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위기의 학교’가 현실화되고 있다.” 전국 단위 진단평가(일명 ‘일제고사’)가 치러지기 전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내놓은 성명서 제목이다. 2000년 가디언 기자인 닉 데이비스가 쓴 책 〈위기의 학교〉(사진·우리교육 펴냄)가 새삼 화제이다. 토니 블레어가 1997년부터 추진한 영국식 교육개혁이 학교 현장을 어떻게 위기에 빠뜨렸는지 고발한 이 책이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는 입소문을 타면서이다. ‘전국 단위 진단평가 실시→평가 결과 공개→평가 결과에 따른 예산 지원 차등화’로 특징지어지는 블레어식 교육개혁에 대해 저자 데이비스는 ‘정치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교육적으로는 실패한 정책’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그로부터 다시 9년이 흐른 지금, 영국의 교육 현장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 중인 송지영씨가 현지 사정을 담은 기고문을 보내왔다. “토니 블레어가 추진했던 교육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이 놀랍도록 닮았다”라고 말하는 송씨는 블레어식 교육정책의 폐해로 인해 지난 10년간 영국 사회가 직면했던 문제에서 한국이 시사점을 얻기 바란다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앞줄 오른쪽)는 1997년 집권시 강력한 교육개혁을 약속했다.
토니 블레어는 1997년 교육개혁을 가장 중요한 선거 공약 중 하나로 내걸었다. 교육 재정을 충분히 늘리고 학업 성취도를 높일 것을 약속했다.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추진한 것이 전국적인 학업성취도 시험 실시 및 평가 결과 공개였다. 이 과정에서 블레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교육 재정을 늘리겠다던 애초의 약속과 달리 빈곤층 학생의 사립학교 진학 지원 제도(assisted places)를 없애버렸다. 이 제도는 대처 전 총리가 추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7년, 블레어의 교육정책이 거둔 성과는 다음과 같다. 학생당 48%의 재정 지원 증가, 국립학교 재정 지원 증가,  신규 교사 3만5000명 및 조교 17만2000명 채용, 교사 임금 18% 증가, 1106개 학교 증설. 이를 위해 블레어는 약 12억 파운드(약 2조4000억원)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돈을 썼다. 그 결과, 우수 학생 비율이 1997년 35%에서 2007년 45%로 늘어나고, 기준 미달 학교가 1600개에서 670개로 줄었다.

그러나 ‘제3의 길’식 시장경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블레어 교육정책은 결과적으로 학교를 ‘시험 공장’으로 만들고,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른 교육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BBC는 이를 두고 “영국이 ‘2개의 민족(two nations)’으로 나뉘었다”라고 표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별로 힘들지 않게 대학을 가는 부자 학생과 고등학교를 마치고도 특정한 기술이 없는 가난한 학생으로 말이다. 한 예로 학생의 가정환경이 부유한가 가난한가를 보는 기준이 무료 급식 비율인데, 무료 급식 비율이 절반 이상인 학교에서 우수 학생 비율이 13%인 반면, 무료 급식 비율이 10% 이하인 학교의 우수 학생 비율은 58%에 달했다.

가디언의 앨런 스미더는 블레어 교육정책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정부가 학교를 ‘시험 공장’으로 전락하게 하고, 나아가 상급 학교 진학을 모든 ‘학부모의 악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교육 목표를 집중한 결과, 대다수 국립학교는 다채로운 수업을 진행하지 못한 채 다가오는 시험 준비를 하기에 바쁘다. 2007년 유니세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 아이들은 21개 선진국 중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난한 학생의 대학 진학은 점점 어려워진다. 위는 수업료 인상에 반대하는 영국 대학생들.
영국 어린이 행복지수, 선진국 중 꼴찌

정부는 학교 순위 공개로 인해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이 확대됐다고 선전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이 순위 때문에 자녀의 상급 학교 진학 때 학교 선택 문제가 모든 학부모의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초등학생 에밀리의 경우를 보자. 에밀리가 사는 동네 중학교는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가 좋지 않은 가난한 지역에 있어 내년이면 폐교되거나 다른 학교로 통합될 예정이다. 에밀리 부모는 공부 잘하는 에밀리만은 좋은 교육을 받아 자기들처럼 가난하게 살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학교 순위가 높은 인근 지역 중학교로 진학해야 하는데, 그 학교는 거리가 먼 데다 입학 경쟁 또한 치열하다. 더 큰 문제는 그 학교가 자기 지역 아이들한테 우선순위를 준다는 것이다. 에밀리 부모는 집값이 매우 비싼 그 동네로 이사 갈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장 전입이라도 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반대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부모가 돈을 잘 버는 폴의 경우를 보자. 폴의 동네에 있는 학교는 절반 이상이 사립이다. 입고 있는 교복만 봐도 대충 사는 수준이 어떤지 짐작이 간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중학교로 입학이 가능하니, 부모로서는 상급학교 진학 걱정은 없다. 공부에 관심이 별로 없는 폴이 명문대를 가게 하려면,  A레벨 때 옥스브리지(Oxbridge·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합쳐 부르는 말) 출신 가정교사를 두든지 해서 성적을 올리면 된다. 이를 두고 영국 정경대(LSE) 연구팀은 정부가 말하는 학교 간 경쟁 및 학교 선택 기회의 다양화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는 데 결코 기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부모 소득에 따른 교육의 불평등을 확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낳은 또 하나의 사회적 파장은 정부와 미디어에 의한 학교 서열화이다. 정부는 단계별·연령별·학교별 학업성취도 결과에 따라 학교 이름과 순위를 시·군·구 단위로 공개하고, 미디어는 이 데이터를 가공해 복합적인 교육 정보를 단순한 숫자와 서열로 만들어 학부모에게 배포한다. 이 과정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학교들에는 온갖 모욕적인 이름이 따라붙는다. 말 그대로 ‘이름 붙여 창피주기(naming and shaming)’이다. ‘실패 학교’ ‘현실안주형 학교’ 따위가 그 예이다.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는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몇 가지 통계가 사립학교의 현실을 잘 반영한다. 영국의 비영리 교육기관인 ‘서턴 트러스트’가 2008년 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상위 3% 100개 고등학교 중 78개가 사립학교, 21개가 그래머 스쿨(사립과 국립의 중간형)이다. 일반 국립학교는 오직 1개뿐이다.

‘독립학교(independent schools)’ 혹은 ‘공립학교(public schools·이전에 가정교사를 두던 아이들이 함께 모여 공부한다고 해서 공립이라 불리지만, 미국과는 그 쓰임이 정반대이다)’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사립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약 2500개 존재하며, 이들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 약 62만명에 이른다. 이들 학교 중에는 킹스스쿨을 비롯해, 웨스트민스터(1179년), 이튼(1440년) 등 오래전에 설립한 학교가 많다. 학비가 기숙은 평균 연간 7334 파운드(약 1466만원), 통학은 4141파운드(약 800만원)이나, 이튼이나 하로같이 유명한 학교는 연간 학비가 2만5895파운드(5000만원 이상)에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비싼 학비에도 불구하고, 우수 대학 진학률이 높으며 다양한 예체능 시설과 문화 환경을 제공하는 사립학교를 선호한다. 이들 학교 졸업생의 92~95%는 대학에 진학한다. 상위 5개 고등학교(물론 모두 사립) 학생의 41%가 옥스브리지에 간다.

상위 5개 사립고 학생 41% ‘옥스브리지’ 진학

그렇다면 반대로, 대다수 국립학교는 사정이 어떠한가? 가디언의 교육전문 기자 제니 러셀은, 국립학교 대부분이 옥스브리지가 요구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옥스브리지는 탁월한 성적뿐만 아니라 지적인 창의력,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와 토론 능력, 특수 영역에 대한 깊은 지식과 열정까지 요구한다. 학업성취도 시험 준비 교과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립학교 커리큘럼으로는 이런 것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다. 러셀은 영국에서 “계급은 운명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일례로 한 국립학교의 역사 시간을 보자. 교사는 1차 세계대전 단원을 화요일 오후 30분 안에 다 끝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주 화요일에는 독일 나치의 성장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한 학생이 묻는다. “그럼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과 나치의 성장까지 1933년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교사가 답한다. “그걸 다 할 시간이 없단다. 넘어가자.”

사립대학에서는 값비싼 파티가 열리곤 한다. 사진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메이볼’ 행사.
2009년 2월, 케임브리지 대학 교육학과 로빈 알렉산더 교수팀은 〈케임브리지 프라이머리 리뷰〉를 발표했다. 올해 발표를 앞두고 있는, 초등학교 교육과정 개정 방향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고서 〈로즈(Rose)〉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지난 2년간 교육 전문가 수십명이 교사·학부모·학생의 의견을 수렴해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서 케임브리지 교육 전문가들은 지나친 학력평가시험 준비로 인해 아이들이 폭넓은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영국의 초등교육이 수리와 문해(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국·영·수)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면서 이해와 탐구보다 암기와 기억이 중시되고, 토론과 문제해결 능력 향상을 위한 학습이 병행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음악, 미술, 특히 인문 과목(사회·역사)이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점 또한 지적 대상이었다.

지난해 9월 영국 대학 연례회의에서 케임브리지 대학 부학장 앨리슨 리처드는, 가난한 학생을 일정 규모 수용하기를 장려하는 정부 정책이 대학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며 비판했다. 교육기관의 본질적 구실은 교육·연구이지 산업의 보조나 사회계층 이동 및 사회정의 실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케임브리지 대학은 얼마 전 입학 기준을 높이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A등급을 받는 학생이 너무 많아 좋은 학생을 선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A스타(A*)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립학교들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방침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방식은 사회정의와 동떨어진 구시대적 엘리티즘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들어가기 힘든 학교 문턱을 더 높여놓았으니, 현재와 같은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립학교를 다니는 대다수 가난한 학생은 옥스브리지에 입학하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현재에도 케임브리지 대학 학생 대다수는 사립학교 출신이거나, 국립학교를 나왔어도 중산층 이상의 교육열이 높은 가정 출신이다. 이 학생들이 졸업해서는 소득이 높은 직장을 구하고 결혼해 자식을 또 사립학교에 보내는 계급 대물림이 이어지는 것이다.

케임브리지의 빈곤층 학생 비율 10%

ⓒFlickr전국 상위 100개 고교 중 사립학교가 78개에 달하는 영국에서 사립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위는 명문 고등학교 이튼스쿨 학생들.
반면 케임브리지 대학의 빈곤층 학생 비율은 10명에 한 명꼴이다(옥스퍼드 대학은 그보다 더 낮다). 극빈층 아이의 경우는, 부실한 가정교육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학업 능력이 중산층 아이보다 떨어 지게 돼 있다. 상급학교 진학 때 어느 학교를 가느냐를 놓고 각종 스트레스를 받으며, 중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경쟁에서 처지기 십상이다. 그나마 별다른 창의력 교육 없이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 학업능력이 뛰어난 극소수 빈곤층 학생만 옥스브리지에 가는 것이니 공평한 경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불공정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빈곤층 학생은 케임브리지 대학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값비싼 파티와 ‘메이볼’(May Balls·해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행해지는 칼리지별 파티 행사로, 입장료가 적게는 20만원, 많게는 100만원에 이른다)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부자 학생들과는 다른 대학 생활을 한다.

2009년 현재에도 변한 것은 별로 없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학업성취도 반영 기준을 25%에서 30%로 높이고, 2008년 12월에는 뉴욕식 ‘리포트 카드(report card)’ 제도를 도입해 전국의 학교를 A~E 등급으로 분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취학 어린이 수는 줄고 경제난은 심각해지며 사립학교 등록금은 오르는데도 사립학교 진학생 숫자는 늘어만 가는 것이 영국 현실이다. 정부는 계속해서 교육 투자 확대를 얘기하지만 학력 미달 아이들은 여전히 전체의 9%에 달하며, 최상위와 최하위의 격차는 날로 커져간다.

서턴 트러스트는 장학금과 정부보조금을 확대해 빈곤층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편입시키는 방법을 주장하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한 사립학교 교장이 지적하듯, 이런 식으로 국립학교에서 잘하는 애들을 사립학교로 빼가는 방법은 ‘교육 격리정책(apartheid)’을 깊게 할 뿐이다. 잘하는 애들이 빠져나간 국립학교에는 더욱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앞장서 자율형 사립고를 도입하고, 일제고사를 부활하며, 학교별 성적 공개를 추진하는 한국은 어떨까. 불행히도 필자는 한국이 영국과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낙관할 자신이 없다. 한국 학부모들은 지난 몇 십 년간 이미 값비싼 사교육비와 싸워왔다. 아이들은 방과 후 몇 군데 학원을 전전하며 주말에는 학교 숙제에 학원 숙제까지 떠안은 채 쩔쩔매야 했다. 자율형 사립고가 늘어나고 이들을 포함한 전국 학교들의 성적순위가 공개되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학력 서열화는 영국의 경우에서 보듯 부모의 소득에 기반한 계급적 위계를 고착시키고 이를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경쟁에서 처진 학교들은 ‘지못미 학교’ ‘허접 학교’ ‘찌질 학교’ 따위 딱지가 붙는 모욕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영국을 보며 한국 교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명 케임브리지·송지영 (자유 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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