책 수단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실질적 논의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한국은행 부총재보를 지낸 강태수 카이스트 초빙교수(경영대학)는 우선 한국은행이 이주열 전 총재 임기 8년 동안에 관한 자체평가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용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주장해온 한국은행이 지난 8년간 무엇을 어떻게 고려했는지, 그 효과는 어떠했으며, 어떤 한계점이 있었는지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주열 총재는 국회에서 관련 질의를 받을 때마다 “효과가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도의 애매한 발언을 반복해왔다. 강 교수는 “고용안정 목적을 가진 연방준비제도나 영란은행도 이를 위한 정책 수단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여건이 비슷한 한국은행은 이제껏 무엇을 해왔는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4월1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에 출근하며 질문에 답하는 모습.ⓒ사진공동취재단

동시에 강태수 교수는 고용안정에 필요한, 부가적인 정책 수단에 대한 실질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금융안정 목적과 고용안정 목적이 충돌하지 않도록, 한국은행에 금융감독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2012년 영란은행에 고용안정 책무를 추가하며 금융감독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국회는 총재를 불러다 호통치고, 총재는 틀에 박힌 답변을 할 뿐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제는 제대로 된 논의를 통해 청년과 실업자들에게 도움이 될 방안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2022년 4월 현재, 한국은행의 고용안정 목표 도입 논란은 잠시 수면 아래로 들어간 상태다. 코로나19 피해가 줄어들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정책목표’라는 문제의식이 일단 떠오른 이상 그대로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부터 물가상승 추세가 진행 중인데도 실업률은 여전히 높고 이에 더해 금리인상 가능성이 큰 상태다. 만약 한국은행이 이후 기준금리를 더 올리고 여기에 실업 문제까지 겹친다면 ‘고용안정에 대한 중앙은행의 책무’가 다시 강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임 한국은행 총재로 지명된 이창용 전 국제통화기금(IMF) 국장은 통화정책을 묻는 질문에 “물가, 성장, 금융안정, 거시경제의 전반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단지 선언일지, 현실적 변화로 귀결될지에 따라 앞으로 4년간 한국 경제가 마주할 그림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기자명 주하은 기자 다른기사 보기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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