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대학에 대해 품고 있는 근본적인 불신은 대학 그 자체의 중요성을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본래 대학은 객관적인 지식의 축적을 근거로 보편적인 진리에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공기(公器)인 이상, 건전한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자면 무엇보다도 ‘큰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 사심 없이 헌신하는 연구자들이 대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대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과 권력과 세속적 명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적인 경제논리가 활개를 치는 상황에서 세계 전역에서 대학은 끊임없이 왜곡되어 왔지만, 한국의 대학은 특히 이런 경향에 극도로 취약한 체질을 드러내었다. 한국 사회 자체가 극단적인 성장과 경쟁논리에 지배되어온 이상, 이것은 불가피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대학은 ‘용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자’들의 집합소”

그 결과, 최근 상지대 총장에서 물러난 김성훈 교수의 말을 빌리면, 지금 한국의 대학은 “용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이비 학자들의 집합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농업경제학자인 김성훈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농촌과 농민들에게 진정한 ‘우군’이 돼야 할 농업 관계 학자들이 곡학아세를 일삼으며 한국 농업을 절망의 수렁으로 빠트리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 말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학자,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적인 학자들이 갈수록 소외되고, 나아가서는 아예 대학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겠지만, 이 현실 자체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자 재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내가 알고 있는 40대 초반의 한 학자의 이야기는 특별히 예외적인 것이 아닐지 모른다. 김 아무개는 본래 학부 시절 국문학을 전공했으나, 문학을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석사 과정에서는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그 후 일본 유학 길에 올라 도쿄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도쿄 대학에 와 있던 한 이태리인 교수의 영향을 받아 이태리어를 배우고, 중세 및 르네상스기의 유럽문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의 끊임없는 지식욕과 학구열은 이에 멈추지 않고 고대 그리스 및 로마 문학에 대한 학습으로 이어졌다. 그는 일본에서 10년 넘게 체류하면서 10개 이상의 외국어를 익혔다. 그리고는 재작년에 ‘18세기 러시아 시에 대한 호라티우스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런 그가 막상 돌아와 보니 일할 자리가 없었다. 그는 귀국 후 1년 동안 시간강사 자리라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그에게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대학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실망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갈증과 욕망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그는 자신의 평생 공부를 위한 생계수단으로 숙련 육체노동을 생각했고, 그래서 몇 달 동안 석공 일을 배웠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일이 자신에게는 무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 나와 만났을 때, 그는 최근에 어떤 출판사의 의뢰로 고전 그리스 작품 한 편을 번역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어린애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네덜란드 여왕이 영국의 가장 우수한 과학자들이 모여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했을 때이다. 안내를 맡은 천문대장이 매우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여왕은 자신의 친구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천문대 과학자들의 봉급 인상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천문대장은 천문대 과학자들에게 높은 급료가 지불된다면, 사이비 과학자들이 곧 천문대를 점령하게 될 거라고 하면서 간곡히 만류했다.

 이 에피소드에는 오늘의 대학을 정상화하기 위한 명쾌한 방안이 암시되어 있다. 즉, 우리 대학들을 정말 양심적인 학자들의 서식처로 만들려면 교수들의 봉급을 대폭 낮추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돈과 권력과 헛된 명예에 대한 관심 때문에 대학에 몰려들어 있는 수많은 사이비 학자들은 절로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 대신 정말 공부하는 게 좋아서 공부에 열중하는 학자들은 가족과 함께 최소한 생활유지가 가능한 수준의 봉급만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하면서 대학에 남아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안심하고 대학의 주인 노릇을 할 때라야 희망이 있는 사회가 될 것임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기자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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