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11월16일 정례브리핑을 마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에게 2020년을 마무리하는 소감을 부탁했다. “시민으로서, 질병관리청장으로서 2020년은 어떤 해였습니까?”
시민 정은경은 답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는 일상이 그리운 한 해였습니다. 가족과 친구와의 일상이 그립고, 일상의 소중함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질병관리청장 정은경은 말했다. “막대한 책임감으로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국민들께서 많이 신뢰해주셔서 또 그건 굉장히 기쁜 한 해였습니다.”
정 청장은 시민들에게 송년 인사를 남겼다.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안전하게 연말 맞으시길 바랍니다. 내년에는 좀 더 상황이 좋아져서 일상을 회복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질병관리청은 바깥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지번 주소로 충북 청주시 오송읍 연제리 643번지, 여전히 접근성이 그리 좋지 않은 행정복합도시의 맨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소지품 검사 등 출입 절차를 밟고 나서도 그믐달 모양의 길고 가느스름한 연못을 끼고 한참을 걸어야 본관 건물에 이를 수 있다. 과학자들이 속세를 떠나 연구·개발에 매진하기 딱 좋아 보이는 공간이다.

전문가들의 공간답게 질병청 내부는 고요하고 차분한 공기로 들어차 있다. 기자들이 출입하는 2층 브리핑실에도 소란이 없다. 책상들은 거의 비어 있고 뒤편에 방송사 ENG 카메라만 몇 대 설치돼 있다. 직원 한 명이 세종청사 기자실과 원격 연결한 모니터와 노트북을 점검하고, 수어 통역사들은 손에 핸드크림을 비비며 원고를 연습하고 있다. 오후 2시가 다가오면 공기는 점점 팽팽한 긴장으로 바뀐다. 연노랑 점퍼를 입고 팔에 두툼한 서류철을 낀 커트 머리의 공직자가 단상 위에 섰다. 2020년을 보내오는 동안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여는 순간, 고요하고 동떨어져 있던 전문가의 공간은 이윽고 국민들의 삶과 가장 긴밀한 ‘공공’의 공간이 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국내 발생 현황을 설명드리겠습니다.”

2020년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 어느 해보다 공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 중심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있었다. 우리는 정 청장을 바라보며 같은 위기를 공유하고 같은 출구를 소망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들은 당장 내일의 일상을 조직하는 근거자료가 되었고 세면대 앞에 섰을 때나 재채기가 나오려 할 때, 좋은 담임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착한 학생들처럼 정 청장이 당부하는 방역 지침들을 떠올리며 성실히 이행하려 노력했다.

ⓒ시사IN 신선영

마스크 잘 쓰고 손 잘 씻다 보면 언젠가 이 몹쓸 바이러스도 물러나겠지, 낙관적인 시기가 있었다. 치솟는 그래프 앞에 절망하며 누구라도 멱살 잡고 책임을 씌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 청장의 브리핑을 들으며 일희일비하던 우리들의 2020년 속에서 꾸준히 변하지 않는 것 역시 정 청장이었다. 코로나19가 ‘원인 미상의 중증 폐렴 바이러스’이던 연초에도, 누적 확진자 4만5000명 (12월16일 현재)·누적 사망자 600명을 넘긴 연말에도 그는 똑같이 국민들 앞에 서서 자신이 알고 있는 최신·최대·최선의 정보들을 차분하고 또박또박하게 전해주었다. 일관성 있는 브리핑을 들으며, 하지만 급격히 초췌해지는 그의 외양을 보며 국민들이 느낀 미안함과 고마움, 또 자부심은 그대로 공공에 대한 신뢰로 뭉쳐졌다.

〈시사IN〉이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2020 올해의 인물’로 꼽은 이유는 그가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다. K방역의 위대함을 기록하기 위함도 아니다. 정은경이라는 정직하고 성실한 공직자가 2020년을 회고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징 인물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함정이다. ‘정은경’으로 우리의 성공만을 이야기하는 습관 때문이다. 2020년에 찾아온 코로나19 위기와 거기에 맞선 위대한 대한민국의 영웅 서사만을 좇다 보면, 기저질환과도 같은 우리 사회의 진짜 고질과 폐단을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정 청장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로만 올해를 마무리하는 순간 2020년의 과오와 실책들은 고스란히 2021년에도 이어진다. 우리는 정은경이라는 상징을 토대로 성과와 한계, 미래와 과거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정은경이 매듭지어준 선순환의 ‘신뢰 고리’  

그 때문에 정은경 청장에 대한 이 기사는 〈시사IN〉 2020 ‘올해의 인물’ 메인 기사가 아니다. 정은경과 동시에 2020년을 코로나19와 살아간 ‘우리들’을 소개하기 위한 다소 긴 서문이다. 다양한 모습의 ‘우리들’은 자랑스러운 K방역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외진 곳들에 존재한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응급의료 공백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있다. 학습과 놀이의 기회를 빼앗긴 아이들이 있고, 비대면 사회를 기능하게 해주다 몇몇 목숨도 잃은 택배 기사들이 있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조차 상처가 되는, 오랫동안 혐오와 낙인에 시달려온 소수자들이 있다.

돌아오는 해에 우리는 좀 더 의구심을 갖고 코로나19와 대한민국을 논해야 한다. 그것이 공공, 정부, 전문가와 시민 사이 정은경 청장이 어렵게 매듭지어준 선순환의 ‘신뢰 고리’를 튼튼하게 유지하는 길이다. 시민과 공공 사이 맺어진 신뢰 고리는 이제 시민과 시민 사이에도 스며들어야 한다. 그렇게 수직·수평으로 연결되고 서로 다독일 때 조금이나마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꿈꿀 수 있다. 그것을 처음 겪은 2020년의 기억을 박제해서 길이 남기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당분간 코로나19와 더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마지막 신종 바이러스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없어져도 ‘우리들’의 아픔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0 올해의 인물올해의 정은경과 내년의 우리들
〈2020 올해의 인물유엽이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2020 올해의 인물〉 “왜 사춘기를 갖다 붙이는 거지?”
〈2020 올해의 인물여성 택배 노동자로 사는 것
〈2020 올해의 인물코로나19 전부터 감염자로 살았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