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거칠어지고 있다. 한국어의 거칢은 한국 사회의 거칢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 언어의 거칢이 한국 사회를 다시 거칠게 만들기도 한다. 언어 이전에 실재가 있으나, 그 결정력이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한국어의 거칢의 근원지는 조폭사회가 아니라 정치권이다. 어쩌면 정치권이 조폭사회와 닮아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정치권에서 휘날리는 언어의 거칢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걱정이다. 아름다운 말을 골라 쓰자는 게 아니다.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지키자는 말이다.

거친 언어가 담고 있는 것은 증오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정치계급과 시민사회가 증오로 분열돼 있다는 뜻이겠다. 한국어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국어순화론자들이 생각하듯, 외래어의 범람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에 담긴 증오가 한국어에 상처를 낸다. 한국어가 거칠어지고 증오를 담게 된 원인을 인터넷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그럴듯은 하나, 인터넷 언어의 거칢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사이버 세계의 증오가 현실 세계로 나오는 정도보다는, 현실 세계의 증오가 사이버 세계에 반영되는 정도가 훨씬 크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더 거칠어진 한국어

언젠가 한 시인은 “정치는 한국 남자들의 히스테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이 남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정도 차이는 있겠으나, 정치는 한국인의 히스테리다. 서로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 얘기를 나눌 때, 화제가 정치 쪽으로 나아가는 법은 좀처럼 없다. 상대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는지를 안 뒤에야 입을 열게 된다. 같은 진영에 속한 사람끼리는 편하게 얘기를 나눈다. 상대가 다른 진영에 속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정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만다. 싸울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말이다. 택시 기사가 정치에 대해 말을 건네도, 그 기사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는지를 확인하기 전에는 대답하기가 꺼려진다.

나는 앞에서 한국어의 거칢의 근원지가 정치권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정치권은 입법부를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의 정치권이 아니다. 내가 가리키려 하는 것은 ‘언론’이라는 탈을 쓰고 각 정치 진영의 선전국 노릇을 하는 신문들이다. 한국 사회의 이른바 메이저 신문사라는 것은 정상적 의미의 언론이 아니라, 부자를 대표하는 정파의 선전국이다. 그들은 한 지면에서는 화합을 외치면서, 다른 지면에서는 증오의 언어를 뿌려댄다. 거대 보수 신문 셋의 발행부수 총합이 만일 600만 부라면, 그들은 매일 600만 번 증오의 언어를 퍼붓는 셈이다. 한국어가 거칠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보수 신문들은 ‘좌파’ 신문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른다(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의 극우 보수 담론에 등장하는 ‘좌파’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더블스피크’의 일종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온건 우파 진영을 ‘좌파’라 부르고,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극좌파’라 부른다).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판단하기에, 증오 언어에 대한 변태적 사랑은 보수 신문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다. 그들은 제 정적이라고 상정한 정파를 학대하면서 한국어를 학대한다. 이 판단은 내가 속한 ‘진영’의 편견에 휘둘린 결과일까? 변명하자면, 나는 어떤 진영에도 속해 있지 않다. 굳이 규정하자면, 민주주의적 좌파와 함께 살 준비가 돼 있는 온건한 우파 정도가 될 테다.

한국어의 거칢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더 악화하고 있다. 한 여당 국회의원이 일찍이 발설한 ‘좌파 적출’ 작업과 이에 대한 저항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내 ‘진영적 편견’일지 모르겠으나, 말의 거칢은 지금 권력을 쥔 쪽이 더하다. 대개 싸움에서는 밀리는 편의 언어가 더 거칠어지기 마련인데, 어찌 된 일인지 ‘좌파적출 작전’에서는 강자의 언어가 더 날이 서 있다. 그리고 그 거칢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더 심해지고 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것이 권력 쪽의 생각이어서 그런지 모른다.

최근 한예종 사태나 진중권씨에 대한 공격도 그렇다. 좌파를 적출하겠다는 ‘충정’은 이해하겠으나, 그 언어가 너무 졸렬하다. 굳이 상대방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서 쫓아내야만 속이 시원하겠는가? 거친 언어란 꼭 쌍시옷이 들어간 언어가 아니다. 증오를 야비함으로 버무린 언어가 거친 언어다. 그 증오의 큰 부분은 소통 부재에서 말미암은 것일 테다. 언론학자들이 최근 거듭 강조하는 소통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자명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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