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1일, 질병관리청(질병청)은 올해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국가접종 후 사망 사례가 9건 접수되었다고 밝혔다. 다음 날, 주요 일간지는 일제히 ‘백신 접종 후 사망’ 보도를 1면 머리기사로 배치했다. 특히 세 매체가 눈에 띄었다. 〈조선일보〉 기사 제목은 ‘엿새간 10명 사망, 독감백신 쇼크’였다. 〈중앙일보〉는 ‘독감백신 사망 10명, 정은경은 “접종 계속”’이었다. 〈한국일보〉는 ‘9명 사망에도…정부 “백신 탓 아냐” 접종 계속’이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고, 정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10월26일, 질병청은 이날도 백신 접종 후 사망 사례를 집계해 발표했다. 닷새 만에 숫자는 여섯 배 넘게 늘어 모두 56건에 이르렀다. 언론의 반응도 여섯 배 더 커졌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뚜렷이 뒷걸음질쳤다.

독감 예방접종 후 사망자 숫자는 의미 있는 정보라고 보기 어렵다. 10월26일까지 예방접종을 한 사람은 1468만명이다. 해마다 10월에 사망하는 숫자는 평균 2만5000명쯤 된다. 이러면 ‘접종 후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게 오히려 통계적 기적에 해당한다(독감 백신 접종이 두려운 당신을 위한 해설서 기사 참조). 10월22일 이후로 백신 접종 후 사망 기사가 눈에 띄게 줄어든 이유는, 백신 부작용 사망으로 볼 근거가 나오지 않아서다.

독감은 증상만으로는 코로나19와 구별하기 어렵다. 독감이 유행하면 열이 나는 환자가 급증할 것인데, 병원은 예년처럼 독감 치료를 해서 돌려보낼 수가 없다. 환자의 코로나19 진단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동네 의원은 발열 환자 접수를 거부할 수도 있다. 매년 3000명이 독감으로, 또는 독감이 원인이 된 폐렴 등 다른 질병으로 사망한다. 올해 독감이 유행하면 의료 공급이 딸려서 이 숫자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그래서 보건 당국은 올해 독감 유행 차단에 특히 집중하고 있다. ‘백신 쇼크’ 보도는 이 살얼음판에 던지는 자갈 같은 효과를 냈다.

독감 백신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으로는 아나필락시스가 있다. 면역반응으로 일어나는 급격한 알레르기성 쇼크로, 독감 백신뿐만 아니라 여러 주사제나 약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길랭·바레증후군도 주요 부작용이다. 신경이 손상되어 근육마비 증상을 보인다. 두 부작용은 백신 접종자 100만명당 한 명꼴로, 극히 드물게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바로 사망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아나필락시스는 급성 쇼크 반응이지만 의료진이 조치하면 바로 회복할 수 있다. 백신 접종 후 30분쯤 의료기관에 머물라고 권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길랭·바레증후군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대부분 회복하며, 급성 호흡곤란이나 심장마비 사망 사례가 환자 중 2~3%다. 부작용이 발생할 확률과, 거기서 다시 사망에 이를 확률까지 고려하면 백신 접종 후 사망 가능성은 사실상 무시할 수 있다.

2009년에 독감 백신을 맞은 65세 여성이 이 길랭·바레증후군과 같은 계열의 밀러·피셔증후군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1년 동안 독감 백신 부작용 사망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사례다. 횡단보도에서 죽는 보행자가 연평균 373명이지만, 횡단보도 통행금지 주장이 분출하는 일은 없다. 숫자는 하도 자명해서,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다.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2009년에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이종구 교수(서울대 의과대학)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과학적 근거를 보여줘도 여전히 백신과 방역을 불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설득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지동설 대신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시사IN〉 제684호 ‘백신 출시 이후 어떤 일이 발생할까’ 참조).”

그래서 오히려, 진짜 흥미로운 대목은 여기부터다. 왜 백신 반대론은 시대와 문화권을 넘나들며 주기적으로 등장하는가? 왜 과학적 근거와 자명한 숫자는 어떤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독감 바이러스보다 독감 백신을 더 심각한 위협으로 느끼는가? 그러니까, 누가 왜 천동설을 믿는가? 백신을 두려워하도록 우리를 몰아가는 무엇이 있다면, 유력한 용의자는 우리 자신의 직관이다. 우리 뇌에 세팅된 직관은 생존에 도움이 되라고 진화했지, 자연의 질서나 과학을 이해하라고 진화하지는 않았다. 백신의 안전성 평가와 같은 문제를 풀 때, 직관은 못 믿을 안내자다.

10월22일 주요 일간지는 일제히 ‘백신 접종 후 사망’보도를 1면 머리기사로 배치했다.

■ 경계선을 지키려 하는 직관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안예모)이라는 시민단체가 있다. 2006년에 설립한 안예모는 한국의 대표적인 ‘안티 백신’ 단체다. 독감 백신 뉴스가 폭증한 이후 안예모 홈페이지에는 ‘백신 쇼크’ 유의 공포 조장 기사들이 계속 스크랩되고, 자체 브리핑도 발행한다. 10월23일에 올라온 브리핑에는 “감염병이 무서워 안전한지 검증이 안 된 백신을 먼저 들이미는 것은 순서가 아닙니다”라고 쓰여 있다.

안예모 회원들을 대상으로 자녀 예방접종 거부 부모를 연구한 논문이, 2013년 한국아동간호학회 학회지에 실렸다(차혜경·하은호, ‘자녀 예방접종 거부 부모의 주관성:Q 방법론적 접근’). 논문은 예방접종 거부 부모들이 ‘백신 효과보다 부작용을 더 염려하는 태도’ ‘백신에 포함된 유해물질이 해롭다는 태도’ ‘검증되지 않은 유해물질을 아이 몸속에 주입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태도’ 등을 공유한다고 썼다. 특히 예방접종 불신이 강한 그룹에서는 “아이의 자연치유력과 면역력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예방접종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인위적 예방접종’ 대 ‘자연스러운 면역력’ 중 양자택일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방접종은 인간의 몸이라는 자연의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는 인위적 개입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움에 역행한다. 자연의 경계선 안에 이미 갖추고 있는 자연치유력과 면역력이 훨씬 나은 대안이다. 가장 강경한 예방접종 반대파의 세계관에는 ‘경계선을 지키고자 하는 직관’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안아키)는 한때 회원수가 6만명에 달했다. 안아키는 천연과 인공의 이분법을 극단까지 밀고 가서 사회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심리학자인 폴 로진은 이 경계선 직관을 연구했다. 현대 의료 지식이 없는 원시 인류에게는 감염병을 피하는 직관이 필요했다. 유용한 방법은 오염원과 자기 신체 사이의 경계선에 예민해지는 것이었다. 오염된 무언가가 신체의 경계선을 넘어오려 하면 우리는 역겨움을 느낀다. 역겨움은 몸의 경계선에 직접 닿는 미각이나 후각으로 더 잘 느껴진다. 이게 혐오 반응의 진화적 뿌리라고 로진은 본다(다른 인종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이 경계선을 지키려는 직관과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의 경계선을 넘어오는 외부의 무언가를 일단 경계한다.

안예모 회원들이나 안아키 회원들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무언가(백신)의 위험을 일반인보다 더 크게 평가하고 그 판단에 확신을 갖는다. 이 정도로 강한 경계선 직관은 과학의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경계선 직관이 극단적인 사람들은 “백신의 위험이 제로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위험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과학은 위험을 다룰 때 분포곡선과 확률의 언어를 쓴다. 물조차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물 중독으로 죽는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렇지는 않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들은 “위험이 제로가 아니고, 아직 모르는 위험이 있을지 모르므로, 백신은 위험하다고 보아야 한다”라는 결론으로 달려간다.

ⓒ연합뉴스만 7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독감백신 무료 접종이 시작된 10월19일 한국건강관리협회 건물 앞에 독감 예방접종을 받으려는 시민들이 서 있다.

■ 독립성이 중요하다는 직관

안예모나 안아키와 같은 이들의 강한 경계선 직관을 좀 희석하면, 정치적으로 만만치 않은 버전의 백신 반대론에 부딪히게 된다. 자기책임과 자기결정권의 문제다. 집단면역 효과를 얻으려면 의무 접종에 가깝게 밀어붙여야 하는 백신이 있다. 홍역은 집단면역 도달까지 95% 접종이 필요하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자기결정권을 내세워 백신 접종을 거부하면, 국가는 접종을 강제할 수 있을까?

오늘날 ‘양심적 거부자’라는 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널리스트 율라 비스는 책 〈면역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쓴다. “양심적 거부자는 원래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국은 1853년에 모든 아기에게 백신 접종을 법으로 강제했고, 한 세대 이상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부모들은 자신이 그저 귀찮아서 백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위해 거부한다며 스스로를 ‘양심적 거부자’라고 불렀다. 1898년에 영국 정부는 접종 면제 사유에 ‘양심적 거부’를 추가했다.  

1905년에는 공중보건 영역에서 기념비적인 판결이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나온다. ‘제이콥슨 대 매사추세츠’ 사건이다. 천연두에 시달리던 매사추세츠 주정부는 백신을 거부하는 주민에게 벌금 5달러(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00달러, 약 11만원)를 물렸다. 이 벌금을 맞은 주민 제닝 제이콥슨은 사건을 연방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4조가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이 경우에는 백신을 맞지 않을 자유)를 주정부가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연방 대법원은 주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중보건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안전이 걸려 있는 문제이므로 개인의 자유도 제약할 수 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그럼에도 제이콥슨의 도전은 후대에 울림을 주며 살아남았다. 국가가 공중보건을 위해 자유를 일부 제약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제약’이 가장 개인적인 신체 안으로 침투하는 것까지도 용인해야 할 정도인가? 이후로도 미국에서는 백신 반대 폭동이 주기적으로 일어난다.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의 의무 접종을 법으로 만든 적이 없다.

〈면역에 관하여〉에서 율라 비스는 과학적으로 백신과 집단면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면서도, 개인의 권리와 독립성이라는 가치를 마냥 무시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녀는 윤리학 교수인 동생과의 대화를 소개하며 혼란에서 빠져나온다. 동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몸은 자기 혼자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 몸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요컨대 독립성이라는 환상이 존재한다는 거야.”

ⓒAFP PHOTO미국 매사추세츠 주의회 앞에서 8월30일 학부모들이 독감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직관

백신의 위험을 실제보다 무겁게 보는 방법에도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위험의 크기 자체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앞에서 만나본 ‘안예모’ 부모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좀 더 미묘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식이다. “부작용이 접종자 100만명에 한 번 나타난다고 치자. 정부 목표대로 3000만명에 독감 백신을 접종한다면, 100만명을 접종하는 룰렛을 서른 번 돌리는 셈이다. 그러면 부작용에 ‘당첨’되는 사람이 30명은 나온다. 누가 이런 게임을 하고 싶을까?” 확률이 얼마가 되었든 어쨌거나 ‘0’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룰렛을 돌리고 싶은 생각은 사라진다.

더 나아가, “공중보건을 위해 ‘30명의 당첨자’를 만드는 게 용인되는 일인가. 백신 부작용으로 2009년에 사망한 65세 여성은 공중보건을 위해 목숨을 빼앗긴 것인가”라는 질문도 사람들을 윤리적 딜레마로 빠뜨린다. 백신 접종 후 사망 소식이 한창 들끓던 10월22일, 한 인문학 연구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았다 해도 더 빨리 (접종을) 중지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심지어 의심할 만한 일들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시기별로 따져 물어야 할 죽음을 두고 ‘노인’이라는 이유로 죽을 사람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우리의 보건복지 책임자였다니.” 다음 날 이 연구자는 자신이 백신 반대론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감정에 더 깊숙이 민감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 연구자의 숭고한 요구를 만족시켰다가 집단면역 형성에 실패하면 훨씬 더 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도덕적 직관은 꽤 강력하게 느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도구나 부수적 피해로 간주하면 안 된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도덕 원칙이다. 왜 그럴까. 조슈아 그린은 뇌신경과학자이자 철학자라는 독특한 이력의 학자다. 그는 신경과학 연구를 통해 인간의 도덕 직관이 어떤 논리로 작동하는지 알아내어,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도덕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그의 주무기는 ‘전차 딜레마’라는 유명한 사고 실험이다.

 

ⓒ시사IN 이정현

 

위 〈그림 1〉을 보자.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가 아래에서부터 달려오고 있다. 철로에는 인부 다섯 명이 작업 중이다. 이대로 가면 모두 죽는다. 그런데 전차를 다른 노선으로 돌릴 레버가 당신 앞에 있다. 다른 노선에도 인부 한 명이 작업 중이다. 당신이 레버를 올리면 죽을 인부 다섯 명은 살지만, 살 인부 한 명이 대신 죽는다. 레버를 올리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용인되는가? 실험을 해보면 응답자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답한다.

전차 딜레마를 변형한 ‘육교 딜레마’도 있다(〈그림 2〉). 기본 구조는 같다. 고장 난 전차가 달려오고, 이대로 가면 인부 다섯 명이 죽는다. 그런데 이제 당신은 육교 위에 있고, 바로 옆에는 아주 무거운 등짐을 진 인부가 있다. 당신은 몸집이 작아서 뛰어내려도 전차를 멈출 수 없고, 인부의 등짐을 들 힘도 없다. 전차를 멈출 유일한 방법은 등짐째로 인부를 밀어 떨어트려 전차를 막는 것이다. 육교 위 인부는 죽고 철로 위 인부들은 산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용인되는가? 이때는 아니라는 응답자가 다수다.

뇌영상을 촬영하며 실험을 반복한 조슈아 그린은 흥미로운 결론에 이른다. 우리 뇌에는 도덕 문제를 처리하는 모듈이 두 개다. 하나는 자동적·정서적·직관적 모듈(자동모드)이고, 또 하나는 통제되고 의식적이고 느린 모듈(수동모드)이다.

수동모드는 공리주의자다. 딜레마 구조가 어쨌든 수동모드는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쪽을 택한다. 육교 위에서도 기꺼이 등짐 진 인부를 밀어 떨어뜨린다. 하지만 자동모드는 다르다. 어떤 다른 이의 희생이 불가피한 부작용일 때(레버 올리기)는 비교적 잠잠하지만,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고 다른 이를 공격하여 해를 끼치려 할 때(육교에서 떠밀기)는 화들짝 놀라 수동모드를 뜯어말린다. 자동모드는 직관적 칸트주의자다. 그는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원칙에 충실하다. 그린은 인간이 협력하며 살아가기 위해 이 자동모드가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더 크고 서로 잘 협력하는 공동체를 만들려면 동료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직관이 필요했다.

백신 딜레마라는 게 있을까? 백신 접종은 실제로는 딜레마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쪽 철로에는 3000명이 묶여 있고 반대쪽 철로에는 한 명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더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레버를 올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백신 부작용을 과대평가하는 경향과 유난한 자동모드 도덕 직관이 결합하면, 이때는 백신 접종이 육교 딜레마처럼 작동한다. 분명히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도 부작용의 희생자가 마치 육교 위의 인부처럼 느껴진다. 이 자동모드 상태에서는, “백신은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생명을 살리는 방법이다”라는 말은 이렇게 바뀌어 들린다. “육교 위 인부를 밀어서 떨어뜨려라!”

■ 직관들에 말 걸기

백신 반대론은 현 수준의 과학이 내린 최선의 결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천동설 신봉자에 비교될 만하다. 하지만 이 ‘천동설’의 구성 성분은 단순한 무지와 반(反)지성주의보다는 좀 더 복잡했다. 경계선을 지키고자 하는 직관, 독립성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는 직관, 그리고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도덕 직관이 기묘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 직관이 먼저다. 백신 반대라는 판단은 직관 다음에 오고, 타당하지 않은 그 판단을 정당화하려고 “백신 접종자가 죽었으면 백신 때문에 죽은 것이다” “공짜 백신은 관리가 안 됐다” “중국산 백신이 대거 수입됐다”와 같은 기묘한 논거가 달라붙는다.

이로부터 위험 커뮤니케이션 규칙 몇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과학을 말하되 과학자처럼 말하지는 말 것. 확실할 때까지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화법은 과학 원리에 충실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말 자체가 불안을 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백신 사망 논란이 불타오르던 10월21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사망 사례 9건 중 두 건은 아나필락시스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7건은 아나필락시스가 아니라는 게 확인됐고, 나머지 두 건은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결국 두 건도 아나필락시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경계선 직관의 필터를 거치면, 이 말은 “백신 부작용이 발생했을 수 있다”로 들린다. 국가기간통신사 〈연합뉴스〉는 ‘2명 아나필락시스 쇼크 가능성’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수많은 언론이 그 제목을 그대로 받아갔다.

둘째, 백신 효용을 말하되 ‘육교 위의 살인자’처럼 말하지는 말 것. 부작용으로 생기는 희생보다 백신으로 살리는 목숨이 많다는 식의 단순 비교 메시지는 위험하다. 부작용 희생자가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수단으로 취급된다는 느낌을 주면 우리의 도덕 직관은 칸트주의적 분노를 쏟아낸다. 실제로 백신은 불가피한 희생을 횡단보도 사고만큼도 요구하지 않는 반면 죽을 생명을 유효하게 살리므로 효용과 부작용은 아예 다른 차원에 있다.

셋째, 백신 반대론자를 포기하지 말 것. 미국에서 나온 연구를 보면, 백신 반대자들 중에서도 강한 확신을 가진 백신 거부자는 고작 2%다. 백신을 불안해하는 직관은 꽤 보편적이지만, 모두가 그 직관에만 의존해 과학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직관과 과학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제대로 도착하면 확신형 음모론은 고립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코로나19가 일깨운 통찰을 강조할 것. 백신은 나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집단면역을 형성하여 공동체를 보호한다. 나의 건강은 나 자신의 노력만큼이나 동료 시민들에게도 달려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코로나19 시대는 극적으로 알렸다.

2019년에 세계보건기구(WHO)는 ‘인류 건강에 대한 10대 위협’을 발표했는데, 거기에 ‘백신을 미심쩍어하는 태도(vaccine hesitancy)’가 포함됐다.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홍역 집단감염이 발병해 보건 당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백신 음모론 때문에 홍역 집단면역이 붕괴한 사건이었다. 백신 반대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미 중대한 글로벌 보건 위협이었고, 코로나19 이후에도 잠재된 위협이다.

한국은 백신 음모론의 청정지대였고, 여전히 백신 신뢰도와 예방접종률이 높은 나라다. 백신 반대운동이 주류로 올라설 징후는 아직 없다. 이번 독감 백신 파동은 잘못된 정보로 촉발된 단발성 해프닝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백신이라는 메커니즘에 잠재된 위험의 구조를 고스란히 시연해 보였다. 한국은 이 해프닝을 백신 반대운동에 대한 예방접종으로 만드는 과제를 받았다.

ⓒ연합뉴스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오른쪽)이 10월24일 독감 예방접종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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