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19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을 곤봉으로 때리고 있는 계엄군.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나이 칠십이 넘은 늙은이라 글을 쓸 수 있을지….” 전화 너머로 들리는 나경택씨의 목소리에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남매일신문사 사진기자였던 그는 41년 전 1980년 광주를 카메라에 기록했다.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구타하는 장면, 전남도청을 가득 메운 채 거리에서 주먹밥을 나누는 시민들, 관을 부여잡고 눈물을 떨구는 유가족의 모습이 그의 앵글에 담겼다. 당시 사진을 반강제적으로 요구하는 보안대 요원들을 피해 일부 사진은 집 천장에다 숨겨놓았다가 1988년 세상에 처음 공개했다. 이는 5·18 진상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021년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그에게는 남일 같지 않다. 10분 남짓 전화 통화를 하며 그는 미얀마 기자들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이것저것 물었다. 고민을 좀 해보겠다던 그는 몇 시간 뒤 답변을 보내왔다. “메일 주소 주세요. 써서 보낼게요.” 1980년 광주와 2021년 미얀마가 처한 상황이 ‘똑같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국가폭력이 고립된 시민들을 향했고 참상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건 기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나경택씨는 “비록 나이가 들었다고 하지만 카메라를 메고 미얀마로 달려가 취재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아래는 5·18 현장을 취재했던 사진기자 나경택씨가 미얀마 언론인들에게 응원과 연대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편지글이다.

평소 대한민국의 5월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 아래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는 잿빛 아니 핏빛의 세상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광주에 있는 전남매일신문사 사진기자로 근무했습니다. 5·18 항쟁 사진은 물론 기사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계엄 당국의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죽고, 산 자는 끌려가고 시내 곳곳에 계엄군의 총에 맞아 흘린 핏자국과 시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보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시위 현장과 계엄군의 만행 현장에 있었다는 것조차 몸이 떨리는 공포와 분노와 한을 안겨주는데, 하물며 그것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기록해야 하는 사진기자에게는 하루하루가 사선을 넘나드는 나날이었습니다. 젊은 기자들 모두가 계엄 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본 그대로 취재한 사진과 함께 신문을 발행하자 결의하고 제작에 들어갔지요. 그 과정에 신문사 간부들이 쳐들어와 모든 것을 엎어버려 허사가 되자 우리 기자들은 집단 사표를 쓰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거나 시위대와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비록 신문사는 휴간에 들어갔지만 광주항쟁의 역사는 내 손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나는 사진 취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취재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항쟁 첫날 발행한 신문에 시위 현장을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한 기자들이라며 화가 난 시민들이 사진 취재를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군인과 경찰이 무서워 고층 건물에 숨어서 취재를 했습니다. 취재도 어려웠지만 건물에서 자야 했기에 추위를 이겨내고 배고픔도 참아야 하는 고역의 연속이었습니다.

2021년 3월3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시위대를 체포하는 무장경찰. ⓒ조 조 제공

5월21일 시민들 수십만 명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 계엄군들이 조선대학교 운동장으로 물러간 후 나는 전남도청 인근 대도여관 5층 옥상에서 저격수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 쏘는 현장을 찍으려다 군용헬기의 조준사격으로 죽을 뻔했습니다. 다음 날은 호남동성당 안에서 잠을 자고 수녀님이 숨기고 다니라며 건네준 천으로 된 시장바구니 속에 카메라 두 대를 감추고 나왔습니다. 전남도청 옥상에 걸린 조기를 찍으려다 시민들에게 간첩으로 오해받아 맞아 죽을 뻔도 했습니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에서 그래도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자 최선을 다한 것은 언젠가 광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부인하는 계엄군에게 사진 내밀자

내 목숨조차 기약할 수 없지만 호주머니에 흑백필름을 가득 넣고 카메라 두 대를 갖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1980년 당시는 유튜브나 SNS가 되지 않아 광주는 고립무원이었습니다. 언론을 장악한 계엄 당국이 5·18 항쟁을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게 해 광주·전남 지역 외 다른 곳에서는 광주의 진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계엄 당국은 물론 국민 일부도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당시 언론이 계엄 당국의 발표대로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계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인 1987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는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제목의 성명서 등이 실린 인쇄물과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라는 화보집, 그리고 정평위 위원장인 장용주 신부가 독일에서 가지고 온 영상물을 비디오테이프로 제작했습니다. 제가 제공한 취재 필름을 가지고 광주시 북구 임동 천주교 대교구 지하 주차장에서 화보집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전국 천주교회를 통해 배포하여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알렸습니다. 이와 함께 금남로에 있는 가톨릭센터 2층 전시실에서 5·18 사진전을 열어 많은 광주 시민과 인근 지역 주민들이 줄을 서가며 관람했습니다. 당시 많은 국민들은 5·18 민중항쟁 때 광주 시민을 폭도로만 알고 있다가 이를 계기로 민주시민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1988년 11월 국회 5·18 항쟁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당시 계엄군으로 참가한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과잉 진압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제가 제공한 사진을 증거물로 제시하자 마지못해 과격한 진압 과정을 시인했습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큰 효과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광주 시민들의 항쟁 사진집과 영상물이 나왔다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항쟁 필름을 제공한 저를 비롯해 정평위 소속 신부님과 관계자들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사진들은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함으로써 5·18 특별법 제정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헌정 질서 파괴행위를 단죄하고 12·12 사태 등 어떠한 쿠데타라 할지라도 그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처벌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신문〉 사진기자가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 모인 시위대를 찍은 사진.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폭도들이 일으킨 ‘5·18 사태’라고 불렸던 사건이 1990년엔 ‘5·18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됐습니다. 저는 광주 시내 대학교를 찾아다니며 당시 취재한 자료 등을 활용해 5·18의 진실을 알렸습니다. 서울과 부산, 대구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전을 열고 TV에 출연하기도 했고요. 2017년에는 독일 포츠담에서 두 달 동안 5·18 사진전을 열고 베를린·보훔·쾰른·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동포와 독일인들을 상대로 당시 항쟁 사진을 보여주며 강의를 했습니다. 201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도 5·18 사진전과 특강을 하는 등 당시를 취재한 기자로서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기록은 이렇게 중요하게 활용되지요.

2011년, 제가 제공한 필름 2017컷과 당시 기자들이 취재한 취재수첩, 계엄군의 만행을 기록한 시민들의 일기장 등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30년 만이었습니다. 세계가 인정한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미얀마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으로 인해 혼돈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계엄군들이 마구 쏘는 총에 맞아 8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숨졌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는 젊은이들의 보도를 접할 때마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를 떠올리게 됩니다. 5·18 광주항쟁을 사진으로 기록한 기자였던 저는 나이가 들었지만, 카메라를 메고 미얀마로 달려가 취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월 광주는 미얀마와 하나다

지금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에는 미얀마 국민들의 항쟁 그리고 군인들의 만행을 보여주는 사진과 그림이 시시각각 전시되고 있습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미술행동’이라는 단체가 대형 패널을 설치해 ‘오월 광주는 미얀마와 하나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광주 시민들과 관광객은 여기서 정보를 얻고,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민주광장에서는 광주 시민단체 등이 미얀마 국민을 위한 행사를 진행합니다. 최근에는 5월어머니집의 어머니들이 시외버스터미널 앞 광장에서 미얀마를 응원하는 ‘주먹밥 나눔’ 행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미얀마 출신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함께했습니다. 미얀마를 응원하는 행사는 미얀마가 민주화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3월14일 미얀마 양곤에서 시위 중 다친 시민이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 ⓒ마웅 칸트 제공

미얀마 기자 친구 여러분!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바꾼다고 했습니다. 4·19 혁명에서도 그러했고, 5·18 광주항쟁과 6·10 항쟁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을 증언하는 ‘사진의 힘’ 때문에 독재자가 무너지기도 했고, 전쟁이 일찍 끝났으며, 민주화에 가속도가 붙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 네이팜 폭탄에 의해 공포에 질려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달려 나오는 소녀의 사진, 중국 톈안먼 사태 때 줄지어 들어오는 탱크 앞에서 맨몸으로 저항하는 한 시민의 처절한 모습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지요. 사진기자는 그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하여, 민중의 절실한 염원을 알리기 위하여, 그리하여 아무도 핍박받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게 하기 위하여 24시간 현장을 지킵니다.

1980년 5월 항쟁을 사진으로 취재한 저는 미얀마 관련 뉴스를 TV를 통해 볼 때마다 당시가 생각나 가슴이 미어집니다. 제 마음은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록하고 알리는 것은 우리 기자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기자는 국민을 대신하여 현장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그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이 없다면 아무도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국민의 눈을 대신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진기자는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숙명을 지니지요. 현장을 정확히 목격하고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현장과 가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체온을 함께하다 보면 분노하기도 하고 따뜻한 감동도 받습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현장에서 국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목숨을 걸고 뛰고 있는 미얀마 기자들께 더욱더 힘내시라고 응원합니다. 군부 쿠데타 세력의 폭압에도 물러서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미얀마 국민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절대 권력자는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자기들끼리의 자리다툼으로 죽이고 죽기 마련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진실은 더딜지 몰라도 반드시 밝혀집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우리가 승리했듯이 미얀마 국민들도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매일매일 한반도 평화와 함께 미얀마의 봄이 오길 기도합니다. 


한국의 시사주간지 〈시사IN〉은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일상 회복을 응원하는 #WatchingMyanmar #지켜보고있다 특별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이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들이 모아주신 기금으로 미얀마 언론인과 시민기자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사IN〉 미얀마 특별 페이지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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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사진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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