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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내 인생 바꿔놓았다

촛불집회 참가자 100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시사IN 편집국 webmaster@sisain.co.kr 2009년 04월 28일 화요일 제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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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18·고3·이명박 탄핵 서명 제안자)

지난해 마감했던 탄핵 서명 기간을 연장해달라는 제안이 많아서 올해 말까지로 연장했다. 현재 138만명이 서명했다. 당시 ‘탄핵’이라는 말은 대통령이 제대로 해달라는 뜻이었는데, 지금 하는 걸로 봐서는 기대하기 힘든 것 같다. 일반고를 다니는 나로서는 정부가 노골적으로 특목고를 우대하는 것도 기분 나쁘다.

김지윤(24·여대생· ‘고대녀’로 알려짐)
2008년 현장에서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책에서만 보던 민주주의·저항 이런 것들에 대한 생생한 현장 학습이었다. 몸은 힘든데 정말 신나고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촛불 시민들의 지지도 받고 6월10일 집회에서 연설했던 것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백미숙(48·동화작가 겸 주부)
지역(은평) 주민과 함께 지금도 매주 한 번 이상 활동한다. 길게 갈 싸움이므로 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질기게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그들의 잘못을 감시하고 저항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한다.

임삼진(촛불집회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
운동은 사실에 기반해야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지금 시민사회가 지지부진한 것도 촛불집회가 사실이 아닌 논리를 내세우다 시민사회의 에너지를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촛불의 거대한 에너지는 쇠고기 문제만은 아니고, 이명박 정부와 그 정책에 대한 강한 거부 의사가 드러난 것이다. 선거 승리로 기세가 높던 정부에게는 자성할 계기가 된 면도 있다.

김갑자씨(44·가명·번역가)
촛불집회는 민주주의라는 상식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확인한 공간이었다. 현장에서 사회에 대한 눈, 개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형태를 고민했고, 공부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실천하게 됐다.

사토 다이스케(일본 교도통신 한국 특파원)
1년 전, 새벽까지 광화문 집회 현장을 취재하며 촛불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대선 때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몇 달 만에 10%로 떨어졌다가, 지금 또 40%까지 나오는 모습 등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명박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내용을 바꾼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촛불을 통해 시위에 참가했던 한국 시민이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없다. 쇠고기 문제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촛불시위 같은 방식의 대응이 없는 것도 의아스럽다.

송준(45·자유 기고가)
처음에는 민주주의와 시위가 일종의 축제로구나 하는 즐거운 분위기였다. 어느 날 물대포와 체포조가 나왔고 여자 시위자를 밟는 등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면서 촛불의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이정아(31·회사원·82쿡 회원)
지난해 9월까지 열심히 촛불을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연행되는 것을 보고 겁이 났다. 우리가 원하는 일을 이루지 못해서 아쉽다. 개인적으로 사회·경제·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촛불 이후에는 지켜보게 되었다. 먹을거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예진(25·취업 준비생)
대학 시절에 학생운동을 했다. 하지만 촛불은 솔직히 불편했다. 운동권들은 뒤로 빠지라고 하는데 권위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 마초적이고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진보 매체라 불리는 한겨레나 경향의 논조도 불편했다.

경찰(37·○○경찰서)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손에는 촛불 전단지를 들고 촛불집회장으로 출근했다. 내 옆에서 시위하던 사람이 프락치로 몰릴 때는 섬뜩했다.

경찰 간부

5월1일과 2일 촛불이 또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 같다. 경찰도 대대적으로 두드려 막으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막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윤석(야구 사이트 베이스볼파크)

촛불 이후 ‘엠엘비파크’에서 떨어져 나온 베이스볼파크에서 활동한다. 집회 가던 사람들끼리 따로 사이트를 차렸지만 정치 이야기는 잘 안 한다. 촛불 이후 선거마다 지다보니 해서 뭐 하나 싶은 좌절감이 든 거다.

“촛불은 참된 스승이다”


선안나(47·단국대 초빙교수)

촛불은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현재도 지역 촛불에 참가하고 있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역사는 영원한 것. 촛불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날 것이다.  

ㄱ양 (18·여고생)

촛불은 참된 스승이다. 몇몇 어른이 청소년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뛰쳐나간 것을 일상에서의 일탈 정도로 생각하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이었다. 예전에는 사소한 거로 스트레스받고 그랬는데 요새는 마음이 넉넉해져서 주변 사람들도 잘 도와주고 나눠주고 그런다. 아, 그리고 귀 막힌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한심하고 무서운 건지 절실하게 깨달았기에 이젠 남의 말을 매우 귀담아듣는 편이다.

ㄴ양(17·여고생)
촛불은 17년 내 삶에서 억압의 분출구. 정부에서 촛불 탄압이 늘어가고 ‘부모산성’ ‘성적산성’ 때문에 불안했다. 조·중·동에서 미친 소리를 할 때면 흥분하지 않고 시크하게 비웃어준다. 어린 것들 ㅉㅉ. 동방신기·빅뱅도 신경민 앵커 발치에도 못 온다. 점점 신경민 앵커 빠순이가 되어가는 듯. 꺄~.

이계덕(육군으로 복무전환 신청 후 직위해제 상태로 불구속 재판받는 전경)
양심상 촛불 진압에 나설 수 없어 육군 전환을 신청했다가 보복당해 30일간 영창을 살고 다시 부대 내 성추행 혐의로 기소돼 재판받고 있다. 내가 상급자 4명을 포함해 15명을 성추행했다는 말도 안 되는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됐으나 기각됐고, 직위해제 상태에서 재판에 대응하고 있다. 동료 대원이 탄원서도 내줬다. 부대에서 촛불 진압 거부 보복으로 이런 치졸한 짓을 했지만 진실이 이길 것이다.

김은지(24·여대생)

몇몇 언론에 대한 불매운동이나 광고주 압박 운동은 그렇다 해도 현장에서 기자들에게 직접 위해를 가한 건 솔직히 불편했다.

고명곤(28·대학원생)

지도부가 없이 움직였던 것은 분명 성숙한 모습이다. 이른바 ‘진보’라는 이들의 논의가 개인들에게 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할까. 그렇다고 개인들이 스스로 새로운 논의를 만들어낼 능력도 없었던 것 같다.

박준우(35·‘함께하는 시민행동’ 기획팀장)
촛불을 계기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을 좀 더 가볍게 하게 된 것 같다. 세상이 잘못 가고 있다는 건 알지만 시민단체가 어떻게 판을 벌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양인창(36·LG전자 연구원)
6월10일 두 아이를 데리고 촛불집회에 나간 게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경찰이 세게 진압하는 상황이라 나가기 어려웠다. 촛불이 위축된 건 경제가 위축되고 먹고살기 바빠서가 아닐까.

이해나(24·여대생)
촛불은 희망이자 낭만이었다. 그런데 단지 스쿠터에 시동 걸다가 경찰에 잡혀간 내 친구나 촛불 직후 공정택 교육감 당선 등을 보면서 환멸을 많이 느꼈다.

양성모(30·KBS 기자)
현장에서 양면성을 봤다. 국민이 실제 주권을 행사하는 역사적으로 드문 현장을 봤고, 대중의 에너지가 폭발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폭력, 무질서, 그런 위험을 많이 본 것 같다. 

임태빈(27·소설가 지망생)
대학 졸업 후 지식인으로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고생, 학생이 집회에 나서는 걸 보고 사회적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서울시 교육감 선거 이후에 내 마음속의 촛불은 꺼졌다. 갈 마음이 안 들었다.

태공망(가명·일반인)

촛불 이후 ‘정치는 내 생활의 일부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연행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우리 목소리를 계속 무시하니 좌절한 면도 있다.

박미혜(일반인)
정치 무관심자이자 정치 혐오자였던 가치관을 180도 돌려놨던 사건이다. 행동해도 변화가 없을지언정 시도는 계속해야 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정치도 그렇고 뉴스에 나오는 모든 일이 내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걸 알았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물대포를 조롱했지만 사실 경찰의 물대포는 촛불 시위대에게 공포를 주었다.
정하윤(32·중식당 요리사)

일단 요리를 하는 처지에서 건강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쇠고기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산지 표기, 유통기한, 조미료…. 용산 참사 때 가고 싶었는데 솔직히 무서웠다. 신변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나동혁(24·라쿤·촛불집회 생중계) 

촛불집회를 단신 처리하는 보도 행태를 보고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나왔다. 촛불집회를 생중계하면서 개인적으로 목표했던 학업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로 인해 현재 1년을 더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이 사회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되어 이제는 거의 매일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취재 활동을 하는 블로거가 되었다.

서정민갑(36·음악 평론가)

일반 시민이 나서서 창조적이고 독창적으로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집회. 인상적이었다. 정부의 폭력으로 인해 ‘즐거움’이라는 동력을 사용할 수 없게 돼버렸다.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세 권을 읽고 <민중의 세계사>를 읽는 중이다.

“횃불로 변해 다시 탈 것이다”

아무개씨(28·당시 현역 군인)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촛불집회에 나왔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라는 지침이 군에 내려왔다. 공무원 복무규정에 위배될 수 있다고. 일단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촛불집회에 나가면 안 되는 것만 보여줬다. 미네르바가 구속되는 등 탄압이 컸다. 까딱 잘못하면 검사랑 인사해야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나가지 않았다.

방호석(35·광고대행사 직원)

기존 미디어 보도에 불신이 있었다.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에서 엔터테인먼트 채널 만들어 개인 방송하다가 촛불집회를 생중계했다. 촛불집회 이후 많이 우울해졌다. 촛농도 남고 심지도 남았는데. 언젠가는 피어오르되, 횃불로 변해버릴 것 같다.

김은배(70·사진작가)

덕수궁에서 사진 찍다가 전경들이 방패로 시민을 찍는 걸 보고 놀라서 매일 나갔다. 촛불이 꺼졌다고 말하면 나는 죽기 살기로 싸운다. 아직 여기저기 켜 있다. 보수·진보 떠나서 젊은 사람들이 국가관·역사관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김구 선생님을 테러리스트라고 해서 우린 웃었다.

또랑에 든 소(여대생 사망설 유포 혐의로 구속)

너무나 이 사건을 무시한다. 촛불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사건이다. 해당 관련자들의 사건 은폐 시도가 있었다.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특검까지 해야 한다.

이성준(촛불자동차연합 회원)
당장 올해는 다시 촛불이 타오르기 힘들 거라고 본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3~4년차 들어서면 다시 촛불이 불붙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검경의 인권유린을 견제할 수 있는 인권단체를 지원하면서 촛불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오승주(32·언소주 회원) 
소설가 지망생으로 소설 구상과 취재를 끝내고 집필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촛불 이후에 펜을 꺾었다. 지금은 블로그에 리뷰와 기사만 쓰고 있다. 촛불 이후에 인생이 바뀌었다. 촛불의 희미한 흐름을 따라서 몸을 기울였다.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촛불과 무관하지 않다.

김성민(‘열대어 동호회’ 카페 회원)
우리 ‘열대어 동호회’ 취미 카페에서도 촛불 탄압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5만여 명이 회원인데 촛불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면 호응 댓글이 수십 건씩 달린다.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 아무리 촛불 민심을 짓밟으려 해도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무개씨(40·시간강사)
정부가 고압적인 ‘치안’ 마인드로 정국을 이끌어가려 한다고 생각해 촛불을 들었다. 촛불 이후 민주주의와 세계 경제에 대한 ‘자율학습’을 꽤 열심히 한다.

김동환(25·국민대 총학생회장)
이명박 정권이 어떠한 비판에도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그만큼 제도 정치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촛불의 과제는 단기간의 가시적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한다. 매일매일 촛불이 필요한 형국이다.

아무개씨(30대 후반·국회의원 보좌관)

촛불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또 하나의 ‘참여’였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촛불은 지금도 각자의 생활 속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다.

김수한(35·출판인)
촛불은 40세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만난 사회적 영역의 자기장이었다. 촛불 사건 이후 아내를 비롯해 친구들과 정치·통치·법치에 대해 투박하게나마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박석운(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촛불집회 당시 상임운영위원장)
진보연대가 배후로 지목되곤 하는데, 우리는 사실 촛불이 그렇게까지 갈 거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대책회의에서는 6월 하순부터 가두 투쟁 위주에서 실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모색이 있었다. 촛불광장은 지키되 가두 투쟁은 중단했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대책회의 내에서 정권 퇴진운동까지 끌고 가려는 강경파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는 등 전략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한보희(39·대학강사)

촛불은 미래가 갑작스레 도래한 사건이다. 그 미래는 낙관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일종의 파국이고 재앙으로서의 미래였다. 2008년 촛불의 실패는 2009년 촛불로, 또 다른 촛불로 이어질 것이다.

“촛불은 신명을 잃어 없어졌다”

임병식 (27·취업 준비생)
촛불은 신명을 잃어 없어졌다. 지금이 촛불을 다시 들어야 할 때로 보인다. 지난해보다 취업은 더 어렵고, 취업한 사람조차도 방황한다. 이 사회에 무기력이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황진희(37·북 디자이너)
뉴스를 볼 때마다 촛불을 다시 들고 싶지만 사는 게 바빠졌고 시위가 격렬해진 것이 부담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온건 보수파에 비폭력주의자니까.

최문순(54·국회의원)
내 관심사인 언론 분야로만 보면 촛불의 완패다. 1무20패쯤 될까? 아직 무승부 상태인 방송법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졌다. 정연주 전 사장은 해임됐고 언론기관마다 낙하산이 들어갔다. 촛불이 보여주었던, 주체도 핵도 리더도 권위도 없었던 모습의 폭발력은 엄청났지만, 결국 바람이 지나가고 보니 남은 게 없다는 점이 문제다. 그런 결과에 대중은 지금 당황하고 있다.

최현오(변호사)
촛불집회 관련 사건 6건을 맡았다. 그중 한 건이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일괄 배당으로 문제가 된 8건 중에 들어가 있었다. 그 피의자는 집회 한 번 참석했다가 1심에서 징역 1년이 나왔다. 나머지 다섯 명은 벌금 10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약식기소를 받고 불복해 정식 재판이 진행 중이다. 모두 단순 참가자이고 한 명을 제외하면 초범이다. 이전이라면 훈방되던 수준이다.

홍영득(30·포털 사이트 근무)
경찰 쪽의 정보 공개 청구나 ID 신원조회 요구가 엄청나게 늘었다. 구체적 수치는 대외비이지만, 전년 대비 몇 배씩 늘었다고 보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꺼져가던 열정에 다시 불이 붙었다. 운동권 출신이긴 하지만, 촛불이 꺼진 이후 여러 현장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촛불집회 현장을 떠난 것도 기륭전자 투쟁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Justyle(일반인)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꼭 하나 짚어내자면 미국산 쇠고기를 정말로 먹기 싫었다. 신경민 앵커가 뉴스데스크에서 내려와야 하는 상황을 보면서 촛불을 다시 들고 싶었다.

상상(20·대학생)
내 생애 가장 뜨거웠던 여름.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었다. 시험기간에도 매일 대구 시내에 나가 문화제에 참여하고 가두행진을 했다. 

noway(일반인)
뉴스 보면서 운 적이 있다. 촛불 전에는 신문도 안 보고 뉴스도 잘 안 봤다. 취업은 해야겠는데 삽질하는 거나 시키려고 들 때 진짜 의욕 상실했다. 처음으로 이민을 생각해봤다.

김은지(23·그래픽 디자이너)

촛불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촛불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촛불을 다시 들고 싶다는 생각이 많지는 않다.

류킹(28·공무원 시험 준비)   

6월1일 새벽 강경 진압을 보고 흥분해서 다시 나갔던 집회에서 새벽에 우비까지 입고 스크럼을 짜고 있던 ‘소울드레서’ 회원들과 그들을 향해 방패로 찍으면서 달려오던 전경들. 그들이 들고 있던 흉기. 그 이후로 소심해져버렸다.

눈을 감자(24·대학생)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정말 아는 것이 힘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많이 보고 정치나 사회 분야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일같이 나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른 방식의 참여가 필요한 때가 온 거다.

장우식(32·마이클럽 회원) 
고맙고 미안했다. 내 나름대로 조선일보 반대 활동을 해오던 사람으로서 촛불이 폭발시킨 조선일보 반대의 함성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그들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들이 세상을 바꿀 것 같았다. 그리고 촛불소녀·촛불소년들에게는 미안했다. 선배들이 못나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청소년에게까지 이런 세상을 안겨준 것이 참으로 미안했다. (평범한 교직원이었던 그는 현재 민주노동당 홍보부장이 되었다.)

   
인터넷 카페 소울드레서 회원들(위)은 새로운 시위문화를 창조했다. 신문 의견광고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변홍균(아고라 논객 ‘이웃소년’)

촛불은 친한 친구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부산 출신이며 대선 때 MB를 찍은 친구와는 만남도 뜸해지고 멀어졌다(이 친구는 촛불집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미쳤다고 표현했다). 반대로 촛불 초기부터 집회 현장에 나가던 친구는 더 친해졌다.

스벤리(40·의사·독일인)
촛불집회의 밝은 느낌이 좋았다. 평화롭고 재미있게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웠다.

“촛불소녀·촛불소년에게 미안했다”

이종현(대학생)

수많은 선거를 치르면서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내가 뽑지 않은 사람이 정작 내게 영향을 끼칠 일들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뽑은 사람은 나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첫 투표의 순간 희망으로 떨리던 마음은 무관심으로 평온해졌다. 이런 내 마음을 다시 흔든 것이 촛불이었다.

날자(26·취업 준비생)
단 한 번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역 국회의원 등 정치인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유에 타먹어요(25·취업 준비생)

밤 10시면 재깍재깍 집에 간 소심한 촛불이었다. 하지만 촛불에서 사람들과 같이 사는 법을 새로 깨달았다.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했던 기업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불매를 이어가고 있다. 

쵸베니(18·고등학생)

소중한 가족들이 피해 볼 게 걱정돼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승리의 지표였다. 보던 신문을 끊고 다른 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방송사도 가려 뉴스를 보게 되었고, 정부 정책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됐다. 5월2일 촛불을 다시 들 것이다.

정성헌(세명대 한의학과)
나 같은 사람도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무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구나. 주변의 잘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소액 기부를 하고…. 평소 안 하던 짓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주로 저소득층을 위한 입시 칼럼을 써주고 있다.

김소희(38·주부)

촛불은 감동이자 상처다. 촛불은 정권이 물리적으로 꺼뜨렸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과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룰이 테러당한 기분이었다.

양상두(대학생)

촛불은 승리했다. 촛불이 패배한 것이라면 정부가 미네르바를 고소하고 MBC PD들을 체포할 이유가 없다. 촛불의 승리에 대한 보복이라고 본다.

김기준(전 금융노조 위원장) 
촛불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하나의 현상이었다. 정치가 썩었을 때 시민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현상이며 직접민주정치였다. 반드시 진보 진영의 편인 것도 아니다. 이런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준비와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김서정(44·작가)

촛불의 성과가 없다. 연속성이 없고. 패배한 것이다. 불을 다시 지필 수 있는 아우라도 없다.

김우섭(34·‘우리반 반장 임영박’ 편곡)
촛불은 내 삶을 변화시켰다. 개성 있는 촛불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개성 있는 큰 촛불이 바로 ‘잡리스’ 활동이다. ‘우리반 반장 임영박’을 통해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집행을 고발한 것에 만족한다.

비가(24·구직 중)
요즘도 ‘명박산성’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진작 없어졌어야 할 말 아닌가. ‘촛불집회 같이 가자’ 카페는 용산집회에 결합하고 촛불 1주년을 준비하며 MT도 추진하는 등 체력을 비축하고 있다(‘비가’씨는 지난해 6월10일 컨테이너 장벽에 ‘명박산성’이라는 현수막을 내건 ‘촛불집회 같이 가자’ 카페의 운영자였다).

권혜진(37·광우병대책회의 운영위원)
촛불 당시 대책회의는 하루하루 일정을 쫓아가는 데 역량을 다 쏟아버려 마무리할 타이밍을 놓쳤다. 촛불 참가자 중 일부는 승리를 구가하던 ‘6월의 기억’에 머물러,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이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승리하고 있던 6월에, 가두투쟁을 다음 단계로 어떻게 전환할지 고민해서 7월5일 이후로는 다른 돌파구를 찾았어야 했다.

문숙현(30대 중반·방송작가)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늦게 찾아오는 일상이 발목을 잡았다. 이것도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촛불을 다시 들려고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와 같은 열정으로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정광현(블로거 ‘한글로’)

시민이 사비를 털어 김밥과 생수를 대던 집회였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보수 단체와 언론에서 당시의 기억을 왜곡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폭력이 난무했다거나 일부 운동권만의 잔치였다고 하는데, 기록해두지 않으면 수만명의 기억이라도 왜곡되기 마련인 것 같다. 정확한 기록은 블로거 기자인 내 임무다.

“지금도 매일 촛불 든다”

홍도미(49·교육생협 G.E.P 준비 중)
아이들이 말렸다. 엄마 위험하다고. 촛불집회에 먼저 나간 것은 고등학생 딸이었다. 저희들끼리 문자 돌려가며 나가곤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저희들끼리 모여 재미있게 놀다가 나중에 판이 커지니까 재미없다며 빠지더라.

안인숙(30·주부)
촛불이 하도 시끄러워서 불편했다. 촛불이 얼마 하지도 않은 대통령을 너무 몰아갔다. 오버했다. 

김배곤(41·정당인)
정권이 바뀌고 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국정 운영 스타일을 보면서 민주주의가 없어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촛불을 보면서 따뜻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촛불을 든다.

전택기(36·자영업)
촛불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의 비민주성이 여러 번 드러났다. 용산도 그렇고 감세정책도 그렇고. 미네르바, YTN, KBS 사건 등에서도. 앞으로 지방선거에서 촛불의 의미를 이어가야 한다고 본다.

아무개씨(38·시민단체 간부)

백지 인터뷰로 내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정부가 촛불을 시민단체 지원 문제까지 연결하면서 간섭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실명으로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지금 현실이다.

김현진(28·에세이스트)
촛불집회 이전에는 시위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니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물대포를 아가씨에게 쏘아대 아끼는 원피스를 망가뜨리고, 몸에 흉터나 만드는 게 무슨 정부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좌파’ 취급당하는 세상이 됐다. 순진한 소년이 노련한 누나를 짝사랑하다 실연당한 셈인데,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강대준(52·금융노조 대외협력본부 국장)

사람들이 촛불을 끈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사과까지 해놓고 뒤로는 촛불 시위자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좌절이나 절망보다 엄청나게 실망했다.

김수일(42·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자)
촛불시위 처음부터 워낙 여론이 한쪽으로 쏠려 있어서 뭐라고 이야기해볼 수도 없었다. 망한 업자도 많다. 이제 촛불시위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너 때매 살아(44·‘강남촛불’ 회원)

우리의 민주주의가 10년 전, 20년 전으로 퇴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매일 강남역에서 촛불을 든다.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딸 때문에 촛불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너희들은 공부해라. 엄마는 민주주의를 지키마”라고 말하고 혼자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원희정(35·자영업)
촛불 이후 생활 자체에 큰 변화는 없다. 다만 미국산 쇠고기는 절대 안 먹는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정권이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것 같다. 답답하다.

이영희(33·커플 매니저)
촛불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경찰이 진을 치고 있으면 기분이 나빴다. 결과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촛불이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다.

김배승(34·은행원)
민주주의가 정착되는지 그런 문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새로운 집회문화가 자리 잡는 게 긍정적이었다. 심각한 표현을 축제처럼 즐기면서 했다.

임종인(52·전 국회의원)

촛불은 대중민주주의 확산이라고 본다. 대중이 생활 깊은 곳의 문제를 정치 문제로 인식하면서 정치 참여 폭이 넓어졌다. 여기에는 정당이 국민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도 작용한다. 이명박 정권이 소수를 위한 이익만을 대변한다면 정말 큰 불이 일어날 것이다.

윤덕찬(35·연구원)
1년 전 시위대를 진정시키려고 전경과 시위대 사이에 섰다가 전경이 휘두르는 방패에 맞아 코뼈가 내려앉았다. 병원비는 모두 내가 부담했고 경찰로부터 어떤 사과나 배상도 없었다.

시몬(17·고등학생)
촛불집회에 매일 나오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뭔가를 해낸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언론이 중요하다. 기자가 되겠다.

전명산(39·직장인)

촛불이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인가에 대해 고민이 된다. 촛불 말고 새로운 방법(솔루션)을 모색하는데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올해는 지난해와 같지 않을 것 같다. 촛불로는 할 만큼 해본 것 같다는 느낌이다.

김작가(35·대중음악 평론가)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200만원 벌금 받고 지금 재판 중이다. 정권은 버티기 작전에 들어섰는데, 우리는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프레임에 갇혀 내부 동력을 소진했다. 올해는 기대 안 한다. 사람들이 쇠고기 문제처럼 자기 문제로 여길 때 움직이는 것 같다. 아직 임계점이 오지 않은 것 같다.

홍치선(29·회사원)
내가 직접 역사가 된 것을 느꼈다. 세상 일이 방송이나 신문에서 말하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우리나라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도 느꼈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경찰들 발에 밟히고 끌려가는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과 목이 터져라 외쳐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회의도 들었다. 5월2일에 촛불을 폭발시키자는 사람들이 많다.

송재은(일반인)

내가 일제강점기 때 태어났다면 친일을 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촛불집회를 나간 후부터 독립투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고 정치적 의식과 참여도 높아졌다.

“촛불은 내 가슴을 친 죽비였다”


나비효과(고등학생)
촛불은 나에게 최초의 주권 행사였다. 촛불은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규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촛불이 패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촛불은 한국 민주주의의 절정이자 애국심으로 만든 ‘불바다’였다.

지정남(원로 외신기자)

안으로 타고 있는 내연 상태다. 탄압에 의해 연소는 안 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타오를 것이다. 촛불집회 초기에 고등학생·중학생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재연도 그쪽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쇼콜라(29·휴학생)

촛불은 죽비였다. 막연히 불만만 내뱉던 내게 불합리한 까닭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고,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알 수 없었던 일들을 알게 했다. 촛불은 내 가슴에 ‘딱’ 소리를 내며 내리쳤다.

벨라(30·회사원)

촛불은 희망과 절망이 날실과 씨실이 되어 교차하는 ‘질긴 옷감’이었다. 촛불이 패배했다면 그건 철저히 민주적이고 비폭력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또한 승리한 거고.

도라몽(23·대학생)

계속되는 정부의 탄압(정말 무서웠던 전·의경의 폭력)과 언론의 왜곡 보도, 또 그것을 받아들여 촛불 든 사람을 질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시선들…. 모든 게 복합적으로 얽혀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지쳐갔다. 

김게바라(소울드레서 신문광고와 엠블럼 디자인)
촛불을 켠 이유는 정권의 실정과 이를 견제하고 정화시킬 수 없는 ‘쓰레기’ 언론, ‘중심을 잃은 사법부’에 의한 ‘삶의 공포’였다. 국민을 장님으로 생각하는 정권과 언론에게 국민이, 내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촛불은 민주주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김미정(27·직장인)
촛불은 ‘감동’이었다. 평택 대추리 집회나 한·미 FTA 반대 집회나 서명운동에도 종종 참여했지만 그때마다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 촛불집회 때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나와 얘기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김정한(20·당시 고등학생)
나는 대안학교를 다녀서 항상 ‘남들과 다른 아이들’만, 작은 집단만 봐왔다. 그런데 촛불집회 때 아주 많은 사람이 다 함께 무언가를 외치는 것을 보고 전에 몰랐던 행복감을 느꼈다. 마치 친구들과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 같았다.

장봉환(52·출판업자)

1980년대 이념 세대가 문제다. 난 이들을 패잔병이라 표현하고 싶다. 잔류병들이 1980년대 스타일로 선동하려 들었다. 정권이 진압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시민도 떠나기 시작했다.

김훈범(30·제주MBC PD)

제주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제주에 있는 안티 이명박 카페 같은 경우는 대부분 생활인이었다. 농부나 주부, 고등학생 등. 이른바 데모꾼은 결코 아니었다.

한윤형(인터넷 논객)

나는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우리가 폭력 대 비폭력의 프레임이 갇혔던 게 안타깝다. 그때 당시 폭력시위에 대한 반감이 컸던 이들과의 논쟁 때문에 시위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정 아무개양(중학교 3학년)

촛불시위 때 친구들과 함께 서울에 가서 노래하고, 발언한 게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가장 기억나는 건 정부가 무자비한 공권력을 휘두른 거다. 총만 안 쐈지, 5·18 광주항쟁 때와 다른 게 뭔지 모르겠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두환이 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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