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월 정도 된 아기 고양이는 앞집 지붕에서 떨어져 내게 구조되었다. 하늘에서 왔으므로 천둥의 신 ‘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격이 이름을 따라가는지 천둥벌거숭이 같다. ‘엄마’ 같은 호칭은 어쩐지 머쓱하고 딱 들어맞게 느껴지지 않지만, 토르와 서로 눈을 맞추고 끔벅거리다 보면 마치 엄마 고양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배우자는 나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토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어렵사리 집을 찾아 계약을 하려던 찰나, 부동산에서 ‘애완동물 금지’ 조항이 담긴 계약서를 내밀었다. 우리는 단호하게 다른 집을 찾기로 했다. 가족과 떨어져 살 수는 없다. 끈이나 옷을 마구 씹어 삼키는 탓에 동물병원에 뛰어가고 수술 후에는 휴가를 내어 간병을 하고, 좋아하는 간식이 떨어지지 않게 쟁여놓고 영양성분을 따져가며 사료를 마련한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아니라 호기심 많고 귀여운 인생의 동무, 반려가 생긴 사실을 매일 실감한다.

토르가 인생에 들어온 것은 생각보다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길에서 생활하는 고양이가 자주 보였다. 폭우나 폭설이 내린 날에는 지친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추위를 피할 공간이 있을까, 밥은 충분할까, 엄마와 형제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고양이라는 작은 생명의 눈으로 세상이 달리 보였다. 다른 동물을 보면 토르 생각이 났다. 닭과 소, 돼지는 고기가 되어 식탁에 올랐고 원숭이는 제약회사의 실험 도구가 되었다. 토르가 그렇듯, 생각하고 좋고 싫음을 느끼고 표현하며 고통을 호소했을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얼굴에서 토르가 겹쳐 보여 괴로운 날도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동물해방 운동가들은 ‘인간도 동물’이라고 외친다. 인권을 ‘동물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양이 ‘카라’를 입양해 동물해방운동에 눈을 뜬 홍은전씨는 책 〈그냥, 사람〉에서 이렇게 썼다. “요즘의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좋은 비장애인이나 좋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이제 나는 좋은 동물이 되고 싶다.”

감사하게도 토르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나는 ‘동물다움’에 더 가까워지고 싶어졌다. 그게 토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인 것 같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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