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붕괴 이후 일본 기업은 정규직 채용 및 임금 인상을 억제해 지금 일본은 소비 침체로 허덕인다. 위는 요코하마 항에서 수출되는 일본 차.
일본 경제가 글로벌 경제 위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2008년 4분기 GDP는 마이너스 12.1%(연율 기준)로 나타났다. 이후 속속 발표된 각종 경제지표는 ‘전후 최악’ ‘통계작성 이래 최저’를 기록하며 ‘100년에 한 번’ 이라는 경제 위기 한가운데에 처했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금융 부문의 충격은 미약했으나 실물경제 부문에서는 침체가 유독 심해 그 구조적 원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맞은 직접 원인은 글로벌 경기 침체로 자동차·전기전자·일반 기계 등 주요 수출품목의 미국·동아시아 등 주요 시장 내 판매가 급감해 4분기 수출이 13.8% 감소한 데 있다. 특히 대미 주력 수출품목이기도 한 자동차의 경우 전년에 비해 2008년 9월 이후 2009년 1월까지 수출의 65%가 감소했다. 이 중 대미 수출은 무려 75%나 급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9월 이후 일본의 엔·달러 환율은 30% 정도 절상되어 같은 기간 한국의 원·엔 환율의 60% 평가절하와 대조를 이룬다. 이는 일본산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약하게 해 수출 감소를 부채질했다.

일본이 선진국 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위기에 처한 이면에는 내수기반 침체에 따른 수출의존형 성장구도 고착화라는 2002년 이후 일본 경제의 구조 변화가 자리한다. 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수요 면에서 크게 국내 수요(민간최종 소비지출과 기업 설비투자가 핵심)와 수출을 중심으로 한다. 일본의 경우 민간최종 소비지출(개인 소비) 비중이 가장 크다. 그 뒤를 기업 설비투자가 잇고, 수출은 주요국에 비해 낮은 경제 구조가 특징이다. 그런데 지난 장기 호황기부터 GDP 대비 비중이 가장 적은 수출이 GDP 성장 기여도는 가장 높은 상태가 이어졌다.

수출과 설비투자가 장기 호황 이끌어

일본은 2002년 이래 개인 소비 침체→수출 증대→수출의존적 설비투자 확대라는 구조가 형성되며 과거 ‘이자나기 경기(1966~1970년에 걸친 57개월간)’ 기록을 깨는 장기 호황(2002년 2월~2007년 10월의 69개월간)을 맞았다. 이 시기에도 이미 내수 기반은 침체되어 있었으나 신흥개도국의 고성장과 미국의 호황을 배경으로 수출은 증가세를 지속했다. 따라서 수출의존형 성장이 설비투자를 확대하는 수출과 투자 간 상관관계가 점차 높아졌다. 특히 자동차·기계 등 수출의존도가 높은 산업은 영향력계수(다른 산업 생산에 미치는 영향력 정도)도 높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이들의 수출 감소가 곧 국내 생산 및 투자 감소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2008년 4분기의 수출 급감이 5.4%의 투자감소를 유발하는 주원인 제공자가 된 것이다.

일본 경제의 구조 변화는 세 가지 주요 항목의 GDP 대비 비중 및 기여율 추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버블 붕괴 뒤 경기회복기가 시작되는 1994년에 GDP 대비 민간 소비와 수출 각각의 비중은 55.7%, 8.6%로 전자가 압도적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2001년부터 수출 비중이 증가해 2008년에는 16%에 이르렀다. 설비투자 추세도 이와 연동되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성장세를 이어갔다. 반면 민간 소비는 2002년 56.3%를 정점으로 오히려 감소세로 돌아서 2007년 54.1%까지 떨어진 뒤 2008년 미미한 회복세를 보이는 데 그쳤다. 이 시기의 장기 호황이 개인 소비가 아닌 수출과 설비투자에 견인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그러다보니 GDP에 대한 수출의 기여율은 이자나기 경기 당시 고작 8%였으나 이 시기에는 무려 60%를 넘었다.

일본이 최근 장기 호황기에 거둔 연평균 성장률은 1.8%이다. 이를 같은 기간 G7의 여러 국가와 비교해보면 중간 수준에 머무른다. 그 기간 일본의 GDP 중 수출 비중은 과거에 비해 최고 수준인 16.1%인데도 G7 중 미국(11.2%) 다음으로 낮다. 일본 경제의 성장기반이 외수가 아닌 내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수출과 내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각기 9.3%, 1.1%로서, 수출은 G7 중 2위인 독일(7.5%)보다도 크게 높은 반면 내수는 독일 다음으로 낮아 이들에 비해서도 수출주도형 성장 실현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수출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민간 소비는 왜 이렇게 약해진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기업이 장기 불황 전략의 일환으로 채택한 노동시장 유연화의 영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버블 경기 붕괴 이후 일본 기업은 인건비 삭감과 경기 변동에 대응하기 쉽도록 정규직 채용 및 임금을 억제하고 비정규직 고용 확대로 고용전략을 선회했다. 그 결과 피고용자 중 비정규직 비중은 1985년 16.4%였던 것이 버블 붕괴 이후 급증해 2007년에는 사상 최대인 33.5%에 달하게 되었다. 비정규직 증가는 고용 불안 및 임금소득 감소를 의미한다. 거대 내수시장을 지닌 일본 경제에서 수출 증대가 기업의 수익 증대를 초래한 반면 임금을 통해 가계로 흐르는 소득 재분배는 원활하지 못해 민간 소비 위축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소득재분배 정도를 측정하는 대표 지표인 노동분배율은 1980년대에 65~70% 사이에서 안정적인 추이를 보이다가 2001년(74.4%)을 정점으로 하락을 거듭해 2007년 70.4%에 머물러 있다. 일본은행의 개인 소비실태 파악을 위한 설문조사(2007년 12월)에서 ‘지출 감소’라는 응답 중 70.6%가 그 이유로 수입 감소를 꼽았으며 ‘장래 수입 증가가 예상되지 않아서’라는 응답도 46.9%에 달했다. 소비 침체의 주요인이 소득 감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일본 경제는 수출의존형 성장 구도를 고착화한 결과 대외 변수에 여지없이 노출되는 한계를 노정한 것이다. 일본이 맞은 미증유의 경제 위기는 경제 대국의 수출 의존적 성장 구도 정착이라는, 다분히 기형적인 구조 변화의 부작용이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일본 경제의 탄탄한 내수시장을 뒷받침한 고임금 노동이 기업의 단기적 성과에 급급한 비정규직 고용 확대와 그로 인한 소득분배율 악화로 인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것이 기업에게는 장기적으로 개인 소비 위축에 따른 판매 부진과 생산 감소라는 부메랑이 될 수 있음을 일본은 막대한 사회 비용을 치르며 학습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모습이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자명 김양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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