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효준 그림
한국 SF 동인지 2호의 표지 그림. SF는 ‘우주에 자유로이 그리는 그림’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35년산 술병에 전자 태그를 붙인다. 그 술병을 상류사회에 유통시킨 후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 자연스레 권력 분포 지도가 그려진다. 이같은 가설 아래 ‘빈스토크’라는 초고층 타워 도시국가의 미세권력연구소는 실험을 시작한다. 연구 의뢰자는 현 빈스토크 시장의 재선을 막으려는 야당 선거사무소. 권력 지도를 그리며 돌고 돌던 술병 중 5병이 (네 발로 걷는) 개 앞으로 전해지며 연구가 난항을 겪는다는 이 이야기는 지난 4월1일부터 작가 배명훈씨(31)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연재하는 옴니버스 소설 〈타워〉의 도입부 줄거리다. 이토록 정치적인 이야기를 지은 배씨는 SF(Science Fiction:과학소설) 작가이다. 당연히 〈타워〉는 SF이다.

SF를 ‘공상과학소설’로 부르면 많은 게 꼬인다.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린다’는 뜻의 ‘공상’이 붙어버린 탓에, 많은 한국인이 ‘SF’라는 말을 들으면 레이저 총과 머리 큰 외계인만 떠올린다. 때로 SF는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환상) 소설과 혼동된다. 경계가 흐릿한 작품도 있지만 두 장르는 분명히 다르다. SF&판타지 도서관 전홍식 관장(35)은 “판타지가 ‘달나라 여행을 가면 좋겠다’라는 ‘바람’이라면, SF는 ‘달나라 여행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구체적인 ‘상상’이다”라고 말했다. 

SF가 일부 마니아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많은 사람이 SF를 ‘SF인 줄 모른 채’ 즐기고 있다. 〈쥬라기 공원〉과 〈아이, 로봇〉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할리우드 인기 영화는 각각 SF 작가 마이클 클라이턴, 아이작 아시모프,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서양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도 SF의 하위 장르로 간주한다. 역시 영화로 제작된 〈찰리와 초콜릿 공장〉(로알드 달)과 〈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까지 SF 범주에 들어가기도 한다.

넓은 작품 세계가 SF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빙산의 일각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가 쉬운 탓이다. 전홍식 관장은 “만화방이나 도서 대여점에 꽂힌 SF와 판타지 소설들이 사람들에게 왜곡된 인식을 심어줬다”라고 말했다. 정작 SF 마니아는 외면하는 질 낮은 ‘유사 SF’ 작품 몇 개를 대여점에서 빌려 보고는 ‘역시 장르 소설은 천박하다’라고 생각을 굳힌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이는 SF를 너무 어려운 장르로 생각해서 문제이다. 2004년부터 3년간 진행된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 심사를 맡았던 박상준 오멜라스 대표(42)는 당시 이공계 대학교수들이 보내온 작품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작품에 전공 분야의 최첨단 이론을 반영하긴 했지만, 정작 SF가 ‘문학’이라는 가장 중요한 기본을 잊었더라.”

한국, 장편 SF 창작 역사 50년밖에 안 돼

한국 SF 문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지난 2007년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를 번역한 〈해저 여행 기담〉이 재일 유학생 학술지 〈태극학보〉에 실린 지 10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인이 직접 SF장편을 창작한 지는 50년을 채 넘지 못했다. 1965년 최초의 한국 장편 SF 〈완전사회〉(문윤성)가 출간된 이후 1987년 〈비명을 찾아서〉(복거일)가 나오기까지 22년 동안 이렇다 할 창작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1980년대 이후부터 1990년대 초·중반이 그나마 ‘한국 SF 창작의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였다. 스포츠서울 등 언론에서 SF 부문 신인 단편 작품을 공모했고, PC 통신을 무대로 SF 동호회가 꾸려지면서 ‘듀나’ 같은 스타 작가가 발굴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 한국 SF는 침체기를 겪었다. 2006년 이후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과 〈판타스틱〉 창간으로 신인 SF 작가 등단의 길이 다시 넓어지나 싶더니, 이내 공모전은 사라지고 잡지 발행 간격도 월간에서 계간으로 벌어졌다.

한국 SF 시장이 얼어붙어도 한국 SF 마니아는 꿋꿋했다. 1970~1980년대에는 출판사 여러 곳이 우후죽순 SF 세계명작전집을 찍어내던 때였다. 당시 허술하게 번역된 해적판 SF 전집을 본 꼬마들이 지금의 30·40대 성인 SF 마니아로 이어졌다. 이들은 SF에서 느낀 감동을 ‘경이로움(sense of wonder)’이라고 표현한다. SF 평론가 고장원씨는 저서 〈세계과학소설사〉에서 “한국 SF 팬층이 2000~3000명쯤이고, 이 가운데 SF라는 표지만 달고 나오면 무슨 책이든 구입하는 절대적 지지층이 500~1000명쯤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했다.

 

출판사가 더 이상 SF를 취급하지 않으면 마니아들은 스스로 우물을 판다. SF 팬끼리 커뮤니티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꾸리고, 저자를 불러 사인회를 열며, 인터넷을 통해 애타게 찾던 절판 서적을 교환한다. SF 전문 출판사 오멜라스의 박상준 대표는 대학생 때 더 이상 읽을 완역판 SF 명작이 없는 게 답답해, 스스로 헌책방에서 원서를 구해 번역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SF 전문 기획자의 길을 걷게 됐다. 지난 3월 개관한 SF&판타지 도서관의 전홍식 관장과 운영위원 9명, 자원봉사자 3명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다. SF 책을 쉽게 구하고 편하게 읽을 곳이 부족해 고민하다가 아예 사비를 털어 주택가 반지하 공간에 도서관을 차렸다.  

고장원씨는 “SF를 좋아할 만한 사람들은 결국 이 세계에 다 찾아오게 돼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찾아올 길이 너무 좁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이다. ‘재미없으면 안 즐겨도 그만’이라고 생각해버리기에는 SF가 우리 사회에 줄 수 있는 효용이 너무 아깝다. 전 관장은 “일본에서는 〈아톰〉 영향을 받아 ‘친구 같은 로봇’을 만들고, 미국에서는 〈아이, 로봇〉에서처럼 ‘도구로서의 로봇’을 만든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우리만의 고유한 로봇이 없다. 이유는 바로 영감을 주는 SF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SF가 꼭 과학기술의 발전만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박 대표는 “SF를 통해 수많은 미래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해봄으로써 현재 인간 사회를 반성하고 재조정해나갈 수 있다. 일종의 미래 대비 매뉴얼이다”라고 말했다.

SF 마니아들이 마련한 SF&판타지 도서관(위)에서는 4000여 권의 장르 도서를 읽을 수 있다.

한국 SF의 토양이 아직 척박한 건 사실이지만 전망이 어둡지는 않다. 배명훈·김보영 등 2000년 이후 나타난 신인 SF 작가 몇몇은 과학적 상상력과 문장력을 훌륭히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SF가 크려면 작가뿐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결국 현실에 뿌리박혀 있다. 고씨는 “SF는 외계인이 나오건 바다 속 이야기건 결국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한 풍자이자 비유이다”라고 말했다. 연재소설 〈타워〉에 나오는 도시국가 빈스토크는 부동산 시세와 생활 물가가 세계 최고 수준인 곳이다. 6월에 〈타워〉를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인 출판사 오멜라스는 인터넷 카페에서 이렇게 밝혔다. “작가 배명훈씨는 〈타워〉를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을 모델로 썼다고 (오프 더 레코드로) 밝혔습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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