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재심 현황’ 자료집을 내고 피해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시사IN 이명익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질식한 암울한 시대였다. 1974년 5월17일, 오종상씨(당시 33세)는 경기도 평택 읍내에서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잡담을 나누던 중 박정희 정부의 ‘분식 장려운동(1960~1970년대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쌀에 잡곡을 섞어 먹게 했던 정부 주도 운동)’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고위 관료들과 부유층은 분식이라 해도 국수 약간에다 달걀과 육류가 태반인 분식을 하는데 그럴 처지가 못 되는 국민에게까지 강제로 분식을 따르라고 하는 정부가 나쁘다.”

오씨는 그날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하지만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에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그냥 옛 속담이 아니었다. 그해 6월6일, 오씨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중앙정보부(중정) 요원들에 의해 서울 남산의 조사실로 끌려갔다. 평택 버스 안에서 한 정부 시책 비판 발언이 화근이었다. 수사권도 없는 중정은 오씨를 영장 없이 체포 연행한 뒤 수사 장소도 ‘서울시 경찰국’으로 허위 기재했다. 이어 오씨를 무차별 구타하며 반국가 활동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결국 오씨는 버스 안 발언 때문에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되었다. 한 달 만에 기소된 오씨는 1974년 8월8일 비상군법회의로부터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오씨가 항소하자 비상고등군법회의는 그해 9월23일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으로 감형했다.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오씨는 3년간 실형을 살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오씨처럼 황당한 사건에 연루돼 처벌받은 국민이 모두 1140명에 달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최근 이런 피해 사례들이 담긴 ‘긴급조치 위반 재심 현황’ 자료집을 내고 피해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자료는 1기 진실화해위 당시 수집 분석한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문 1412건을 토대로 했다. 긴급조치 피해 사례는 ‘음주 대화 또는 일상생활 도중 박정희와 유신체제 비판 발언’으로 처벌받은 경우가 282건으로 가장 많았다. 유신 반대 유인물 살포 등 학생운동으로 곤욕을 치른 사례도 191건에 달했다. 재야인사, 정치인, 종교인, 교수 등 지식인이 반유신 활동을 벌이다 처벌받은 경우는 85건이었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회 동의 절차 없이 계엄과 국회 해산을 선포한 상태에서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야당은 물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다수 시민과 학생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이를 막기 위해 박 정권은 유신헌법 제53조에 규정된 ‘긴급조치’ 조항을 활용했다.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발동되었다. 이에 따르면, 유신헌법에 대한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속해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자로 맨 처음 구속된 이가 장준하 당시 민주통일당 최고위원과 재야인사 백기완씨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긴급조치를 확대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 긴급조치 4호, 고려대 휴교령을 위한 긴급조치 7호 등이 단행됐다. 일련의 긴급조치 중 가장 악랄한 사례로는 9호가 꼽힌다. 1975년 5월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단지 정부를 비판하거나 불만을 말해도 모조리 구속시키도록 했다. 긴급조치 9호 이후의 시민들은 일상적 대화를 나누다가 무심코 유신체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만 꺼내도 반국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구제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긴조’ 피해자들

경기도 의정부에서 축산업을 하던 김○종씨는 1975년 10월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체포돼 징역 1년6개월을 살았다. 친형이 열차에 치여 사망하자 억울함을 토로한 것이 화근이었다. “박정희는 나쁜 놈이다. 세금 다 어디다 쓰고 철도 건널목에 간수 하나 두지 않아 내 형을 죽게 만들었다”라고 내뱉었던 말이 긴급조치 9호 위반에 해당돼 구속된 것이다. 행상을 하던 경북 상주 주민 강○준씨는 1975년 11월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박정희 정치는 ×도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떠들었다는 이유로 붙잡혀가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충남 홍성에 사는 농민 장○갑씨는 그 무렵 버스 안에서 “박정희는 고령 박가인데 쌍놈이 대통령을 해먹는다. 김종필도 김해 김가로 옛날 역적의 자손인데 국무총리를 해먹는다”라고 말했다. 그 역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 뒤 징역 3년, 자격정지 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경북 안동 주민 김○기씨는 1975년 11월 동네 사람들과 잡담 중 “박 대통령이 새마을 사업을 천천히 해도 되는데 너무 억압적으로 한다”라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철권통치가 종식된 이후에도 긴급조치는 1년여 동안 기승을 떨쳤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주도한 개헌(제5공화국 헌법)으로 긴급조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그 상처와 후유증은 치유되지 않았다. 피해자나 유족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억눌렸고, ‘빨갱이니 긴급조치로 처벌됐지’ 같은 ‘2차 가해’가 판쳤다.

이런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집중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계기는 2006년의 1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이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긴급조치를 ‘불법적 국가폭력’으로 규정했다. 대법원은 2010~2013년에 긴급조치 1·4·9호에 대해 ‘위헌·무효’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도 2013년 긴급조치 1·2·9호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 1·4·9호를 위반한 국민 1204명 중 1050명이 재심 대상에 올랐다(이미 면소판결을 받은 154명 제외).

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 조치가 암초에 부딪혔다. 긴급조치 피해자 간담회 자리에 참석한 장영달 전 의원(민청학련계승사업회 대표)은 그 책임자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명했다. “박근혜 정부의 김기춘 전 실장은 유신 시절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공작 기획한 장본인이라는 이력 때문에 진실화해위 활동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긴급조치 등 피해자 문제 해결에 태클을 걸었다.”

지난해 말, 대검찰청은 긴급조치 피해자 864명에 대한 재심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을 진행한 경우는 205건(218명)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많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구제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긴급조치 피해자 200여 명이 모여 ‘민주인권평화를 사랑하는 긴급조치 사람들’이라는 사단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 김하범 대표는 “긴급조치 피해자 대부분은 ‘막걸리 반공법’으로 처벌받은 일반 시민들이다. 파악한 바로는 183명이 아직까지 제대로 피해 구제를 받지 못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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