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5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시내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부르카를 벗고 청바지를 입은 여성들이 과감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기습 항의 시위’에 나선 것이다. 시아파 종교학교에 삼삼오오 모인 여성 300여 명은 국회를 향해 3km를 행진했다. 처음에는 평화롭게 시위가 시작되었지만 곧 남성들이 현장에서 조직한 반대 시위대 1000여 명이 모이더니 시위 여성들을 에워싸고 욕설과 돌팔매질을 퍼부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성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흩어지거나 버스로 도망쳤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이 몸매를 드러내며 청바지를 입는 것도, 부르카를 쓰지 않고 얼굴을 다 보여주며 남자들 앞에 서는 것도 용납되지 않기에 이날의 여성 시위자들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몇몇 여성 시위자는 남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가면서도 찢어진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아프간 TV는 “이 시위의 주도 세력은 카불 대학교의 여학생, 여성 권리 운동가, 탈레반 정부에서 비밀리에 여성운동을 이어온 아프간 여성혁명연합(RAWA)의 조직원이다”라고 방송했다. 

지난 4월15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청바지를 입고 얼굴을 드러낸 여성 300여 명이 여성의 삶을 옥죄는 ‘가족법’ 통과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남편의 아내 강간’ 합법화한 가족법

이 시위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통과된 가족법에 항의하는 데서 비롯됐다. 새로 개정된 아프간 가족법은 ‘외출 시 남편의 허락을 얻어야 하고’ ‘취업·교육·병원검진 등에서 남편의 동의가 필요하며’ ‘여성을 제외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만 자녀 양육권을 부여하는’ 따위 조항이 들어 있다. 특히 최소 4일에 한 번은 여성이 남편의 잠자리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규정한 조항은 유엔과 산하 원조기구 등으로부터 남편의 아내 강간을 합법화했다는 강한 비난을 받았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올해 8월 대선에서 보수적인 시아파 모슬렘의 표를 얻기 위해 이 법안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 법안은 혐오스럽다”라고 말했고,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이 법안은 아프간의 진전보다는 후퇴를 가속화할 위험이 크다”라고 했다.

이렇게 미국과 영국이 이 법안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여성 상황이 9·11 테러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현지 분위기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특히 이 아프간 가족법은 과거 탈레반 정부의 정책과 비슷하다. 미국이 아프간 전쟁을 일으킨 것은 첫째가 9·11 테러를 저지른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가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2001년 미군이 카불에 진격하기 직전 로라 부시 여사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남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목적은 아프간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발언은 미국 국민에게 미국이 정의감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른다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7년6개월이 지난 지금의 아프간은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프간의 현지 언론 아프간 옵서버의 여성 기자 쉬키버는 “아프간 가족법이 통과됐다는 것은 아프간이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1년 미군이 아프간에 들어왔을 때 많은 여성이 희망을 가졌다. 이제 학교와 직장도 다닐 수 있고 여성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꿈을 펼칠 수 있다는 그들의 말 때문이다. 여학생들은 조심스럽게 학교도 다녔고 여자 경찰에 응시했으며 세상 밖으로 나오려 했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탈레반 시절로 돌아가는 분위기이다. 이 가족법에 따르면 나도 무슨 일을 할 때 남편의 허락이 필요하다. 나도 기자직을 그만두고 언제 다시 집안에 갇힐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여성 기자라는 이유로 살해 위협에 계속 시달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지금의  상황을 불안해하는 것은 탈레반이 아프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면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테러가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으로는 경찰 최고위직에 오른 칸다하르 주 반여성범죄국장 말라라이 카카르(당시 43세)는 지난해 9월28일 탈레반에게 암살당했다. 칸다하르 주정부는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던 카카르가 오토바이를 탄 테러리스트의 총격을 받아 즉사했으며, 함께 있던 여사의 아들은 중퇴에 빠졌다”라고 발표했다.

여성 시위에 반대하는 남성들의 시위 모습.
등교하는 여학생에게 ‘염산 테러’

곧바로 요세프 아마디 탈레반 대변인은 “우리가 카카르를 살해했다. 앞으로 경찰이 되겠다고 나서는 여성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탈레반의 거점인 칸다하르 주에서 경찰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여성이며, 경찰국 소속 첫 여성 수사관이었고 아프간 여성에게 희망의 상징이던 그녀가 암살당한 이유는 “여자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주정부 여성국장, 여성 경찰, 여학교 교사 등이 탈레반 세력에 살해당하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특히 카카르처럼 여성이기에 유명해지면 그 즉시 탈레반의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 아프간에서 등교하는 여학생을 대상으로 무차별 염산 테러를 하는 것은 더 이상 큰 뉴스가 아니다. 〈카불 위클리〉의 하뮨 기자는 “테러범들은 장난감 총에 든 염산을 여학생들에게 발사한다. 이 액체에 맞은 여학생들이 얼굴에 화상을 입고 실명 상태가 되었다. 여학교 교장이 탈레반에게 참수되는 일도 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동부 카피사 주에서 여학생들이 있는 교실에 독가스를 살포해 수십명이 실신하는 사고도 있었다. 그 학교는 거의 폐쇄되었다. 부모들이 여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부모에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전했다. 이 밖에도 여성 국회의원이나 여배우, 여기자 등 아프간 전쟁 이후 꿈에 부풀어 사회 각층에 진출했던 많은 아프간 여성 인사가 끊임없이 살해 협박에 시달린다.

미국의 ‘여성해방 전쟁’은 실패작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여성들이 다시 고통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프간 사람들 사이에 아직 여성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율법 ‘샤리아(Shariah)’가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에 의해 여성에 대한 인식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쉽지 않다. 아프간 여성혁명연합은 탈레반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하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여성단체이다. 필자는 이들이 탈레반이 물러난 2001년 이후에도 수면 위로 나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어렵게 통화가 된 이 단체의 조직원 마리암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탈레반을 쫓아냈어도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정서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은 아프가니스탄의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다. 여성에 대한 계속되는 테러는 탈레반이 저지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행동대원일 뿐이다. 여성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대다수 아프가니스탄 남성의 묵인이 탈레반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을 죽일 수 있는 배경인 셈이다. 우리는 이 정서를 알기에 아직도 지하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주 반여성범죄국장 말라라이 카카르(위)는 탈레반에게 살해됐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해방이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 최초의 조짐은 2005년 톨로 TV의 샤리마 레자위라는 여성 앵커가 살해된 사건에서부터 나타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이효리’ 정도로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이 여성 앵커는 얼굴을 드러내고 남성 앵커와 단둘이 방송에 나온다는 이유로 오빠에게 ‘명예 살인’을 당했다. 2005년 당시 필자와 만난 샤리마의 오빠는 ‘이웃들의 계속되는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예 살인을 선택했다고 실토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탈레반도 없는데 왜 명예 살인이 일어났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언론인보호협회(CPJ)의 밥 디츠는 “그 사건은 미국 언론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여성해방을 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은 아프간 전체에 너무도 견고했고, 미국 정부가 아프간 여성해방을 이유로 전쟁을 한 것은 섣부른 착각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미국 언론계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아프가니스탄 헤라트에 있는 ‘바느질 부인회’에 다니는 조리야(27)는 오늘도 바느질감 바구니 속에 책을 숨기고 모임에 간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은 두 아이의 어머니이다. 어렵사리 통화가 된 그녀는 그 모임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기에 인터뷰가 가능했다. 그녀는 “나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뜻이 맞는 몇몇 문인 여성과 이렇게 비밀리에 셰익스피어나 괴테 같은 문학을 공부한다. 우리가 비밀리에 바느질하는 척하고 만나는 것은  2005년 시집을 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맞아죽은 라디아 안주만(당시 25세) 때문이다. 우리도 문인으로 공개적으로 활동하면 언제 우리의 남편에게 맞아죽을지 모른다. 우리는 탈레반보다 남편과 아버지, 오빠가 더 무섭다. 바느질은 아프간 여성이 유일하게 의심받지 않는 모임이기에 우리는 실과 옷감 속에 책을 숨기고 만난다”라고 말했다.

7년6개월이나 지난 아프간 전쟁은 아직도 아프간 여성들의 인권을 해결하지 못했다. 개전 당시 너무나 당당하게 말했던 아프간 여성 인권이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데 대해 미국이 생각해낸 해결 방법은 겨우 미군 증파인 것이다. 퇴임 직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국민 5000만명을 자유롭게 했고 평화를 달성했으며 압정으로부터 해방시켰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함께 인터뷰를 했던 그의 부인 로라 여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무슨 근거로 아프간의 여성이 해방되었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또다시 시작되는 오바마 대통령의 아프간 전쟁에서도 아프간 여성 현실은 전쟁의 정당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게 한다.

기자명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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