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사진기자단참여정부에서 2년6개월간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씨(오른쪽)는 “노 대통령은 항상 정책으로 국민에게 내실 있는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라고 말한다.
지난 1주일은 ‘국민 눈물’ 주간이었다. 울어도 울어도 자꾸 눈물이 났다. 지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믿을 수가 없다. 더구나 그분은 워낙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이라 더욱 실감이 안 난다. 평생을 양심적으로 살아온 분으로서 마지막 한 달에 겪었을 심적 고통, 그 억울함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유서에 남긴 대로 원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분은 주로 말실수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 진정한 모습을 알고 나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적 매력으로 가득 찬 분인데, 한두 마디 격한 표현이 그분의 전체인 양 잘못 알려졌다. 인간 노무현의 원칙주의,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 성격,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등은 이미 많이 알려졌기에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분의 인간적 면모를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2002년 8월 대선 때였다. 지지도가 10% 남짓으로 떨어졌을 때다. 선거 캠프에서 일하던 어느 교수의 권유로 정책회의에 참석해서 노무현 후보와 첫 대면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두어 가지 정책 건의를 했고, 정책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나 했다. 말씀을 줄이고 과한 표현을 삼가시라고 건의한 것이다. 초면에 큰 실례였다. 노 후보를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해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분 나빠서 다시는 안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얼마 뒤 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옹졸하지 않고 대범한 성격이다. 한마디로 큰 그릇이다.

노무현 후보를 만난 건 정책회의 세 번이 전부였다. 그런데 하고 많은 영웅호걸을 제치고 왜 초면에 그런 무례한 이야기를 한 나를 인수위에 불렀고, 왜 정책실장이라는 중책을 맡기셨는지 늘 궁금했다. 청와대에서 2년6개월 동안 매일 뵈면서도 한 번도 그걸 여쭈어보지 못했다. 바쁜 대통령에게 한가한 개인적 질문을 해서야 되겠는가. 언젠가 노 대통령이 한가해지면 한번 여쭈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의문은 영원한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초면에 ‘무례’ 범한 사람 중용

노 대통령의 통 큰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청와대 직원들의 근무시간도 그렇다. 전통적으로 수석회의는 아침 8시에 시작했고, 그 회의를 준비하느라 직원들이 7시까지 출근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찍 회의를 할 필요가 있는지 논의한 끝에 노 대통령은 수석회의를 9시에 열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직원들의 출근시간이 한 시간 늦추어졌다. 과로에 시달리는 직원들에게 한 시간의 단잠은 능률과 사기를 높이는 묘수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쉬운 게 아니다.

그 전에 청와대에서 일한 어떤 분의 이야기로는 과거 대통령들은 수시로 참모를 주말에 불러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정말 긴급한 일이 아니면 주말에 참모들을 부르지 않았다. 녹초가 된 몸에 주말 휴식은 참으로 가뭄에 단비였고, 그것 없이는 도저히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격상 노 대통령은 별로 일도 안 하면서 괜히 호들갑 떨고 떠벌리는 걸 아주 싫어했다. 국민에게 겉으로 보여주기보다는 항상 정책으로 내실 있는 도움을 주기 원했다.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정치인이 흔히 그렇듯 전국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악수하고 행사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정책을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토론 공화국’이라 비아냥거렸고, 국민은 살기 어려운데 토론만 한다고 섭섭해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대통령이 일 많이 하는 척하며 전국을 다니는 것보다는 정책에 내실을 기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청와대를 나온 뒤 한·미 FTA 문제가 불거졌다. 나는 많은 고민 끝에 대통령에 대한 충성보다는 나라에 대한 충성이 더 무겁다고 판단해서 한·미 FTA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 함께 일하던 정태인 비서관은 한 술 더 떠서 전국을 돌며 반대 강연을 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던 사람으로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반란이라면 반란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호기를 만난 듯 ‘배신’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물론 대통령은 많이 섭섭하고 괘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대통령이 사석에서 “그래도 정태인·이정우가 애국자야”라고 말씀했다는 것을 간접으로 전해 들었다. 그런 말도 쉬운 일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소탈하고 꾸밈없는 성격이었다. 인간적이고 유머가 많았다. 긴장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수시로 농담을 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자연스레 탈권위주의를 실천한 분이었다. 불의의 강자에게는 참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약자에게는 늘 따뜻했다. 운전기사나 식당 일하는 사람에게도 하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대통령 앞에서 발언을 하게 되면 누구나 긴장해서 틀릴 수도 있는데, 노 대통령은 실수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했고, 오히려 농담으로 감싸주기까지 했다. 그 대신 적당히 덮고 지나가려 하거나 거짓말로 모면하려 하면 가차 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뒤끝이 없는 시원한 성격이라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모시고 일하기 편한 대통령이었다.

어떤 사람은 잠시 살지만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잠시 죽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다. 노 대통령의 일생은 항상 후자의 길이었다. 마지막 가신 길 역시 그러했다. 이제 노 대통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 정신은 국민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졌다. 전국적인 추모의 물결, 어두운 봉하 시골길을 한밤중까지 인산인해로 만드는 사람의 물결이 그 증좌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긴 행렬에 동참해서 국화꽃 한 송이 놓는 어린아이의 눈망울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한다. 하오니 임은 이제 모든 분노, 모든 시름 놓고, 불의와 번뇌 없는 저세상에서 편히 쉬소서.

기자명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대통령 정책실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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