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내가 문화경제학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교과서적 의미에서 문화경제학과 생태경제학은 몇 글자 다르지 않은, 거의 똑같은 학문이다. 생태학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생태경제학은 어쨌든 생태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그런데 문화경제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영화, 미술, 음악 같은 문화 활동으로 문화경제학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은 최근 일이고, 원래의 문화경제학은 어떻게 문화재를 보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그 핵심 방법론들이 형성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한국 문화는 ‘소박한’ 가격

새만금의 갯벌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은평 뉴타운이 파먹고 들어간 북한산 계곡의 가치는 얼마인가, 아니면 대운하가 들어가겠다는 조령 계곡은 어느 정도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 이렇게 ‘돈으로 말해봐라’ 하는 전선 앞에서 나는 때때로 돈으로 추정하고, 때때로 시스템 문제라는 색다른 명제로, 14년째 국토 생태 앞에서 그야말로 전투 중이다. 문화경제학도 비슷한 일을 흔히 한다. 개발 앞에서 문화도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너의 가치를 돈으로 말해봐’ 하는 적들 앞에서, ‘나는 국가 지정 문화재야’ 혹은 ‘시·도 지정 문화재야’ 하고 버티고 있는 셈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생태계의 가치는 오염 정화능력, 산소 생산 능력, 유기농산물 생산 능력 등 객관적 수치가 있지만, 문화재는 이런 능력이 없으므로 아주 냉정하게 수요와 공급 법칙을 따르는 경향을 띤다. 문화재라는 재화의 공급 능력은 한국에서는 관광객 유치 능력이고, 수요는 사람들의 ‘지불의사(willingness-to-pay)’에 정비례한다. 즉, 누군가 보고 싶어하면 그래도 좀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문화재이고,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바로 굴착기가 들어가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 구청 직원들이 슬쩍 없애버리는, 그런 게 한국의 문화재다.

기본 단위부터 말해보자. 100년 조금 넘는 고흐의 그림은 10억원에서 시작하고, 기분 좋으면 100억 단위를 가뿐히 넘긴다. 500년이 약간 안 되는 한석봉의 글씨 서책자가 1억원이 안 되는 것이 현 한국 문화재의 시세다. 아니, 한국 한문체의 기본인 한석봉의 책자집이 1억원이 안 된단 말야?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이건 수요의 법칙이다. 물론 한석봉의 작품집이 한국을 넘어가면 때때로 가격 상한 없이 높아질 수 있지만, 한국에서 한국 문화재는 정말 ‘험블’한 가격대를 형성한다. 한국 국민은, 유럽이나 미국의 문화재 애호가는 물론이고, 일본이나 중국의 문화 선호대에 비해서도 훨씬 떨어지기 때문에, 문화라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창피할 따름이다.

ⓒ뉴시스지난해 2월10일, 600년간 지켜온 국보 1호 숭례문이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에 타 스러졌다.
그렇다면 대형 건축물로 구성된 문화재는 좀 나을까? 남대문을 불태워먹은 이 나라는 동대문운동장도 부쉈고 시청은 ‘파사드’만 남기고 결국 부쉈다. 이런 나라에서 문화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로마의 대리석들이 천년만 지나면 심각하게 부식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이탈리아나, 비둘기 배설물로 문화재가 부식된다고 파리 시청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연달아 전문가 워크숍을 여는 프랑스와 비교하면, 한국은 문화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아주 기본이 안 되었다. 창의 시정을 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디자인 서울’로 하는 게 문화재 파괴 행위다. 그러나 그게 표가 되고 인기가 되는 한국에서 문화재는 이미 보존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가장 쉽게 서울이라는, 한국 대법원이 ‘관습법’상 수도라고 인정해준 이 도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정부 전문가나 투기꾼의 눈에는 (마치 오세훈 시장이 그렇듯) 이 땅이 2차원의 땅과 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어서, 강은 연결하고 땅은 개발하면 될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3차원으로 공간을 투사해보자. 서울은 산이 아주 멋진 도시이고, 평평하지 않은 ‘스카이라인’이 그 자체로 미를 만드는 공간이다(‘랜드마크’라 불리는, 지금 짓고 있는 고층빌딩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특징인 도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라는, 절대로 투기꾼과 개발자가 사용하지 않는 변수를 하나 더 사용해보자.

서울은 대략 한국전쟁 이후 지금의 도시 형태로 개발하면서 원래 높이보다 3m 정도 성토한 도시다. 즉, 원래의 서울보다 모든 공간이 그만큼씩 땅을 더 쌓아서 높여놓은 도시다. 그래서 서울은 땅을 조금만 파면 가깝게는 조선시대 유물부터 조금 멀게는 고구려와 백제 유물까지, 기분 좋으면 그 이전 유물이 막 튀어나오는, 공간 그 자체가 박물관인 도시다. 한강 유역의 땅들이 대체로 그렇고, 녹색성장에 끼어서 다시 댐을 짓겠다고 하는 한탄강까지의 땅들이, 유럽이라면 부러워할 그런 문화유적을 가득 담고 있는 공간이다.

자, 이 공간에 두바이의 신봉자인 이명박과 오세훈이 점령군으로 온 셈이다. 사막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건물을 짓는 것과, 그 자체가 문화 유적지인 곳에 건물을 짓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게 같을 리 없지 않은가? 광화문에서 잠실의 위례 산성에 이르는 공간들, 그리고 그 속에 남아 있을 고조선 시대까지의 유물들, 그 도시를 유네스코의 문화도시로 지정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야트막한 로마의 문화도시처럼 보존하는 것이 옳지, 랜드마크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개발하는 것이 옳은가?

서울을 로마의 문화도시처럼 보존해야

공룡 화석이 계속 발굴되는 한반도는 생태적으로도 사막 도시 두바이와는 다르다. 위는 MBC 스페셜의 〈공룡의 땅〉.

이런 점에서 생태경제학과 문화경제학은 토건형 개발주의자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으며, 그 적이 대통령으로는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노명박’, 서울시장으로는 이명박, 오세훈으로 이어지는 지독한 두바이 신봉자라는 점에서 학문적·이론적으로는 물론이고 현실적인 면에서도 같다. 어떻게 500년 이상인 왕도의 문화유산이 가득 찬 도시를 두바이에 비교하고, ‘한반도의 공룡’이라는 이름으로 공룡 화석들이 계속 발굴되는 이 땅을 사막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생태와 문화, 그것이 살고, 정말로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노무현-이명박-오세훈-김문수로 이어지는 이 지독한 두바이 신봉자들의 시대가 끝나야 한다.

로마에 가거나 파리에 갔다가, 선조들이 물려준 것으로 잘 먹고사는 사람들이라고 혀를 내두르고 오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 결코 작지 않다. 파리의 ‘앤티크’ 가게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가구 중 하나가 우리가 마구 버린 고리짝 같은 한국의 조선 시대 고가구들이다. 지금 우리는 문화재 위에 건물과 도로를 세우고, 정말 값비싼 시간이 담긴 유물들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발전’이라고 희희낙락하는 바보들이다. 동대문운동장을 부순 바보들, 그들이 과연 문화를 알고 문화재를 알겠는가? ‘용산 두바이’, 그 두바이로 흥한 자, 두바이로 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이명박·오세훈과 같이 망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문화경제학을 지금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기자명 우석훈 (경제학 박사·〈88만원 세대〉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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