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강병호씨(21·가명)가 학생생활상담소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건투를 빈다〉라는 책을 읽은 뒤였다. 자칭 ‘야메’ 상담가로서 각종 지면에서 젊은이의 심리·진로 문제 등을 상담하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펴낸 사례 모음집 〈건투를 빈다〉에는 자기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젊은이가 수두룩했다.
강씨는 지난해 대학생이 되었다. 중·고교 시절 성적이 뛰어나 우등생 소리를 곧잘 들었지만 첫 번째 대입 수능시험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낸 뒤, 1년 재수 끝에 지금 대학에 입학했다. 속칭 ‘명문대’와는 거리가 먼 학교였다. 마음을 다잡고 학교 생활에 충실하려 하지만, 가족과 친지의 실망감 탓에 마음의 짐이 무겁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주위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인생 선배’가 없다는 것. 그러다 읽게 된 김어준씨 책에는 자기와 닮은 ‘젊은 패배자’들이 곳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다니는 대학에 실망해 삼수를 고민하는 동년배’ ‘벤처기업이 성에 차지 않는 30대 직장인’, 그리고 ‘남자인데 성형해도 되느냐’고 묻는 안쓰러운 고민남까지.

대학생 10명 중 2명이 상담소 방문

많은 젊은이가 저마다 깊은 상처를 하나씩 안고 누군가에게 상담을 의뢰한다는 데 ‘연대감’을 느낀 강씨는 내친김에 학교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혹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잠시, 강씨는 상담소를 찾는 이들이 한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강씨처럼 상담소를 찾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대학상담소나 청소년상담센터·마음치료센터 같은 공식 기관은 물론이고 사주카페나 ‘700-◯◯◯◯ 인생 상담’ 따위의 ‘야메’ 공간에도 내담자(상담을 의뢰하는 이)가 넘쳐난다. 일간지나 포털사이트 카운슬링 코너도 인기를 끈다. 상담자들은 한결같이 ‘언젠가부터 내담자가 부쩍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학생생활상담소가 잘 운영되는 것으로 평가받는 서강대를 보자. 서강대 학생생활상담연구소에서 지난해 8월 발간한 〈서강상담연구〉에 따르면, 개인 상담을 받은 학생 수는 모두 1643명으로 전체 학생(7421명) 중 22.1%나 된다. 10명 중 2명 이상이 상담소 문을 두드린 것이다. 상담 내용은 성격(38%)·대인관계(19%)·가정 문제(10%) 순이었다. 학업(5%)이나 진로·취업(8%), 이성·성(8%)에 대한 상담 건수는 비교적 낮았다.

흥미로운 건 1학년 학생의 상담 비율이 23%로 가장 높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1학년 학생의 상담 비율이 가장 낮았다. 생활상담연구소 측은 이런 현상이 저학년 때부터 취업을 미리 준비하는 태도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눈여겨볼 점은, 1회로 상담이 종결된 경우가 61%로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16회 이상 장기 상담을 받은 경우는 6.2%에 지나지 않았다. 심각한 문제가 있기보다는 상담 그 자체에 만족한 이가 많다는 뜻이다. 
      
서울대 학생생활문화원 심리상담센터에도 학생들의 발길이 잦다. 인문대의 경우 아예 지난해 자살 예방 프로그램까지 가동하며 독자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3년 사이 세 건이나 발생한 학생·강사 자살 사건의 영향이다.

인문대는 지난해 7월부터 5개월 동안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한 결과, 104명의 학생이 심리 상담을 받았다. 이 중 13명은 6개월 이상 심층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약물 치료도  병행한다. 서울대 상담센터

ⓒ시사IN 안희태요즘 대학생은 학교생활상담소(위) 등에서 자기 고민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관계자는 “서울대 학생의 경우 상대적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보다는 대인 관계, 특히 학생 사이의 경쟁 때문에 고민하는 이가 많다”라고 밝혔다.

이들 상담센터는 개인 상담 사례의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다. 하지만 상담가들의 입을 통해 공통적인 현상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김어준씨는 “요즘 젊은이는 자기 선택을 못한다”라고 지적한다. “요즘 ‘몸짱’이 트렌드인 까닭에 여자 친구가 자꾸 헬스클럽에 가라는데 퇴근한 뒤에 운동하려니까 피곤하다,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는 남성이 있다. 아니, 이런 질문에 누가 답해줄 수 있겠나. 배 나온 채로 행복하게 살든지 여자 친구랑 싸우기 싫으면 고분고분 말 잘 듣든지, 결국 자신이 선택할 문제다. 이건 마치 ‘내가 언제 행복한지 말해주세요’ 하는 것과 같은데 이런 황당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자기 선택’을 못하는 사회

한 상담센터 관계자도 “요즘 세대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자식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한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시행착오를 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인지 연애나 대인관계 등 뜻밖에 사소한 문제로 고민하는 이가 많다”라고 지적한다. 김어준씨는 “좋은 직장 잡고 결혼하고 나면 부모는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내가 누구인지, 뭘 하고 싶은 건지’ 뒤늦게 고민에 빠진다. 그래서 분명한 대상이 없는 화풀이를 하고,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도 많다”라고 말한다. 김씨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어른을 양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반론도 있다. 요즘 젊은이가 유독 미성숙하거나 정신적으로 취약해 상담소를 찾는 게 아니라는 시각이다. 상담 문화에 익숙한 데다 ‘자기 행복’을 찾으려는 욕구가 이전 세대보다 한결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상담센터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상담을 대하는 학생들 마인드가 개방적이다. 상담소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걸 보면 자기에 대해 이해하려는 욕구가 강하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윤무영서점가에서도 심리상담 관련 서적이 인기를 끈다.
상담 문화가 융성하는 까닭을 가족 공동체 해체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심영섭 교수(대구사이버대·상담심리학)는 “예전에는 젊은이가 이모·고모·삼촌 등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지만, 지금은 준거 집단이 없다. 가족 공동체를 통해 위로받거나 자기를 통찰할 기회가 없다”라고 말했다. 서강대 학생생활상담소 최명식 교수도 “요즘 젊은이가 입시·취업·인간관계 등에 부쩍 치이지만, 그걸 풀어줄 스트레스 완충 지대가 없다. 가정이 무너진 느낌이랄까. 젊은이가 기댈 만한 탄력 있는 네트워크나 커뮤니티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또 “10년 전엔 한국 대학생의 정신 건강도가 미국 학생에 비해 좋았는데 지금은 비슷하다”라고 지적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점점 더 경쟁과 속도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특징도 한몫한다. 심영섭 교수는 “요즘 사람은 인생에 쉬는 시기가 없다. 중학생 때에는 마음 편히 놀다가 고교 때 열심히 공부하라든가, 입사 후엔 정년이 보장된다든가 하는 마음의 안정감 없이 평생 불안한 상태로 사는 거다. 그 불안감을 표현하려 상담소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담소를 찾는 내담자들도 예의 ‘속도’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상담자가 자신의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 상담센터 관계자는 “우리나라 사람은 상담자에게 무당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다. 자기를 표현하는 데엔 서투르면서 상담자가 단번에 자기 고민을 알아차리길 바란다. 그러니까 사주카페 같은 ‘야메’ 상담이 성행하는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상담자 한 명 기르는 데 10년

‘마음치료센터’ 같은 사설 상담소를 찾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상담소의 경우 대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사설 상담소에서는 1시간 상담에 적게는 5만원부터 10만원까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유성진 교수(서울디지털대 마음사랑인지행동센터)는 “상담을 원하는 인구가 늘고 있는 데 반해, 사설 상담소 비용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국가 차원에서 상담 서비스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 본격 상담 문화가 정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상담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상담자 양성도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상담자 한 명이 길러지는 데 10년은 걸린다. 분명한 것은 옛날 사람이 무당을 찾고 종교를 믿는 것처럼 상담이 일상화되리라는 점이다.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기댈 곳이 점점 사라지는 탓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유슬기 인턴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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