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가 생긴다고 청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김종휘 하자센터 부소장 말에 한국·일본 양국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6월1~5일 서울시가 주최한 ‘2009 서울 청소년 창의서밋’ 행사 중 하나로 치러진 ‘한·일 청년 사회적 기업가 특별회의’ 풍경이다.

특별회의에 앞서 가진 심포지엄에서 아쓰코 핫토리 씨(CAC·사회기업가연구네트워크 대표)는 일본 내각부가 5년에 한 번꼴로 실시하는 ‘세계 5개국(한국·미국·스웨덴·독일·일본) 청년 의식조사’ 결과를 소개하며, 한국(78.6%)과 일본(50.6%) 공히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게 될 때가 있다”라고 답한 비율이 높았음을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청년, 하고 싶은 일을 정하지 못하는 ‘로스 제네(로스트 제너레이션)’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한국 청년 세대, 이른바 88만원 세대가 처한 상황도 흡사하다. 김종휘 부소장에 따르면, 경쟁 만능·시장 만능·돈 만능으로 치달아온 한국 사회에서 아동기부터 선행학습에 휘둘리며 ‘나만 처지는 건 아닌가’ 경쟁과 눈치 속에 살아야 했던 ‘불안한 청년’들이 급기야 당도한 지점이 ‘불감증 청년’이다. ‘인생의 긴 계획일랑 꿈도 꾸지 못하고 하루살이처럼 생존하고 적응하기 바쁜’ 이 불감증 청년들에게는 ‘무엇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없다. 옆 사람이 뭘 먹고 사는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관심 없다. 오직 자기라는 감옥 안에 갇혀서 그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일자리만 만들어내면 청년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마냥 떠드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김종휘 부소장은 일갈한다. 그보다 지금 20대에게 필요한 것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일을 하는 것인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것이다. 청년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로서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사회적 기업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중퇴예방연구소 대표 야마모토 시게루 씨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 사회적 기업가가 되어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뭐가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 내가 생각해낸 대답은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도와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내가 살아가고 일해야 할 이유를 찾는 계기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게 사회적 기업이 지닌 잠재력이다. 단, 관계를 맺는 방식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창의적인 비즈니스가 청년을 몰입하게 할 것이다”라고 핫토리 씨는 말했다. 그렇다면 한·일 청년들은 어떻게 창의적인 사회적 기업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행사에 참가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오카베 도모히코 씨(왼쪽)는 비어 있는 쪽방을 저렴한 숙소로 개조해 배낭 여행객을 끌어들였다. 맨 위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프런트 입구.
슬럼가에 전 세계 배낭 여행객을 유치하다

건축가인 오카베 도모히코 씨(고토랩 대표)가 항구도시 요코하마의 슬럼가인 고토부키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4년이었다. 고토부키는 일본 내 3대 쪽방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부두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 거개가 이곳 숙박업자들이 운영하는 다다미 3장 크기(약 1.5평) 쪽방에 살았다. 도모히코 씨가 이 마을을 처음 조사했을 때 간이 숙박소는 약 120곳, 쪽방은 8600개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문제는 이 중 1500개가량이 빈 방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품 경제가 꺼지고 항만노동이 기계화되면서 1만명에 달하던 인구가 6000명가량으로 줄었다. 남은 인구의 50% 이상은 65세 이상 고령자였다. 생활보호 대상자도 전체 주민의 80%를 웃돌았다. 한마디로 희망이 없는 동네였다. 낮부터 부랑자가 술에 취한 채 거리를 떠돌고 쓰레기와 못 쓰는 차가 곳곳에 버려져 있는 이 거리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 책자에 ‘위험 지역’으로 분류돼 있었다.

도모히코 씨는 이 거리에 사람이 찾아들게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것만이 마을을 살리는 길이었다. 2005년 그는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남아도는 ‘쪽방’을 값싼 ‘숙소’로 개조해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으자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이를 위해 숙소 주인들을 설득하고 마을에 공동 공간도 만들었다. 기존 건물에 딸린 공간만으로는 여행객이 모일 프런트나 라운지를 도저히 만들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마을 전체가 숙소촌(빌리지)이 된 셈이었다.

그러자 전 세계 배낭 여행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본 물가는 비싸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요코하마 호스텔은 1박 가격이 3000엔(싱글 기준)에 불과하다. 도쿄~요코하마가 전철로 겨우 40분 거리인 데다, 요코하마 자체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숙소촌 홈페이지(yokohama.hostelvillage.com)에 가면 인근에서 열리는 행사가 늘 소개된다. 일본 내 여행객도 이 마을을 찾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아예 이 마을에 눌러앉는 예술가도 생겨났다.

도모히코 씨는 이 과정에서 주민이 소외되지 않게끔 세심하게 배려했다. 이를테면 이들이 파트너십을 맺어 운영하는 숙소는 총 4곳인데, 이 중 6층짜리 숙소의 경우 관광객이 머무르는 숙소는 1층과 5층 2개 층에 한정된다. 나머지 층은 주민이 그대로 거주한다. ‘1평 평상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 곳곳에 놓일 평상을 주민과 함께 만들고, 길바닥을 다시 포장하거나 길거리 화단을 가꾸는 일도 주민과 함께한다. 영상으로 보이는 이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마을에 몰려든 젊은 외지인들이 무기력하던 이들의 삶을 바꿔놓은 것이다.

선거 당일, 투표소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고토부키 거리를 수놓았다.
2002년 시장 선거 때에는 선거 참여 프로젝트도 전개했다. 자기에게 투표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던 주민들을 유권자로서 각성시킨 것이다. 선거 전야에는 기동전을 폈다. 날렵하게 디자인한 화살표만 따라가면 투표장으로 갈 수 있게끔 거리 전체를 화살표 물결로 뒤덮었다. 그 결과 2006년 시장 선거 때에는 후보자들이 이곳에 찾아와 처음으로 유세를 했다. 마을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급기야 지역 생태계 전체가 변하는 기적이 고토부키에 생겨난 것이다.

니트족에 투자하라

일본 세이조 대학 매스커뮤니케이션학과를 중퇴한 뒤 미국에 유학 갔다는 이력서를 보고 ‘미국 어디서 공부했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학교를 제대로 다닌 일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스스로가 사회 부적응자였다고 말하는 구도 게이 씨는 일본 비영리 법인인 소다테아게넷(www.sodateage.net) 이사장이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니트족, 프리타족 같은 사회 부적응 청년의 사회 복귀를 돕고 있다.

그도 처음에는 취직을 하려 했다. 면접관을 만날 때마다 그는 ‘세 가지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양복은 입지 않는다, 만원버스·전철을 타고 출퇴근하지 않는다, 늘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는 곳은 없었다. ‘그러면 내가 직접 차려야겠군.’ 이게 회사를 만든 첫 동기였다고 그는 말한다. 기왕 뭔가 해보려면 청년을 상대로 하는 게 좋을 듯했다. 일본·미국을 떠돌며 청년 실업의 현실은 이미 넘치게 목격했다. 소속 없이 떠도는 니트족이 일본에만 64만명이었다. 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청소년은 8만명, 대학이나 전문대를 중퇴하는 청년은 14만명이었다.

구도 게이 씨(왼쪽)는 청년들의 사회 적응을 돕는다. 위 오른쪽은 소다테아게넷 홈페이지.
이런 청년들은 사회를 향해, 어른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기성세대는 다시 “요즘 젊은 애들은…” 하고 혀를 차곤 했다. 이런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청년의 자립을 국가가 돕는 것은 ‘경비’가 아니다. ‘투자’이다. 청년들이 자립하는 데 성공하면 국가 재정도 튼튼해지니 이만한 ‘노 리스크 하이 리턴(No risk, High return)’ 사업이 따로 없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그는 청년 자립을 지원하는 사업을 한다. 개인 고객도 받지만 정부·기업·학교로부터 위탁받는 사업 비중이 60%에 달한다. 일할 의욕을 잃었거나 사회적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니트족·프리타족을 위해 다양한 직업군을 예비 체험해보도록 하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킨다. 중·고등학교에 ‘커리어 교육 지원 사업’을 나가기도 한다. 탁상에서 짠 커리어 교육이 아니다. 니트족·프리타족 청년에게 ‘당신이 학창 시절 뭘 배웠다면 지금보다 나아졌을 것 같은지’ 물은 다음 이를 바탕으로 교육 내용을 채워나간다.

2001년 설립한 소다테아게넷은 2009년 현재 직원 50명, 연 매출 2억 엔에 달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구도 게이 씨는 “사업가 자신이 스스로를 사회적 기업가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업가 자신은 비즈니스를 하는데, 여기 사회성이 있다고 주변에서 평가해주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의지’ 못지않게 냉철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어야 기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형 사회적 기업, 아시아 진출을 꾀하다

노리단을 더 이상 ‘재활용 악기를 연주하는 그룹’ 정도로만 여기면 곤란하다. 2004년 단원 11명으로 출발한 노리단은 2009년 5월 말 현재 87명을 고용한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제외한 지난해 순매출이 12억3000만원이다. 사회복지나 생태 영역이라면 몰라도, 놀이를 비즈니스로 승화시킨 사회적 기업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노리단의 앞날이 주목되는 이유다.
퍼포먼스 공연으로 워낙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공연은 노리단의 한 축일 뿐이다. 노리단을 이루는 또 다른 축이 교육과 디자인이다. 노리단 단원은 생활 주변에서 재료를 찾아 직접 악기를 만드는가 하면, 그 악기로 거리에서 또는 실내에서 공연을 하고, 또 일반인을 상대로 창의성 교육을 진행하는 1인 3역을 지향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배우이자, 선생님이자, 디자이너 겸 장인인 셈이다.

‘한·일 사회적 기업가 대회’에서 홍대용 대표(오른쪽)가 노리단 활동(배경 화면)을 설명하고 있다.
홍대용 대표에 따르면 노리단이 지향하는 가치는 두 가지다. “버려지는 것들을 새롭게 살리자” “하고 싶은 일로 세상을 바꾸자”가 그것이다. 버려진 것은 누군가의 삶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모여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낼 때의 기운이 노리단에는 충만하다. 노리단에는 20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교를 자퇴한 뒤 무력감에 잠만 자다가 노리단을 만난 후 삶의 의욕을 되찾고 탈학교 10대 노리단원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다는 피트(26), 박제화된 미술보다 살아 있는 미술을 가르치고 싶어했던 교사 지망생 농담(30), 패자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노리단에 합류했다는 연극배우 팅(41)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노리단을 꾸려간다.

노리단은 최근 일본에 도쿄 지사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지난 4월 도쿄 시부야 거리에서 공연한 데 이어 오는 9월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를 방문할 계획도 갖고 있다. “외국에는 아직 한국의 사회적 기업 모델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에 거점을 두고 노리단 모델을 알리는 한편, 한·일 청년들이 청년 실업 등 동시대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는 창구를 만들고 싶다”라고 홍 대표는 말했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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