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6월23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해직 35년 만에 복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2월9일 새벽 6시30분,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부산 영도의 바닷바람에 ‘한진중공업’ 깃발이 휘날렸다. 부산 각지에서 온 통근버스 수십 대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 멈췄다. 노동자 수백 명이 공장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정문 앞에는 조선소 벽을 따라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양지부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50여 명이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백발이 된 60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20대 김진숙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그림에는 ‘돌아가야 한다, 기어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전 7시35분, 출근시간 5분을 남겨두고 공장 앞이 분주해졌다. 조합원들도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이 그 문을 통과해도 김진숙 지도위원만은 예외였다.

복직은 더 미룰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정년 6개월을 남기고 지난 6월23일 복직 투쟁을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단체협약을 보면 ‘만 60세 정년에 도달하는 그해 말’까지 일할 수 있다. 올해 7월 환갑을 맞은 김 지도위원은 12월14일 현재, 당장 복직된다 해도 불과 열흘 남짓 출근한다.  ‘왜 복직하려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라며 웃었다. “일터로 못 돌아가면 저승에서도 떠돌아다닐 것 같아요. 해고자들이 다 그런 마음일 거야. 그저 내 발로 걸어 나오고 싶어요.” 자신의 복직을 스스로 말하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던 김 지도위원은 2018년 “나도 이제 복직 투쟁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노조에 전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유방암이 발병했다.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인한 관절염·골다공증·우울증을 겪으며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2019년 12월23일, ‘앓고 있는 것이 사치’라며 부산에서 대구까지 110㎞ 도보 행진에 나섰다. 대구 영남대의료원 복직을 주장하며 고공농성 중이던 박문진 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박문진이 다른 안건으로 농성했으면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해고된 세월만 13년이고, 정년이 1년 남은 상황이잖아요. 얼마나 절박한지 알아요. 언론엔 조금도 보도되지 않고 하루하루 날짜는 지나가고요. 아침에 어떤 마음으로 눈을 뜨는지, 찬바람이 옥상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어떤지 너무 잘 아니까….” 영남대의료원과 노조 측은 지난 2월에야 박 전 지도위원의 복직에 합의했다. 해고된 지 13년 만이었다. 그의 정년은 1년 남았다.

한국 최초의 조선소 여성 용접공인 김진숙 지도위원은 1981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스물여섯 살이던 1986년 2월, 노조 대의원 신분으로 전단지를 돌리다가 보자기로 얼굴이 덮어쓰인 채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이후 35년여 동안 ‘한진중공업 출입금지’ 상태다.

그는 복직에 대한 기대와 좌절로 오랜 시간 가슴앓이를 했다. 2003년 10월, 민주노총 조합원이던 김주익과 곽재규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회사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노사합의가 급물살을 탔다. 사측은 정리해고 철회, 임금인상, 해고자 전원 복직을 발표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김진숙 지도위원만 제외되었다.

ⓒ시사IN 송지혜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촉구하는 금속노조 조합원과 시민들이 12월9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팻말을 들고 있다.

“내 목숨의 무게를 생각합니다”

당시 노조 간부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따로 불러 말했다. ‘해고자들이 복직될 것 같아요.’ 김 지도위원의 가슴이 뛰었다. “‘근데 김 지도는 안 된답니다’라고 하데요. 그러나 ‘왜 나만 빠집니까? 나도 복직할랍니다’ 할 수는 없더라고요.” 2003년 노사합의서에는 ‘이후 김진숙 복직을 계속 논의한다’는 한 줄만 남았다. 동료들이 공장으로 돌아간 뒤, 정문은 꽁꽁 닫혔다.

2008년 사측은 김 지도위원에게 생계비 월 200만원을 제시하며 복직을 대신할 미끼를 던졌다. 그는 “일하지 않고 돈을 받을 수는 없다”라며 거절했다. “현장 아저씨들이 ‘그냥 주는 돈인데, 고생스럽기만 하고 언제 다치고 죽을지 모르는 현장에 왜 올라카노’ 하데요. 그 사람들 말이 맞기도 한데, 복직하고 싶은 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어요.” 그리고 2010년 사측이 생산직 노동자 400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밝히면서, 한진중공업에는 또 한번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해고가 눈앞에 닥치자 ‘아저씨들’은 ‘진숙이가 왜 그러는지 이제 알겠다’고 말했단다.

2011년 1월,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살았다. 희망버스의 ‘기적’으로 정리해고가 철회됐다. 그래도 김 지도위원은 복직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정리해고 철회만을 요구한 터였다. ‘해고자 앞세워서 본인이 복직하려 한다’는 모함성 비아냥들로 투쟁의 순수성을 훼손당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해고자’라는 꼬리표는 그를 지독히도 따라다녔다.

지난 10월26일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병모 한진중공업 대표이사는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9년 사측에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권고한 바 있다. 지난 9월에 다시 권고했다. 복직에 대한 기대가 또 한번 커졌다. 하지만 사측은 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다.

한진중공업 사정도 복잡하다. 한진중공업 최대주주인 KDB산업은행은 한진중공업 매각을 추진 중이다. 예비입찰에 참여한 회사 대부분은 조선업과 무관한 사모펀드다. 인수자에 따라 한진중공업의 존속 여부가 갈린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심진호 지회장은 “2000명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부산 지역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노조 측은 김 지도위원의 정년이 끝나더라도 복직 투쟁을 계속할 방침이다.

지난 11월, 김 지도위원은 2년 만에 암이 재발했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지난번과 같은 후유증이 올까 봐 두렵다. 그래도 버틴다.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을 때 내 목숨의 무게를 생각합니다.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고 밤잠을 설치는지 보았으니까. 내 목숨의 무게는 굉장히 무거운 것 같아요.”

요즘 김 지도위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한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이 자신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심진호 한진지회장과 문철상 부양지부장은 ‘내가 김진숙’이라고 선언하고 11월25일부터 무기한 단식 중이다. 12월6일 서영섭 신부와 김득중 쌍용차지부장, 윤충렬 쌍용차 수석부지부장, 지난해 정년을 맞은 차해도 전 한진지회장은 부산역에서 출발해 영도조선소까지 오체투지를 하며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기원했다. 그의 응원을 받아 복직한 박문진 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은 매일 3000배를 한다. 12월19일 9년 만에 희망버스가 출발한다.

기자명 부산·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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